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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달의 죽음 (1) (2/96)


2. 달의 죽음 (1)
2022.09.07.



“황후 폐하. 그만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

사람의 목소리에 새들이 후드득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새가 사람 말을 한 것보다 더 라실리아를 놀라게 한 것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황후 폐하……?

대체 누구더러 황후라고 하는 거야.


“그럼 문을 열겠습니다.”

쿵!

터무니없이 묵직하게 들리는 문 소리가 나고, 이어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차르륵!

침대 발치 쪽에만 드리워져 있던 매끄러운 커튼이 젖혀졌다.


“편히 주무셨는지요, 황후 폐하.”

“……!”

라실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대신 입을 벌렸다.

입술 사이로 소리 없는 경악이 토해졌다.

양손을 가슴에 올리고 공손히 허리를 숙이는 여섯 명의 여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황후라 부르고 있었다.


“황후 폐하. 왜 그러시는지요.”

오래도록 반응이 없자 맨 앞에 선 여인이 물었다.

나이나 태도로 보아 그 여인이 이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을 듯했다.


“나를…… 뭐라고 불렀…….”

“황후 폐하?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십니까?”

“…….”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잘못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 여인들이 황후라 부르는 것은 자신이 분명했다.

어째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라실리아가 억지로 침을 삼켰다. 침이 아니라 바늘을 삼키는 기분이었다.


“내가 누구…… 라고?”

“네……?”

여섯 명의 여인들이 라실리아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제국의 황후,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소문이 빠르게 황궁 안을 번져 나갔다.

* * *

분위기가 이상했다.

눈을 떠 보니 갑자기 황후가 된, 저 멀고 먼 왕국의 예언자조차 지금 이 분위기는 말이 안 된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황후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데 거기에 대고 궁정의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러시냐고 했다.

이상하다 못해 수상쩍기까지 했다.


“예, 그러면 뭐…… 일단 기억상실이라 하고…… 폐하께는 그렇게 말씀을 올릴까요?”

황제를 들먹인 궁정의가 조심스레 제 눈치를 보며 물었다.


‘뭐지, 이건.’

궁정의나 시녀들이나 아무도 기억상실을 의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굽신대며 제 눈치만을 볼 뿐이었다.


‘……아무도 안 믿는 거야. 기억상실이라는 말을.’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잠시 생각하던 라실리아가 궁정의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이전에도 기억상실에 걸린 적이 있던가?”

“네? 으음…… 그건 아니옵니다, 황후 폐하.”

아니라고는 하지만 라실리아는 궁정의가 대답 전에 눈알을 한 바퀴 굴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기억상실은 아니었지만 그 비슷한 일은 있었다는 말 같은데.”

눈알이 두 바퀴 굴렀다.


“그게……. 워낙 폐하께서 예민하시고 섬세하시다 보니…… 블루문이 뜨는 날이면 종종 탈이 나시는 것이지요.”

“블루문?”

“예, 황후 폐하. 며칠 안으로 블루문이 뜰 것이옵니다.”

  

 
블루문이라면…….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오직 제국에서만 뜨는 푸른 달은 마계의 달이라고 했다. 어떤 곳에서는 달의 죽음이라 불리기도 했다.

무서울 정도로 커다랗고 환한, 그렇지만 창백한 푸른 달이 뜨는 밤에는 그림자를 볼 수 없었다. 눈에는 보이지만 지상에는 드리워지지 않는, 까마득한 환상 같은 달이었다.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마냥 옛날 얘기 같았는데.’

그래서일까.

예로부터 블루문에는 온갖 종류의 불길함이 함께했다.

블루문이 뜨면 마족이 부활한다는 말도 있었고, 블루문은 저주를 이뤄 주는 힘을 지녔다고도 했다. 선한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들고 죄 없는 자의 목숨을 골라 거둔다고도 했다.


‘기억상실이 블루문과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아냐, 그렇다고 해도 걱정은 해야지.’

예민하고 섬세하다는 말은 몸이 아프다는 말과는 다르게 들렸다.


