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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달의 죽음 (2) (3/96)


3. 달의 죽음 (2)
2022.09.11.


마족이 지상에 머물기 위해 인간의 주술사와 계약을 맺었다.

마족의 피를 인간에게 종속시키고 그 대가로 인간의 육신을 유지하는 내용의 계약이 이루어졌다.

마족의 피는 그 뒤로 반드시 인간과 한 쌍으로 태어났다. 운명의 반려라고 부르는 상대는 제국의 다섯 가문에서 번갈아 가며 태어났는데, 주술사의 피가 이어진 이 다섯 가문은 황실과 더불어 제국의 구심점이 되었다.


“내가 먼저 갈게.”

스르릉!

리얀이 허리춤에 칼을 꽂아 넣었다.

평소에 황실 집무실 바닥에 드러누워 뒹굴대는 걸 좋아하는 리얀은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칼을 풀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폐하께서 가신다고 미리 알리면 그새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리얀은 진지했다. 그리고 신중했다.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이 레스칼과 한 쌍의 운명으로 태어난 것은 확실했다. 카르타헤나가 태어나던 해, 다섯 가문 중 하나인 피엘리온이 그렇게 공표했으며 반려의 증거로 몸에 나는 표식을 공개했다.

사 년 전 레스칼과 카르타헤나가 정식으로 혼인하기 전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마족의 피와 그 종속자는 반드시 한 쌍으로 태어났다. 역대 황제들 중 마족의 특성이 거의 없이 태어나는 경우, 반려 또한 태어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지만 레스칼이 태어난 뒤에는 카르타헤나가 태어났다.

표식은 부인할 수 없는 증거였다.

한 쌍으로 태어난 이들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다고 했다. 마족의 피를 다스리는 방법인 ‘접촉’ 역시 즉각적으로 효과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황후는 혼인 이후 사 년 동안 온갖 핑계를 대며 접촉을 피했다.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리얀과 세르벤만이 황후가 사기꾼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카르타헤나가 태어난 해, 최고 사제가 직접 표식을 확인했다. 약혼식의 과정으로 레스칼 또한 표식을 보았다. 표식이 있는 한 카르타헤나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황후는 자신의 존재를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무기로 레스칼을 고문하고 있었다. 두 그림자 기사가 카르타헤나 황후라면 이를 가는 이유였다.

특히나 리얀은 더 늦기 전에 가짜 반려인 황후를 폐위하고 진짜를 찾아야 한다는 쪽이었다.


“오늘은 절대 놓칠 수 없어.”

레스칼은 곧 서른 살 생일을 맞이할 것이다.

그전까지 마족의 피를 다스리지 못하면 레스칼은 완전히 인성을 잃고 마족이 될지도 몰랐다.

이제껏 황실 역사에 그런 사례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증상이 빠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 마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런데 네 칼은 나한테 맡기면 안 될까?”

세르벤이 리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왜?”

“네가 황후 폐하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협박하는 장면이 자꾸 떠올라서. 그래도 황후 폐하시잖아.”

리얀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못 할 것도 없지. 폐하의 수호기사로서 내 역할은 폐하를 수호하는 거니까. 황후 폐하가 계속 그렇게 접촉을 인질로 삼아 폐하를 위협하면 내가 칼을 쓰지 못할 이유는 없어.”

“하아……. 진심이로군. 폐하,”

쌍둥이 여동생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세르벤이 레스칼에게 도움을 구했다.

하지만 리얀은 벌써 칼을 찬 채 잽싸게 집무실을 벗어났다.


“엇! 리얀!”

세르벤이 손을 뻗었지만 늦었다. 치사하게도 리얀은 문이 아니라 창문을 이용했다.


“빨리 가야겠군요. 리얀이 사고를 치기 전에.”

세르벤이 서둘러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 잠깐 사이에 비늘은 손톱 반 개 정도 크기로 자라났다. 마족처럼 까맣게 굳어 가는 손목을 한 손으로 붙든 레스칼이 걸음을 옮겼다.

더는 접촉을 미룰 수 없었다.

원치는 않지만 오늘은 접촉을 두고 황후와 협상이라도 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황후궁은 멀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황후는 제 침실에 얌전히 틀어박힌 채였다.

