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장 팀장이 들고 온 가방에서 자료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급하게 조사한 거라 내용이 충실하지는 않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네.”
서류를 들어 보았다.
내용이 충실하지 않다고 하더니 진국이었다.
천천히 다 읽어 보니 진성 화장품과 진성 유통 둘 다 생각보다 더 심각하였다.
“이 자료 어떻게 구했어요? 구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자세히 말씀은 못 드리지만, 이 일을 하려면 다 소스가 있습니다.”
하긴 어떤 분야나 한 곳에서 일을 쭉 하려면 이 정도 정보력은 있어야겠지. 그래야 살아남을 테니까.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네요.”
“네. 저도 자료를 조사하면서 이 정도일 줄 몰라 무척 놀랐습니다. 이 정도 상황이라면 가만 놔두어도 조만간에 스스로 무너질 겁니다.”
“그렇겠죠. 근데 이 정도 상황이면 채권 은행이나 채권자들이 아무 액션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 신기하네요. 무슨 액션이라도 취할 것 같은데요.”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진성 측에서 감추고 있을 겁니다. 저도 어렵게 자료를 입수한 것이고 조만간에 문제가 터지면 채권자들이 상황을 알게 될 겁니다.”
“인수를 빨리하려면 채권자들이 이 상황을 빨리 아는 게 더 좋겠죠?”
“그렇기는 합니다만 채권자들에게 알려 주자는 말씀입니까?”
“시간 끌면 뭐해요? 어차피 조만간에 무너질 거 우리가 트리거를 당기자는 거죠.”
“좋은 생각이기는 합니다. 원하시면 제가 진행하겠습니다.”
“그러면 좋죠. 어떤 식으로 진행하실 건가요?”
“이럴 때는 솔직히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채권자들에게 현재 진성 그룹 상황을 알리고 인수 의사를 타진하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채권자들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매각을 추진하면서 진성을 압박할 겁니다.”
좋은 방법 같다.
“좋아요. 그렇게 진행하죠. 내부에서 도와줄 자가 있거든요.”
“그럼 아무 문제가 없겠습니다. 외부와 내부에서 압박하면 진성 그룹은 남은 계열사를 전부 매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결국은 진성 그룹은 대한민국에서 사라지게 될 겁니다.”
일시적으로는 사라지겠지만 내가 다시 화려하게 컴백시킬 것이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제국으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겠죠. 진성은 다시 시작할 거예요.”
“그렇기는 합니다. 화려한 부활이겠습니다.”
“근데 이엠스 자료는 없네요.”
“이엠스는 작은 중소기업이라 자료가 없습니다.”
“하긴 작은 중소기업 자료까지 구하기는 힘들겠죠. 바로 실사를 통해 확인하면 될 거예요.”
“이엠스는 바로 인수 들어가는 겁니까?”
“네. 매각하기로 결정했어요. 장 팀장님이 일정 잡고 진행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엠스는 다음 주부터 진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래요.”
장기호 팀장이 나가자 이번에는 염중섭 대표가 들어왔다.
“고문님 식사하셨습니까?”
“네. 대표님은요?”
“저는 아직입니다. 지금 대유 자동차 채권단하고 이야기하고 오는 중입니다.”
“어제 갔다 오지 않았나요?”
“네. 맞습니다. 어제도 만나서 협상을 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시간을 질질 끌며 인수가를 더 낮추고 싶은데 고문님도 빨리 인수하기를 원하시고 우리 또한 시간을 끌 수가 없어 인수 협상을 빨리 진행하려고 합니다.”
“잘 진행되고 있나요?”
“네.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인수가 빨라질 것 같습니다.”
“그래요? 대우 자동차는 덩치가 커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나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앞서 GN이 협상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대부분 협상을 끝냈고 대유 자동차 실사도 거의 마무리한 상태입니다.
물론 GN을 믿을 수만은 없지만 GN 자료를 참고하기에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GN도 먹튀를 잘하는 회사 중의 하나이다.
그만큼 자기들의 이익을 최대한 가져가려고 자세히 조사했고 협상도 유리하게 했을 거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떡고물을 받아먹으려고 한 족속들도 GN 요구에 그대로 따랐을 거다.
“우리가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에요. GN 자료를 참고해서 진행해요. GN 자체를 믿을 수는 없지만 GN은 이런 인수 하는 일에는 철저하기에 자료를 믿을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다른 것은 없나요?”
“네. 없습니다. 채권단이 아쉬우니 웬만한 것은 우리 요구대로 따라 주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요. 마지막까지 잘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신경 쓰고 나서야 하는데 염 대표님에게만 맡겨 놓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하는 것이고 저는 이 일이 즐겁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고마워요.”
“저는 고문님이 사무실에 나오니 정말 좋습니다. 커피숍에 사람들 방문이 뜸해지면 다시 커피숍에 나가실 겁니까?”
“나가기는 하겠지만 예전처럼 계속 있지는 못할 거예요.”
“그렇기는 할 겁니다.”
“그렇죠. 뭐. 다음 협상은 언제인가요?”
“오늘 GN 자료를 받아와서 검토해야 하기에 다음 주에 할 겁니다.”
“고생 많네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가만 보면 염 대표도 일하는 것을 즐거워하니 에릭처럼 일 중독인 것 같았다. 나보고 그렇게 하라면 못한다.