‘믿지 않는다는 건 꾀병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궁정의는 황후의 몸이 예민하고 섬세하다고 했지, 병약하다고 하지 않았다. 그건 아프다는 말과는 어감이 달랐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믿는 게 아닐까. 하물며 진짜 황후가 아니라는 말 같은 건 더더욱.’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일단은 차분히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결론을 내린 라실리아가 쥐죽은 듯 서서 제 눈치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종종 몸이 불편한 날이 있었다면 폐하께서도 미리 짐작하고 계실 테니 굳이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될 듯싶다.”

황제가 알면 일이 더 번잡스러워질 것이다.


“아……. 진심이십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궁정의가 반색을 했다. 너무 표시가 날 정도였다. 황제에게 일일이 꾀병을 고하는 일이 난처했다는 식이었다.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그래,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야. 델라르타로 돌아가야 해.’

갑자기 가슴에 바위가 얹힌 듯 갑갑해졌다.

신이 자신을 되살리셨다면 이유가 있을 터였다.

자신이 죽은 이유가 리카르도 왕제의 반역 탓이라면, 되살아난 지금 반역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혼자 조용히 기억을 되찾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 이제 그만 나가 주었으면 한다.”

라실리아의 말에 다들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어쩌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다 못해 비굴한 자세를 취했다.


‘황후가 어지간히도 어려운 모양이야.’

다들 신속히 인사를 하고 줄줄이 밖으로 나갔다. 소리도 한 올 내지 않는 걸음들이 참 빠르기도 했다.

* * *



“뭐라고? 기억상실?”

탓! ……데구르르.

궁정의에게 전한 말과는 별개로, 황궁 안은 소문이 빨랐다.

게다가 황제에게는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민하게 살피려 드는 두 명의 그림자 기사가 있었다.

그중 하나, 리얀은 기억상실이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 막 베어 물려던 사과를 손에서 떨어트렸다.

인간 중에서는 가장 먼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리얀이 이런 실수를 하는 건 확실히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어이가 없다는 뜻이었다.


“응. 기억상실.”

황후궁에서 갓 구운 빵처럼 따끈따끈한 소식을 물어 온 이는 또 다른 그림자 기사인 세르벤이었다.

세르벤이 발끝으로 사과를 툭 차올려 왼손으로 받아 리얀에게 건넸다.

리얀이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제 셔츠에 사과를 슥슥 문질러 닦아 다시 건넸다.

아삭!

리얀이 사과를 커다랗게 베어 물며 세르벤을 쳐다보았다.


“기억상실이 그렇게 흔한 질병이었나? 그러니까, 황후 폐하께서 종종 걸리시는 심장병이나 불면증이나 자살충동이나 사지마비 같은 것처럼?”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때를 봐. 곧 블루문이 뜰 거잖아. 그럼 무슨 병이든 가능하지.”

“아, 그렇지. 블루문.”

두 기사의 표정이 비슷해졌다.

시큰하게 꼬이는 입매가 시다 못해 떫을 정도였다.


“블루문이 뜨면 폐하야말로 진짜 아프실 테고, 황후 폐하께서는 그 일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으니 미리 선수 쳐서 아픈 척을 한다……. 그래. 그 패턴이야 사 년 내내 지겹도록 봐 왔으니 그렇다 쳐. 그런데 왜 이번에는 기억상실이야?”

아삭!

리얀이 콧등을 찡그리며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두 입 만에 씨 부분만 남은 사과를 보며 세르벤이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사악하고 음험하신 황후 폐하께서는 기억을 잃어도 ‘접촉’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걸 모르시는 건가?”

세르벤이 피식 웃으며 리얀의 주름진 콧등을 손끝으로 가볍게 눌렀다.


“우리의 악랄하고 양심 없는 황후 폐하께서 그 정도 계산을 못 하셨을 리는 없다고 보는데. 뭔가 다른 속셈이 있겠지.”

“그게 대체 뭐일 것 같아?”

“글쎄. 듣자 하니 궁정의에게는 폐하께 알리지 말라고 하셨대.”

“그건 더 이해가 안 가는데. 블루문의 접촉을 피하려고 꾀병을 부린 거잖아. 그런데 왜 비밀로 하겠다는 거야? 사방팔방 떠들고 다녀야 할 시점인데.”

