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지막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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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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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예언
2022.09.04.
-제발…….
여자가 흐느꼈다.
가슴에 칼이 꽂혀 있었다. 칼날을 타고 차게 식은 피가 흘러내려 바닥에 검붉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저벅. 저벅…….
쓰러진 여자의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여자는 그게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다. 눈을 들어 쳐다보자 태양을 마주하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그 눈은 인간이 똑바로 쳐다보기엔 너무 찬란한 금안이었다.
눈이 불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여자가 약하게 흐느꼈다.
-제발……. 살려 줘요. 날 이대로 죽이지 말아요.
가녀린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듣기만 해도 고막이 녹을 것처럼 절절한 감정이 흘러넘쳤다.
가는 손목이 꽃줄기처럼 흔들리며 제 앞으로 다가온 남자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날 외면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의 운명이에요. 당신이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에요.
여자의 간절함은 남자에게 닿지 않았다.
남자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가슴에 칼을 꽂힌 채 피 흘리는 여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고작 이런 게 운명일 리 없어. 너는 내 운명이 아니야.
남자의 말은 잔인했다.
마침내 여자도 깨달았다.
남자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
이렇게 눈앞에서 죽는다 해도 마음이 달라질 일은 없다는 걸.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말을 마친 남자가 휙 등을 돌려 걸어갔다.
멀어지는 등이 잔인했다. 끝까지 달라지지 않는 무심함도, 외면도 잔인했다.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했다.
여자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내는 몸이 가파르게 흔들렸다.
-이럴 수는…… 없어.
불신이 여자의 얼굴에서 생기를 앗아 갔다. 여자는 시체처럼 어둑해진 얼굴로 절망을 내뱉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해야 해……. 그게 우리의 운명이니까.
말을 마친 여자가 눈을 감고 쓰러졌다.
버려진 고백이 역한 피내음과 함께 창백한 얼굴 위에 얼룩으로 남았다.
* * *
“아……!”
거기서 꿈이 끝났다.
라실리아가 입을 벌려 소리 없는 신음을 토해 내며 눈을 떴다.
“라실리아 님? 괜찮으세요?”
곁에서 플로타가 물었다.
지금 라실리아는 꿈지기 하나만을 대동한 채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마차에 타서 잠깐 눈을 감았는데 그사이 꿈을 꾼 모양이었다.
“응……. 괜찮아.”
라실리아가 식은땀이 고인 속눈썹을 깜박거렸다.
지나치게 생생한 꿈 탓에 아직 현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의식의 반은 아직도 꿈에 잠겨 있는 듯했다.
지금도 눈에 보이는 건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꿈지기 플로타가 아니라, 소름이 끼칠 만큼 무감하던 금안이었다.
그 금안이 마치 가슴에 꽂힌 칼날 같아 라실리아가 이를 꽉 물었다.
“혹시 꿈을 꾸신 건가요?”
라실리아는 델라르타 왕국의 예언자였다.
신은 라실리아의 꿈을 통해 앞날을 보여 주었다. 라실리아의 꿈은 꿈지기들의 증언을 거쳐 제단에 봉하고, 그렇게 신의 말씀이 되었다.
“꿈을 꾸긴 했는데……. 예언은 아닌 것 같아.”
신의 말씀은 늘 명확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 줬고, 그래서 대처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얼굴도 모르는 자들이 나와 델라르타 왕국과는 하등 상관도 없는 대화를 나누는 건 예언이 될 수 없었다.
“라실리아 님도 예언이 아닌 꿈을 꾸시나요?”
“그런 모양이야. 그런데 얼마나 왔지? 아직 멀었나?”
라실리아가 애써 초조함을 누르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금안의 남자가 나오는 이상한 꿈을 꾸기 전, 라실리아는 델라르타 왕국을 송두리째 뒤엎을 만한 끔찍한 예언을 보았다.
제12왕제 리카르도 공이 왕의 목을 베는 장면이었다.
꿈을 꾸자마자 라실리아는 꿈을 제단에 봉인하고 즉시 왕에게 전언을 보냈다.
증인으로 삼은 건 플로타 하나였다. 너무 위험한 예언이라 극도로 말을 아꼈다. 라실리아가 예언자로서 거주하는 대신전에는 리카르도 왕제의 사람들도 많았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긴급한 예언이 있다 일렀음에도 왕실에서는 답이 없었다. 결국 라실리아가 직접 왕을 찾아가기로 했다.
예언자가 스스로 대신전을 떠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라실리아는 이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신관들조차 모르게 대신전을 몰래 떠나왔다. 라실리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꿈지기이자 친구 역할을 해 온 플로타와 대신전의 마부뿐이었다.
