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느지막하게 커피숍에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오전인데도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이제 커피숍도 자리를 잡은 건가?
성중이 말로는 우리 커피숍이 분당에서 이름 있는 커피숍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특히 젊은 층이 자주 찾는다고 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볼 게이트와 손정우 회장, 거기다 나까지. 한마디로 분당에서 가 봐야 할 명소로 등극했다는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기운 없이 축 처져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씩씩하게 인사하는 강성중을 보니 어제 내가 꿈속에서 강성중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런 게 강성중의 장점일 수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옆에 있던 김나영도 나에게 인사하였다.
나영이는 원래 오후 알바이지만 요즘 손님들이 많이 와 오전부터 일하고 있었다.
나영이가 임신해서 앞으로 오래 일하지 못할 것 같은데 이왕 뽑는 알바, 여러 명을 뽑아야겠다.
“안녕! 성중아 커피 한 잔 줘.”
“네. 알겠습니다. 앉아 계십시오.”
내 전용석으로 걸어가는데 손님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로 향하였다. 또 한바탕 팬 미팅을 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신상철은 여전하였다. 무엇을 바랄까? 신경 끄고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 버튼을 눌렀다.
부팅을 기다리는데 김나영이 커피를 가져왔다.
“사장님! 커피요.”
건네는 커피를 받았다.
“고마워.”
뒤를 돌아 주문대로 돌아가려는 김나영을 불렀다.
“나영아!”
“네. 사장님!”
“축하해.”
“네? 뭘 축하한다는 말씀이세요?”
“성중이에게 들었어.”
순간 김나영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뒤를 돌아 강성중을 째려보았다.
내가 실수했나?
“나영아! 잠시 이야기할래?”
“네.”
“앉아.”
의자 하나를 가져와 내 앞에 앉은 나영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보지 마세요. 창피해요.”
“뭐가 창피해? 배 속에 있는 아기가 들으면 서운하겠다.”
고개만 푹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모르겠어요.”
“내가 지금까지 두 사람을 지켜봤는데 둘이 정말 잘 어울려. 이왕 이렇게 된 거 결혼해.”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은 모르겠어요. 생각이 정리가 안 돼요.”
“그럴 때는 성중이하고 속을 터 넣고 이야기를 해. 아직 진지하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라며? 언제까지 시간 끌 거야?”
“저도 시간 끌 생각은 없어요. 조만간에 성중 오빠하고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서로 진지하게 이야기하겠다는데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축하하고 조카가 생겨 나도 무척 기뻐. 빨리 조카를 보고 싶네.”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됐어. 그만 가 봐.”
“네.”
나영이가 주문대로 가자 강성중이 나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나영이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배부르기 전에 웨딩드레스 입어야 할 텐데.
순간 아기가 태어나 엄마 아빠한테 ‘나 월드컵 베이비야?’ 물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성중 능력도 좋아.
강성중이 나영이한테 대답을 듣지 못하자 나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나영이하고 무슨 이야기 했습니까?”
“별이야기는 하지 않고 축하한다고 했어. 그리고 알바생 오전 오후 두 명씩 더 뽑아. 당장 구인 광고 붙이고.”
“두 명씩 말입니까?”
“그래. 예전의 커피숍이 아니고 나영이도 배가 부르면 오래 일하지 못할 거야.”
“알겠습니다. 근데 사장님이 안 계셔서 면접은 어떻게 봅니까?”
“네가 봐야지. 네가 보고 알아서 채용해.”
“알겠습니다.”
“나영이 배부르기 전에 결혼해.”
민망한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가을쯤에 하려고 합니다. 근데 상도 형도 가을쯤에 결혼할 것 같습니다.”
“뭐? 배 대리가 결혼한다고?”
“네. 지난 3월에 집에서 주선한 선을 봤는데 서로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상도 형님 나이도 있어서 결혼을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이제 하나둘 결혼을 하네. 나도 해야 하는데.
* * *
소파 사무실에 앉아 진성 리조트 홍창호 사장, 아니 진성 그룹 부회장인 홍창호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며칠 전에 진성 계열사 사장단들과 회의를 하였다.
그때 전부 나에게 진성 그룹 회장에 취임하라고 간청했으나 내가 끝끝내 거절하고 대신 내 제안대로 회장은 공석으로 하고 부회장 체제로 진성 그룹이 출범하기로 결정하였다.
난 고문 직책을 맡기로 하였다. 회장에 취임하면 일에 치여 지낼 텐데 난 절대 사양이었다.
부회장은 외부에서 능력 있는 자로 데려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내가 그럴 필요가 뭐가 있냐며 내부에서 임명하자고 하여 진성 리조트 홍창호 사장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황창호는 능력도 있고 리더십도 있어 부회장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던 홍 부회장이 찻잔을 내려놓고서는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감개가 무량합니다.”
앞으로 한 시간 후에 사옥 강당에서 진성 그룹 출범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도련님이 계셔서 진성에 행운입니다. 만약 도련님마저 안 계셨다면 진성 그룹은 쪼개져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겁니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이전 생에서는 그렇게 되었는데. 이제 내가 진성을 다시 찾고 주인이 되었다.
“쉽게 무너질 진성이 아니죠.”
“그렇습니다. 저력 하나만은 어느 그룹에도 밀리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어깨가 무겁겠어요.”
“책임감보다 도련님이 회장직에 취임하셔야 하는데 죄송할 뿐입니다.”
손을 내어 저었다.
“아니에요. 홍 부회장님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막중한 임무를 맡은 만큼 더욱 열심히 하여 진성을 재계 10위 안으로 이끌어야죠.”