“뭔가 극적인 공개를 준비하신 게 아닐까? 그런 걸 좋아하시잖아. 혼자 주목받는 거.”

“너무 좋아하셔서 탈이지.”

“그러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두 기사는 평소에도 죽이 잘 맞았지만 유독 카르타헤나 황후와 관련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그들은 진작 카르타헤나 황후가 변덕스러운 거짓말쟁이에 양심이라고는 없는 사기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블루문만 되면 갖은 핑계를 대서 침대에 드러눕는 게 그 증거였다.

아삭!

사과가 아니라 적군을 물어뜯듯이 씨 부분까지 으적으적 씹으며 리얀이 중얼거렸다.


“그래, 곧 블루문이야……. 폐하께서는 어때? 아직 조짐이 보이지 않아?”

“그거야 직접 여쭤 보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걸 누가 몰라. 폐하께서는 엄살이 없는 분이라고. 당장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도 죽지 않았으니 됐다고 하시는 분이야.”

안타깝게도, 그 발언 역시 이견이 필요 없었다.

엘리아든 제국의 현 황제 레스칼은 많은 면에서 평범한 인간과는 달랐다.

현란한 금안에서 시작하는 외양부터 달랐다.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이질적이기도 했다.

그는 황좌에 앉아 있지 않을 때에도 그 이질감 때문에 외따로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시력은 인간의 두 배나 밝았고, 수명도 마찬가지였다. 피부는 비정상일 정도로 질겼고 피로와 질병을 몰랐다.

인간의 몇 배나 튼튼하고 강인했다. 육신의 한계로 인한 절망을 몰랐고, 절망에서 비롯되는 인간적인 감정들 또한 알지 못했다.

엘리아든의 황실에 섞인 마족의 피 때문이었다.

세월을 거듭하며 마족의 피는 희석됐고, 마족의 특징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황제도 있었다지만 레스칼은 유난했다. 도무지 감출 수 없는 마족의 특성을 뚜렷이 지니고 태어났다.

하지만 그 괴물 같은 몸에도 고통은 있었다.

마족의 피에서 오는 비대한 힘을 인간의 육신이 가둬 두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고통이었다.

마계의 달인 블루문이 뜨는 날이면 마족의 피는 인성을 비웃듯 잔인하게 날뛰었다.

피부가 갈라져 그 안에서 단단한 비늘이 튀어나오고, 이마뼈를 뚫고 뿔이 자랐다. 등을 찢고 날개뼈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달이 지면 외형적 변화는 사라지지만, 그렇다고 고통마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참 입술을 질겅이던 리얀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어. 우리의 악독하고 음흉한 황후 폐하께서 무슨 짓을 꾸미고 계신지 알아보고 올게.”

세르벤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기억상실 어쩌고 하는 것 보니까 이번에도 황후 폐하는 침실에만 틀어박혀 지내실 생각이야. 그럴 땐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잖아.”

“달라질 건 없지만 그래도 내가 답답하니까!”

리얀이 울컥 목소리를 높이는 그 순간이었다.

텅!

예고도 없이, 집무실 안쪽의 문이 열렸다.


“폐하?”

문을 연 것은 레스칼이었다.

그가 손목을 움켜쥔 채 걸어왔다. 레스칼은 거의 표정이 없었지만 지금은 두 기사들이 확연히 알아볼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몹시 이상한 일이었다.


“황후에게 가야겠어.”

“네?”

그리고 이런 말도 이상했다.

두 기사들이 아는 한 레스칼이 먼저 황후를 찾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들이 카르타헤나 황후를 싫어한다면, 레스칼은 그걸 넘어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레스칼은 내심 황후보다 황궁 정원의 분수가 더 쓸모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가 황후를 찾고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레스칼이 리얀을 향해 움켜쥐고 있던 손목을 내밀었다.


“증상이 나타나는 중이다.”

“폐하……!”

레스칼의 손목 안쪽에는 살갗이 가닥가닥 갈라져 투명한 돌 같은 비늘이 돋아나는 중이었다.


“제기랄!”

리얀이 눈을 질끈 감았다.

사악하고 음험하며 악랄한 거짓말쟁이 황후에게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황후는 마족의 피를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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