* * *
진성 그룹 황도형 비서실장은 채권단 대표에게 온 공문을 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2개월 후에 돌아오는 대출 만기를 연장하지 않을 것이며 부채 상환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부채 상환 불이행 시 진성 화장품과 진성 유통을 강제 청산할 수 있으니 그전에라도 매각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하였다.
채권단에서 자기들이 손해를 보는데 강제 청산할 리가 절대 없다. 그 말은 알아서 매각하라는 압박이었다.
남은 두 개의 계열사를 매각하면 진성 그룹은 이름만 남게 된다.
비록 회장님이 구속됐지만, 채권 은행에서도 임시회장으로 선출된 사모님을 필두로 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잘 알 텐데 갑자기 왜 그러지?
채권 은행뿐만 아니라 다른 채권자들도 함께 움직이는 것이 분명 모종의 이유가 있었다.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전화기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과 친분이 있는 은행권 인사와 통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다행히도 이유를 설명해 주어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오션의 진민재 도련님이 이 일의 배후였다.
기존에 매각하였던 진성 계열사를 전부 인수한 것을 자신도 잘 안다.
솔직히 진성 그룹은 자신이 생각해도 가망이 없기에 진성을 위해서라면 개인적으로 진성 그룹을 도련님이 인수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자신은 진성 그룹 회장 비서실장이기에 자신의 일을 해야만 한다.
회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모님이 사람을 불러 네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회장님은 구속 상태이고 그룹은 위기인데 한가하게 손톱 정리를 하고 있다니 진성의 미래가 암울하였다.
“무슨 일이야?”
네일 아티스트를 바라보며 눈치를 주었다.
“긴급히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급한 일이야?”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알았어.”
전미정이 네일 아티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만하고 나가.”
“네.”
네일 아티스트가 나가자 이제 보고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오전에 채권 은행에서 연락이 왔는데 더 이상 대출 연장을 하지 않겠다고 통보했습니다.”
“만기가 언제인데?”
“6월 30일입니다.”
“그럼 다른 은행에서 대출받으면 되지 않아? 뭐가 문제야?”
“회장님이 구속되는 등 그룹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은행들도 잘 알기에 현실적으로 힘듭니다. 현재 대출도 아주 힘들게 겨우 받았던 겁니다. 그렇기에 대출 연장을 해 주지 않으면 그룹의 큰 위기입니다.”
큰소리를 질렀다.
“말로 힘들다고 하지 말고 발로 뛰어다녀야지. 회사의 인원이 몇 명인데 그깟 대출 하나 못 받는다는 게 말이 돼? 다들 나가서 대출을 받으라고 해.”
사모님은 지금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출을 상환하지 못하면 진성 그룹이 청산될 수도 있습니다.”
버럭 화를 내었다.
“누구 마음대로? 자기들이 뭔데 남의 회사 가지고 청산 운운해? 당신들이 일을 똑바로 하면 그런 소리를 듣겠어? 이럴 시간에 나가서 대출을 받던지 다른 해결 방법을 강구하란 말이야.”
비서실장은 말을 해도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예로부터 수 많은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겪듯이 지금 사모님을 보니 망하는 국가는 지금과 같은 상황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나가 보겠습니다.”
회장실을 나와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아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비서실장이 일어났다.
* * *
비서실장은 성동 구치소 면회실에서 진동훈 회장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얼굴이 까칠하고 수염 덥수룩한 회장님을 보니 왠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견디실 만하십니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가 봐.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는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야.”
“회장님을 이런 곳에 두고 저만 편하게 지내는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자네 마음 다 알아. 여기 있다 보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나의 지난날들을 가만히 되돌아보니 내가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못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 반성도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마음 쓰지 않아도 돼.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급하게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왔으니 말해 봐.”
“뭐냐면…….”
배후에 오션이 있다는 것까지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런 상황입니다. 회장님이라도 계셨으면…….”
말끝을 흐리는 비서실장을 바라보던 진동훈 회장이 입을 열었다.
“임시회장에게는 보고했어?”
“네. 오션 부분만 빼고는 보고는 했습니다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민재가 뒤에 있다는 게 확실한 거야?”
“네. 그렇습니다. 기존 진성 계열사도 전부 인수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남은 두 개 계열사도 마저 인수하려고 채권단을 자극한 겁니다. 그전에는 숨기고 몰래 인수했지만, 지금은 대놓고 인수하려는 겁니다. 오션에서 민감한 진성 자료를 채권단에게 주면서 인수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고 합니다.”
“민재가 민감한 자료는 어떻게 구했을까? 안에서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말인가?”
“꼭 내부가 아니어도 자료를 구할 수는 있지만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아예 작정하고 달려드는데 그 정도는 미리 준비했을 겁니다.”
가만히 눈을 감는 진동훈 회장이었다.
한동안 그대로 있던 진동훈 회장이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부탁이라뇨? 지시하시면 됩니다.”
“이건 지시가 아니라 부탁이야. 민재에게 연락해 나에게 한번 찾아오라고 전해줘.”
“만나서 뭐하시려고 합니까?”
“내가 이곳에서 생각을 많이 했다고 했잖아. 지난날들을 하나씩 되돌아보니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전부 보이더라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하는지 알았어.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
비서실장은 진동훈 회장의 얼굴에서 이전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하였던 진한 후회를 보았다.
마치 세상만사 모든 것을 초연한 사람처럼 보였다.
“부탁 들어드리겠습니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