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사회자의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귀빈 여러분! 잠시 후 진성 그룹 출범식을 거행할 예정이오니 다들 착석해 주십시오.”
사회자 말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
“지금부터 진성 그룹 출범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식순에 의해 출범식이 시작되었다.
간단하게 진행하면 좋을 텐데 뭐 이리 순서가 많은지 한동안 뒤에 앉아서 지켜보았다.
“다음 순서로는 진성 그룹의 주인이자 고문이신 진민재 고문님의 인사 말씀을 듣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 앞으로 나갔다.
미국에서 수소 자동차 개발 발표를 할 때 앞에 나선 적이 있지만, 적응이 안 되었다. 간단하게 말하고 끝내자.
“귀빈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진성 그룹의 진민재 고문입니다. 먼저 새로운 진성 그룹 출범식에 참석해 주신 귀빈 여러분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진성 그룹은 저의 할아버지인 진규촌 회장님이 우리 역사의 비극적인 625전쟁이 끝난 직후 파괴된 국토를 재건하기 위해 시작한 진성 건설이 모태가 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한국을 뒤덮은 IMF의 파도를 버티지 못해 침몰하던 중 너무나 안타까워 제가 진성 그룹 계열사를 전부 인수하여 새로운 진성 그룹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성 그룹이 새롭게 시작하는 만큼 기존 진성 그룹보다 더욱 성장하는 진성 그룹이 될수록 귀빈 여러분께서 응원해 주시고 지켜보셨으면 합니다. 또한, 저는 뒤에서 홍창호 부회장을 중심으로 하는 진성 그룹이 세계적인 그룹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진성 그룹이 어디까지 성장해 나갈지 다들 지켜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연설을 끝내고 인사를 하자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다시 인사를 하고 뒤에 자리로 가서 앉았다.
“다음 순서로는…….”
갑자기 입구 족에 소란스러워지자 사회자가 말을 멈추고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이거 다 무효야! 당장 중단해.”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내가 어딜 가? 진성은 내 거란 말이야. 너희들 그동안 다 내가 주는 월급 받았잖아. 감히 주인을 몰라봐?”
“야! 이 새끼들아! 안 비켜. 감히 누굴 앞을 가로막는 거야?”
강당 안에 들어오려는 작은 엄마와 진석구 형을 보안요원이 막고 있었다.
인수 협상할 때도 작은 엄마가 회의실에 난입하여 방해하며 난리를 쳤다고 들었다.
매각 협상을 막으려는 작은 엄마의 마음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매각이 끝났으면 현실에 순응하면 좋을 텐데.
작은 엄마의 밑바닥까지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였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작은 엄마를 바라보던 보안 팀장이 시뻘게진 얼굴을 한 채 보안요원에게 큰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들어서 밖으로 내보내.”
지시가 떨어지자 보안요원 여러 명이 작은 엄마와 진석구 형의 팔다리를 잡고 밖으로 나갔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자 다시 조용해졌다.
“죄송합니다. 잠시 소란이 있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죄송합니다. 바로 이어서 행사를 진행하겠습니다. 다음 순서로는…….”
홍창호 부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손님들 불러놓고 이런 망신이 없습니다. 보안요원들은 뭐하느라 불청객이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했는지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내가 듣기로는 로비에서 작은 엄마의 출입을 금지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들어왔을까?
앞으로 몇 년 후부터는 로비에 보안 시스템을 설치해 카드가 없으면 들어올 수 없는데 지금은 보안 시스템을 설치한 회사들이 거의 없었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먼저 보안 시스템을 도입할까?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진성 그룹이 다시 태어나는 만큼 여러 귀빈들의 힘찬 성원을 부탁드리며 이것으로 진성 그룹 출범 행사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이후로는 불상사 없이 행사가 무사히 끝이 났다.
홍 부회장이 주먹을 꽉 쥐었다.
“고문님! 이제부터 진성 그룹이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아기가 아장아장 걷듯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속도가 미비하고 느릴 수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는다면 그 걸음걸음은 큰 뜀 걸음이 될 것입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각오가 대단한 것 같았다.
“믿음직스럽네요. 잘하실 거라 믿고 옆에서 응원하며 진성 그룹이 어디까지 성장해 나가는지 지켜볼게요.”
행사가 끝나 사무실로 가려는데 내 앞을 가로막는 남자가 있었다. 청와대 경제 수석 황석민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아까 못 봤는데 언제 오신 거예요?”
“행사 시작 전부터 왔습니다.”
“오셨으며 오셨다고 하시죠.”
“부담 주는 것 같아 일부러 그랬습니다. 지금은 출범식이 끝이 났으니 인사나 하고 가려는 겁니다.”
“바쁘신데도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청와대 경제 수석으로 응당 와야 하는 자리입니다. 참! 상용 자동차 인수 협상은 잘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조만간에 인수 계약을 할 것 같아요.”
“잘됐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감사합니다.”
청와대 경제 수석이 가자 황 부회장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고문님! 청와대 경제 수석도 아시는 겁니까?”
“네.”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진성 그룹 장래가 매우 밝습니다.”
“가시죠.”
“네.”
다시 가려던 사무실로 가려는데 또 나를 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디 가?”
장서필 회장이었다.
“사무실에요.”
“손님들 불러놓고 주인이 가면 어떡해? 이리 와서 담소나 나누자고.”
내가 부른 건 아닌데. 장 회장이 스스로 왔으면서.
“네.”
* * *
진성 그룹이 새로 출범한 지 며칠이 지났다.
홍창호 부회장을 중심으로 각 계열사 사장들의 각오가 남달라 다들 열심인 것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나 대신 열심히 일해 줘야지.