“라실리아 님은 거울을 보고 싶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나요?”
플로타가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뭐……?”
창을 통해 어둑한 숲길을 바라보던 라실리아가 고개를 돌려 플로타를 마주했다.
“왜 그런 걸 묻지?”
플로타는 피하지 않고 라실리아의 시선을 받았다.
평소처럼 반듯하게 앉는 게 아니라 발끝을 들고 앉아 검지에 머리카락을 꼬아 걸고 있는 플로타가 오늘따라 낯설었다.
“늘 궁금했거든요. 어떻게 자기 생김새가 궁금하지 않을 수 있나, 싶어서요. 예언자도 사람이고 여자일 텐데.”
“거울을 보는 것과 예언은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게다가 어지간한 일은 네가 거들어 주잖아.”
“네, 그랬죠. 그래서 난 너무 싫었어요. 그렇게 하찮게 여길 미모라면 그냥 나한테 주지.”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플로타?”
정말로 이상한 말을 한 플로타가 씩 웃었다. 어딘지 차갑게, 혹은 불길하게.
“알고 계시라는 거예요. 그래야 죽을 때 조금이라도 덜 억울하지 않겠어요?”
“죽을…… 때?”
플로타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아주 어릴 때부터 신전에서 예언자로 자라 온 라실리아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그 모든 걸 대신한 사람이 플로타였다.
그래서 지금 플로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 낯선 표정을 짓고 있는 플로타는 이제껏 자신이 알던 플로타가 아닌 것 같았다.
“플로타, 대체 왜 그러는 거야. 혹시 나한테 화라도 난 거야? 내가 뭘 잘못했어?”
플로타가 까르륵 웃었다.
“잘못이야 많이 했죠. 라실리아 님이 예언자고, 나는 그냥 하찮은 꿈지기라는 것부터가 잘못이에요. 말이 꿈지기지, 사실은 몸종과 다를 바 없는데. 게다가 라실리아 님은 한 번도 예언자가 가진 힘을 제대로 쓸 생각도 안 해 봤잖아요?”
다음 순간 플로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나는 그 모든 게 간절했는데. 라실리아 님이 가진 것 전부가.”
“플로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알게 된 플로타의 속마음은 너무 괴로웠다.
라실리아가 입술을 무는 순간이었다.
이히히힝!
덜컥, 쿵!
갑자기 마차가 멎는 바람에 라실리아의 몸이 앞으로 쓰러질 뻔했다.
“아, 도착했나 보군요.”
플로타가 표정을 바꿔 반색을 했다.
그리고 마차 문이 쾅 열렸다.
“무슨……!”
라실리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마차 문을 연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리카르도 왕제였으니까.
“시간을 정확히 맞추셨네요, 전하.”
플로타가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했다.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라실리아를 후려쳤다.
“플로타, 설마 네가……?”
플로타가 배신했다. 아무도 모르게 왕실로 달려가야 하는 길을 리카르도 왕제에게 알려 주었다. 보나마나 예언의 내용도 알렸을 것이다.
“내가 그랬잖아요.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덜 억울하시라고. 아무것도 모른 채 죽는 것보다 그게 낫죠?”
리카르도 왕제가 다가와 라실리아의 턱을 움켜잡았다.
“여어, 이렇게 뵙는군. 델라르타의 아름다운 예언자님.”
악력이 어마어마했다. 턱뼈가 바스라질 것 같았다.
“그 손…… 치워. 나는 신의 눈이자 입이다.”
라실리아가 고통을 감추고 말했다.
“아아, 그 신이 나한테는 썩 좋은 신 같지가 않아서 말이지.”
리카르도 왕제가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전혀 닮지 않은 플로타와 리카르도 왕제가 그 순간 쌍둥이처럼 닮아 보았다.
“내가 형님의 목을 딴다고 했다면서? 예언자님은 그걸 형님한테 알리러 부랴부랴 가는 길이고. 그걸 알게 되면 형님은 어떻게 나올까……. 보나마나 한 발 앞서 내 목을 따지 않겠어?”
“그건 신께서 델라르타 왕국을 지켜 주고 계신다는 뜻…… 컥,”
리카르도 왕제가 목을 조를 것처럼 힘을 주는 바람에 숨이 막혔다.