* * *



“황후 폐하! 대륙의 가장 높은 곳에서 흐르는 피, 엘리아든 제국의 황제, 레스칼 로바니알렌 파르켄 폐하께서 드십니다!”

시녀들을 내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간신히 혼자 있을 시간을 만들어 생각을 정리하려던 라실리아는 급작스럽게 황제를 맞이해야 했다.

예언자는 보통 침착하기 마련이었다.

라실리아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자신이 허둥대는 성격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신전에서의 생활은 늘 고요했고, 라실리아를 동요하게 만드는 것은 아주 난해한 예언 정도였다. 그마저도 스물다섯 해를 넘기면서부터는 익숙해졌다.

그러나 제국의 황후로 눈을 뜬 이후로는 내내 허둥대기만 하는 것 같았다.


“자, 잠깐만!”

황제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라실리아는 자신이 잠옷 차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시녀들을 전부 내보냈던 게 문제였다.

라실리아가 다급히 눈에 보이는 서랍장 같은 것을 열었다. 하지만 서랍장은 향수와 보석이 채워져 있을 뿐, 옷 비슷한 것은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겠나이다!”

그으응…… 쿵!

게다가 제국의 황제는 기다리는 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제 대답은 아랑곳없이 침실 문이 활짝 열렸다.


“잠……. ……하아.”

이미 늦었다.

더 이상의 당황은 의미가 없었다.

라실리아는 짧은 한숨으로 당혹감을 마무리 짓고 몸을 돌려 황제를 마주했다.

거짓이든 아니든 자신은 지금 환자이긴 했으니 잠옷을 입고 있어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미……,”

그러나 몸을 돌리는 순간, 그래서 현란하게 반짝이는 금안을 마주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미쳤냐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라실리아가 가까스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저 눈은 잊을 수도 없었다. 꿈에 나온 그 남자였다.


‘맙…… 소사.’

몸이 굳었다.

저 금안이, 그대로 칼날이 되어 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몸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정말인 모양이군. 옷도 갈아입지 않은 걸 보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번쩍이는 금안을 더는 감당하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았을 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라실리아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황제가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 기억을 잃었습니다.”

라실리아가 잘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황제의 금안은 너무 현란했다. 자칫 저 눈에 빨려 들어가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라실리아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대로 기억상실을 연기해야 하는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제 정체를 밝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여기서 황후라고 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황후의 신분이면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일이 결코 쉽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정치적으로든 신분상으로든 몹시 복잡한 문제가 시작될 것이다.


“제 자신이 누군지조차 잘 모르는 입장이라 남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잠옷 차림을 한 것에 대한 변명이자, 사정이 그러니 그만 가 달라는 점잖은 부탁이었다.

라실리아에게는 아직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런가. 이상해. 다른 사람 같아.”

제 말을 못 알아들은 게 아닐 텐데도 황제는 딴소리를 했다.

턱을 작게 갸웃댄 그가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

라실리아가 즉시 걸음을 뒤로 물렸다.


“외람되지만 폐하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부 사이건 뭐건 간에 지금은 그저 낯선 사내일 뿐이라는 말이었다.


“그건 상관없고.”

“……?”

어쨌거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황제는 황후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꿈속의 여자가 황후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하는 짓을 봐도 황제는 황후를 소중히 대하지 않았다는 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황제는 황후가 하는 말을 조금도 들어먹질 않았다.

라실리아가 물러선 거리를,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다시 좁힌 황제가 덥석 라실리아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폐하.”

라실리아가 황제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주어도 황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늘은 나를 피할 수 없어.”

번들대는 금안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멀 것 같은데, 황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피하는 게 아니라…… 기억을 잃어 혼란스럽습니다. 시간을 좀 주시면…….”

“시간이 없다.”

“네……?”

황제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라실리아가 눈매를 찌푸리며 작게 되묻는 순간이었다.


“……달라.”

이렇게 중얼댄 황제가 갑자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스읍,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제 살갗 위에서 들려왔다.


“흣!”

당황한 라실리아가 황제의 발을 꽉 밟았다. 뿌리치려고 해도 소용이 없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엇, 저런.”