오늘은 작은아버지가 있는 성동 구치소에 왔다.
요즘 한창 재판이 진행 중이라 마음이 복잡하여 오지 않을까? 했지만 진성 그룹이 새로 출범했다는 소식을 내 입으로 전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도 몰랐는데 구치소는 가족이든 누구든 간에 면회가 하루에 한 번 밖에 안 되어 내가 면회 신청을 하면 뒤에 가족이 와도 면회를 할 수 없다고 한다.
혹시 나로 인해 피해를 볼까 봐 직원에게 사정하여 면회 신청 기록을 보니 한동안 가족들은 전혀 면회 오지 않고 변호사의 면회 기록만 있었다.
인생무상 권력 무상의 실상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였다.
면회소에 앉아 15분 정도 기다리자 작은아버지가 초췌한 몰골로 들어왔다. 고생이 많나 보네.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대꾸도 없이 앉고서는 입을 열었다.
“네가 올 줄 몰랐네.”
“조카가 작은아버지 면회 온 거죠.”
“조카가 자식들보다 더 낫네. 진성 그룹 새로 출범했다는 소식 들었다. 축하해.”
“고맙습니다.”
“너라면 잘하겠지만 부디 나처럼 실패하지는 마라.”
“작은아버지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심히 할게요.”
작은아버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재판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죗값을 받는다는 생각이야. 피할 생각도 없어. 제대로 벌을 받아야만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래야 나도 새마음으로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저번 면회에서도 느꼈지만 내가 알던 작은아버지가 맞나 싶었다. 개과천선한 모습이었다.
“저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이라면 언제든지 다시 재기에 성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힘내세요.”
“고맙구나.”
갑지가 뭔가 말을 하고 싶으면서 망설이고 있었다.
“뭐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염치없는 부탁 하나 하자.”
“말씀하세요.”
“서영이가 내가 구속된 것을 알았어. 얼마 전에 집에 전화했나 봐.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으니 서영이가 안 것은 어쩔 수 없는데 문제가 하나 있어.”
말을 하다 멈추고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서영이가 미국에서 만나는 남자가 있나 봐. 서로 나이도 있는 만큼 결혼하려고 집에 연락했었는 내 소식을 듣고서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거야. 나 때문에 딸의 혼사를 망치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 민재 네가 서영이를 설득해 결혼하도록 해 줘. 둘 다 미국에 있으니까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도와줘. 한국에서 해 봤자 난 참석도 못 하고 집안이 이 모양 이 꼴이니 아예 미국에서 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그리고 사돈댁에서 우리 사정을 알면 서영이를 박대하거나 거절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라도 망한 집 안 사람을 식구로 받아들이기 힘들 테니까. 민재 너라면 사돈 댁에서도 함부로 할 수는 없을 거야. 네가 내 역할을 대신해 줘. 너라도 있어 내가 든든해.”
배상도, 강성중에 이어 서영이도 결혼하는구나. 뭐 올해 결혼하는 해야? 다들 결혼하게. 남들은 다 짝을 찾는데 나만 뭐 하는 거냐?
그나저나 할아버지 장례식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아 평생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작은아버지도 자식 걱정에는 눈물을 흘리는구나.
아니지. 자식이 아니라 서영이라서 그런 거지.
“알았어요. 서영이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전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미국에서 결혼시키도록 할게요.”
“고맙구나. 너도 바쁠 텐데 그만 가 봐.”
“네. 몸조심하고 건강하세요.”
면회를 마치고 구치소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 * *
집 소파에 앉아 맥주 캔을 마시고 있었다.
그새 다른 남자를 만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서영이가 결혼하려는 남자가 내가 알아봤던 박서진이겠지?
일단 둘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고 서영이한테 전화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핸드폰을 들었다.
유창한 영어가 들려왔다.
(탐정 제임스 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녕하세요? 저 진민재라고 합니다. 지난번에 한번 일을 의뢰했었는데 기억하시나요?”
(아! 안녕하십니까? 유명한 진민재 님을 왜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때는 유명하신 분인 줄 몰랐습니다.)
“유명하기는요? 다름이 아니오라 지난번에 의뢰했던 진서영과 박서진 두 사람에 대해 다시 의뢰하려고요. 그 두 사람 요즘 어떤지 자세히 알아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근데 급한 일입니까?)
“아주 급한 건 아니지만 될 수 있으면 빨리 알아봐 주셨으면 해서요.”
(알겠습니다. 누구 의뢰인데 최대한 빨리 조사해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두 사람이 어떤지 알고 그다음에 어떻게 할지 결정하면 되겠지.
* * *
오늘은 인수한 대유 자동차 군산 공장 가동 준비가 끝났다고 하여 잠깐 들려 공장 구경도 하고 준비 상황도 점검해볼 생각이었다.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일어서는데 오션폰 백종식 사장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고문님!”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가 밝고 우렁찼다.
“안녕하세요?”
“어디 나가시던 중이었습니까?”
“네. 군산에 있는 자동차 공장을 가보려고요. 왜 할 말 있으세요?”
“있기는 한데 당장 급한 거는 아닙니다. 내일 오겠습니다.”
딱 보니 사흘 전에 출시한 오션 패드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 같았다. 나도 반응이 어떤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잠깐은 시간 있어요. 앉으세요.”
“알겠습니다.”
소파에 앉았다.
“오션 패드 출시한 지 3일이 되었는데 반응은 어떤가요?”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대답이 나왔다.
“출시한 지 3일밖에 안 되어 판단하기에는 이르겠지만 대박은 아니어도 중박은 됩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고객들의 반응을 보면 신선하다, 새롭다,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등 긍정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