“잘 들어, 꽃 같은 예언자님. 지금 여기서 결정하는 거야. 죽을지, 살지. 살고 싶으면 신전으로 얌전히 돌아가. 그리고 입을 다물어. 평생. 나는 예언대로 형님의 목을 치고 왕이 될 테니. 그때 내가 그 귀신 소굴에서 꺼내 주지. 이 반반한 얼굴이 제값을 하면 내가 널 후궁 정도는 삼아 주지 않겠어?”
숨이 막혀 흐려지는 시야 한쪽에 플로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소용없는 일이에요, 전하. 라실리아 님은 고지식한 분이라 그럴 만한 융통성이 없거든요.”
리카르도 왕제는 플로타의 말을 무시했다.
“아니면 너는 여기서 죽어. 자, 어떻게 하겠어?”
“……나는,”
라실리아가 필사적으로 생각을 이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왕에게 왕제의 반역을 알려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일단 거짓말이라도 해야 해. 협조하는 척하면서 기회를 봐서 어떻게든…….’
안타깝게도 그 외에는 여기서 목숨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플로타는 자신을 배반했고 신전의 마부가 내내 조용한 걸 보면 왕제가 데려온 기사들이 죽였거나, 아니면 플로타와 한 패일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아.”
라실리아가 힘겹게 내뱉는 말을 리카르도 왕제가 듣더니 웃었다.
“너도 평생 처녀로 늙어 죽을 팔자는 싫은 모양이군. 좋아, 그럼……,”
그때였다.
“거짓말이에요.”
플로타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옆구리가 뜨끔해졌다.
“무슨 짓이야!”
리카르도 왕제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플로타가 자신을 칼로 찔렀다는 것을 알았다.
“……큭!”
불에 타는 고통이 느껴졌다.
마침 꿈에서 칼에 찔린 여자를 보아서일까. 현실과 꿈의 경계가 뒤섞일 것만 같았다.
“속지 마세요, 전하. 라실리아 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제가 가장 잘 알아요. 절대 전하에게 협조하는 일은 없을 거랍니다. 애초에 계획한 대로 죽이는 게 안전해요.”
퍽!
또 한 번 칼에 찔린 자리에 엄청난 통증이 전해졌다.
플로타가 깊이 박힌 칼을 다시 한번 비틀었다. 확실히 숨을 끊어 놓겠다는 의지였다.
“플로, 타…… 네, 네가…….”
라실리아가 비틀대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플로타는 냉정한 눈으로 라실리아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미 그 눈에 자신은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겠군. 이건 이제 살릴 수도 없어.”
리카르도 왕제가 비틀대다 옆으로 쓰러진 라실리아의 몸에서 칼을 뽑아냈다.
퍼억!
피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내려.”
리카르도 왕제가 플로타의 팔꿈치를 잡아 마차 문을 향해 밀었다.
플로타는 그를 따라 내리면서 힐끗, 피 흘리는 라실리아를 돌아보았다.
“안녕히, 라실리아 님. 다시는 보지 말아요, 우리.”
“플로…… 타…….”
탁.
왕제마저 내리고 나자 마차 문이 닫혔다.
탕탕!
왕제가 마차를 두드리며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걸 끌고 가서 절벽에서 떨어트려. 마부의 시체도 같이. 혹시라도 발견이 되면 사고처럼 보이게.”
“예, 전하.”
아, 안 돼…….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서 도망쳐야…… 왕에게 반역을 알려서…….
라실리아가 남은 힘을 쥐어짰다. 하지만 그 힘으로는 손가락을 꿈틀대는 게 전부였다.
두두두두…… 퍼억!
잠시 후, 라실리아와 마부의 시체를 실은 마차가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 * *
-드디어 오셨다.
-응응. 오셨어. 오셨어.
-그럼 이제 ……하는 거지?
주위가 소란했다.
귀를 채우는 소음에 눈꺼풀이 먼저 반응했다. 라실리아는 가물대는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환한 빛이었다.
“……?”
너무 환했다. 라실리아의 방은 단 한 번도 이렇게 환해 본 적이 없었다.
꿈을 꾸는 건가.
……아니, 나는 죽었지. 죽어서 신의 나라에 온 모양이야.
라실리아는 눈을 뜨고서도 현실감이 없는 주위 풍경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창가를 향했다. 멋들어진 조각에 금박을 씌운 화려한 창틀에는 처음 보는 새들이 나란히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까아악.
삐우웃 삐우웃. 짹짹.
“……? 지금 내게 말을 했니?”
이상했다. 분명히 새들이 종알대고 있었는데 제 귀에는 꼭 사람의 말소리처럼 들려왔다.
“누가 왔다는 건데?”
그때였다.
“황후 폐하. 기침하셨나이까.”
“……?”
라실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황후라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