“열심히 하여 꼭 재계 10위 안에 들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요즘 곰곰이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자동차 부속 기업을 인수하려고 합니다.”
난 그 생각을 전혀 못 했는데 생각 잘했다.
자동차 부품 회사를 인수하게 되면 오션 대유 자동차에 안정적으로 납품할 수 있으니까.
“적당한 회사가 있나요? 이왕이면 기술력이 있는 회사로 인수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네. 있습니다.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판로를 제대로 뚫지 못해 어려움에 처한 기업이 있습니다.”
“기술력이 있는데 왜 어렵게 되었나요?”
“대한민국은 기술력만 있다고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특히 작은 기업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기술력이 있다 해도 납품할 활로를 뚫지 못하면 도태되는 겁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지연, 혈연 등 사적인 관계가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지연, 혈연 등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한국이 유독 심하기는 하였다.
“그렇기는 하죠. 인수하시고 기술 개발에 집중투자하여 기술 향상에 힘쓰세요, 그러면 전 세계 오션 자동차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희수가 들어왔다.
정정을 입은 희수를 보니 이제 비서티가 제법 났다.
“고문님! 출범식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알았어.”
“가시죠.”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출범식이 열리는 강당으로 향하였다.
* * *
난 조촐하게 진행하려고 했는데 강당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과는 반대로 임직원, 기자 등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놀랐다.
“사람들이 많네요.”
“도련님 말씀처럼 조촐하게 진행해도 좋지만, 진성 그룹이 새로 출범하는 만큼 널리 알리는 것이 더 좋을 겁니다. 보니까 재계 인물들도 많이 참석한 것 같습니다.”
그러네. 현도 자동차 장서필 회장도 저쪽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재계 쪽 인물들도 초대한 건가요?”
“따로 초대한 것은 아니고 새로 진성 그룹 출범식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참석 신청을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참석 신청이 들어와 저도 놀랐습니다. 아마도 도련님이 오션의 창업주 위상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옛말에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정승이 죽어도 문상객들이 많겠지만 세태를 풍자하는 것 같아 씁쓸하였다.
난 죽어도 내 죽음을 슬퍼하고 아쉬워하는 조문객들이 많이 오도록 하는 인물이 되어야지.
“그렇네요.”
그때 내 앞으로 남자 두 명이 다가왔다.
한 명은 비서로 보이고 한 명은 만난 적이 없지만, 뉴스에서 자주 보던 인물이었다. 사성 이민희 회장이었다.
사성 이민희 회장이 직접 참석할 정도로 내가 한국에서 위상이 이렇게 높아졌나?
홍창호 부회장이 이민희 회장을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진성 부회장 홍창호입니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축하드립니다. 기쁜 행사가 있다고 하여 참석했습니다.”
대답하고서는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안녕하세요? 진민재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제가 누군지 아세요?”
“물론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이 회장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내 말에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었다.
“전 대한민국이지만 진 고문은 전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유명한 분을 만나서 기쁘네요.”
되로 주고 말로 받네.
“저도 재계의 거물인 이 회장님을 만나 뵈어 기쁩니다.”
“우리 앞으로 자주 봐요.”
비서가 재빨리 명함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내 핸드폰 번호와 직통 전화 번호가 있으니까 언제든지 연락해요.”
“네. 알겠습니다.”
“자네 왔어?”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장서필 회장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도 오셨네요?”
“그럼! 이런 자리에 내가 참석하지 않으면 누가 참석해?”
“감사합니다.”
시선을 이 회장에게 돌리는 장서필이었다.
“이 회장님도 오셨네요.”
“네. 그렇습니다, 장 회장님은 진 고문을 잘 아시나 봅니다.”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제가 진 고문하고는 아주 막역한 사이입니다. 이 회장님도 진 고문을 잘 아시는 겁니까?”
장 회장 말에 이 회장이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펴졌다.
지금 두 회장이 나를 놓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거야? 내가 그 정도였나?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왔다.
“아닙니다, 오늘 처음 봤습니다.”
“그렇군요. 진 고문이 젊은 친구지만 앞으로 장래가 유망하고 아주 괜찮은 친구입니다. 서로 친하게 지내면 이 회장님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오늘 만나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앞으로 친하게 지내야겠습니다.”
말을 하고서는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집사람이 자네 한번 보고 싶다고 하네. 조만간에 집으로 식사 초대할 테니까 와.”
장 회장도 보면 은근히 귀엽네. 이런 식으로 나와의 친분을 자랑하고. 한번 장단 맞춰줄까?
“저도 사모님이 보고 싶네요. 초대해 주시면 갈게요.”
“꼭 초대해야지만 오나? 언제든지 와.”
“네. 그럴게요.”
이제 유치한 놀이는 그만하고 자리를 피해야겠다.
“두 회장님! 저는 출범식 때문에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간단한 다과회도 준비했으니 행사 끝나고 다과를 즐기시며 담화도 나누시며 좋은 시간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 어서 가 봐.”
“다음에 또 보죠.”
인사를 하고 가는데 여러 명의 사람들이 또 다가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무대 뒤편에 준비한 의자에 홍 부회장과 나란히 앉았다.
“고문님! 현도 자동차 장서필 회장과 친한 겁니까?”
“네. 고 장주용 회장과 친분이 있다 보니 자연히 장서필 회장과도 친분이 생겼어요.”
“그렇군요. 방금 보니 고문님이 대한민국 경제계에 떠오르는 다크호스가 되신 것 같아 보는 제가 다 기뻤습니다. 진성 그룹 앞날이 밝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