“와, 이제는 저런 짓도 하시네.”

황제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기사들이 한마디씩 흘렸다.

안간힘을 다해 발을 밟는데도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쳤어. 왜 이러는 거야.’

어깨를 붙든 손은 뜨거웠다. 이제껏 신전에 갇혀 지내온 라실리아는 타인의 체온에 면역이 없었다.

체온이 원래 이렇게 뜨거운 건지도 몰랐고, 똑같이 뜨겁다고 해도 사람의 온도는 난로의 온도와 다르게 느껴졌다.

스읍, 숨을 들이쉬던 황제가 이번에는 살갗에 입술을 댔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라실리아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하지 마!”

다들 놀랐다.

황제의 기사들이 어깨를 움찔했고, 라실리아도 당황해 몸이 굳었다.


“……그렇다면.”

더 놀라운 것은 황제의 반응이었다.

황제는 몹시 싫은 것처럼 몸을 한참 미적대더니 마지못해 라실리아를 놓아주었다.

재빠르게 거리를 벌린 라실리아가 방금 전 입술이 닿았던 목덜미를 손으로 감싼 채 말했다.


“몹시 혼란스럽고, 곤혹스럽습니다. 이만 가 주시길 청합니다.”

황제가 좀 전처럼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답을 했다.


“가기 싫은데.”

“폐하.”

기가 막혀 노려보았더니 그가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해에 감사드립니다. 차림새가 적절치 못해 배웅을 할 수 없음도 함께 이해해 주십시오.”

“…….”

가기 싫다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황제는 그 뒤에도 아주 느리게 발을 떼었다.

침실 문을 나서기 전 황제가 라실리아를 뒤돌아보았다.


“기억은 언제 돌아오지?”

“저도 모릅니다, 폐하.”

“계속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지금은 돌아가겠다. 저녁 때 다시 보지.”

쿵.

거절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그대로 문이 닫혔다.

* * *



“방금 그건 대체 뭐였습니까, 폐하?”

황후의 침실을 떠난 뒤, 리얀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를 안으시던데요? 그게 가능한 일이었습니까?”

세르벤이 그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묻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두 기사가 알기로 레스칼과 황후 사이에 저 정도로 친밀한 접촉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황후가 번번이 피하기도 했거니와, 애가 닳았어야 할 레스칼 또한 접촉에 열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레스칼은 인간과의 접촉을 싫어했다. 마족의 피 때문일 것이다. 운명의 상대인 황후라고 해도 다를 게 없었다.

인간보다 몇 배나 예민한 오감이 접촉을 싫어하게끔 만들었다.


“오늘은…… 음, 그래. 냄새가 좋아서.”

레스칼은 이런 답으로 기사들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냄새라니……. 황후 폐하의 냄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평소에는 가까이 가면 냄새가 난다고 싫어하셨잖습니까!”

“오늘은 달랐어.”

“달랐다고요? 어떻게요? 황후 폐하께서 끝내주는 조향사라도 어디서 몰래 들이셨다는 말입니까?”

의외로 레스칼은 리얀이 놀라서 던진 말을 진지하게 고심했다.


“향수 냄새가 아니었다. 그냥 황후에게서 나는 냄새였어. 심지어 똑같았고.”

“그런데 왜……?”

“나도 몰라. 같은 냄새가 오늘은 다르게 느껴졌다. 계속 맡고 싶었어.”

“예에?”

리얀이 입을 딱 벌렸고, 세르벤이 당황해 머리칼을 마구 헝클였다.


“그게 좀…… 갑자기 왜 그런……,”

그때였다.


“폐하! 손! 손을 보십시오!”

리얀이 다짜고짜 레스칼에게 달려들어 손을 붙들었다.


“비늘이!”

“아…….”

그 말대로였다.

황후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비늘이 돋아나고 있던 손목 안쪽이 지금은 멀쩡했다.

원래 블루문이 지고 나면 몸은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빨리 변화가 나타난 적은 이제껏 없었다.

눈을 부릅뜬 리얀이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 뭐야……. 그럼 황후 폐하가…… 진짜였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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