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고개를 돌려 전미정 감사를 바라보니 전 감사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박성진 상무가 임시 회장직을 맡게 될 공산이 컸다.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박성진 상무도 능력이 출중하여 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평상시가 아닌 위기 상황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구속된 진동훈 회장님과 소통이 원만하게 잘 이루어져서 긴밀하게 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비록 회장님이 구속되었지만, 진성의 주인은 여전히 회장님이시기에 회장님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회장님 이름 아래 똘똘 뭉쳐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전 그 역할에 전미정 감사가 제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님들 잘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또 다른 분 추천하실 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능력이 부족한 회장이지만 진성에서는 아직도 회장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회장을 배제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죄를 짓는 것과 같았다.
그렇기에 일부러 회장님을 거론하면 전미정 감사를 추천한 거였다.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니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전미정 감사는 임시 회장직을 맡은 위인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밀어주는 것이 전미정 감사이기에 자신도 전미정 감사를 밀어 신임을 얻는 것이 중요하였다.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는 또 하나의 줄이 있다.
전미정 감사가 임시 회장직을 맡아 잘하면 다행이고 못 해서 진성이 망하더라도 자신은 상관이 전혀 없었다.
지금은 양쪽에 줄을 대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전미정 감사가 자신을 보는 눈이 한결 더 부드러웠다.
“더 이상 추천하실 분이 없는 것 같으니 전미정 감사와 박성진 상무 두 분을 놓고 투표로 임시회장을 선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거수투표로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전미정 감사를 선택하시겠다는 분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운 전무의 말이 끝나자 이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자 자신이 먼저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과 친한 이지호 이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지호 이사가 손을 들자 눈치를 보던 이사들이 하나둘 손을 들었다.
됐다. 윤학훈 전무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 * *
출근해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에릭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오전에 GN 사장을 만났습니다.)
“그래요? 뭐라고 하나요?”
(눈치를 보는지 오늘 만남에서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의례적인 사업 이야기만 나누다가 헤어졌습니다.)
멀리서 와서 인사만 하고 그냥 헤어졌다고? 시간을 가지고 관계를 맺겠다는 의도인가?
“아쉬우면 또 연락이 오겠죠.”
(그럴 겁니다. 그래도 자동차 사업에 관해 여러 가지 조언을 들어 저한테는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잘됐네요. 그렇게 자동차 회사 인사들과 친분을 쌓으면 좋은 거죠.”
(그렇습니다. 요즘 자동차 회사 사람들과 만나느라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정작 오션 일에는 소홀해집니다.)
“둘 다 얻을 수는 없죠.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놓치는 법이죠. 이것도 잠깐일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 도요도 자동차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시하라 사토미 회장이 다음 달에 미국 도요도 자동차 지사 방문 일정이 있는데 그때 만날 수 있겠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나를 만나자고 했다가 미국으로 가라고 하니 진짜 미국에 가네. 도요도도 급한가 보다.
“지사 방문 일정은 핑계예요. 사실은…….”
상황 설명을 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일본인들은 정말 속을 모르겠습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되지 왜 속을 숨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요. 그게 일본인들 특징인가 봐요. 그냥 만나자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데요.”
(만납니까?)
“에릭이 알아서 하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 자동차 회사 사람들을 만났는데 하나같이 원하는 조건들이 같았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입장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우리가 논의하고 최종적으로 판단해야겠지만 신중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런 분석을 해 주는 곳이 있잖아요. 일단 그곳에 의뢰해 분석 보고서를 보고 논의하는 것으로 하죠.”
(알겠습니다. 제가 의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의뢰할 때 한 가지 방식도 추가하시고요. 뭐냐면…….”
컴퓨터 그래픽 카드 방식을 설명하였다.
(오션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기 힘드니 그런 식으로 처리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방안을 두고 판단해야죠. 그리고 수소 자동차 충전도 생각해야 할 거예요.”
(저도 그 생각을 해서 미국 내에 수소 충전 관련 회사들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알아보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다른 것은 없죠?”
(네. 없습니다.)
전화를 끊자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염중섭 대표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 앉으세요.”
“네.”
염 대표가 소파에 앉았다.
“고문님이 사무실로 출근하시니 좋습니다. 용건 있을 때 바로 찾아와도 되니까요.”
난 하나도 좋지 않았다.
내가 특별히 하는 일도 없어서 사무실에 출근하면 너무 따분하고 심심하였다. 커피숍이 그리운데 아직도 손님들이 많다고 하니 갈 수가 없었다.
“염 대표님을 위해서라도 계속 출근해야겠네요.”
“지금도 커피숍에 사람들이 많이 옵니까?”
“네. 덕분에 항상 적자에서 이번 달에는 처음으로 흑자가 될 것 같아요.”
“흑자가 된다니 좋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호기심이 많아서 그럽니다. 미국 대기업 총수가 작은 커피숍을 한다고 하니 흥미를 느끼는 겁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저는 저한테 관심이 쏟아지는 게 싫거든요.”
“이제는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데 마음대로 안 되네요.”
“차차 나아질 겁니다.”
“용건이 있어서 온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어제저녁에 이엠스라는 중소기업 사장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통화하기 전까지는 저도 생각을 못 했는데 수소 내연 기관 자동차를 생산하면 수소를 충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에릭이 수소 충전 업체를 알아보는 중이에요.”
“아! 그렇습니까? 저만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엠스가 수소 충전 관련 회사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수소 충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아빠 연구 자료에 수소 충전에 관한 연구 자료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개발된 자료가 아니라고 아빠의 편지에 쓰여 있었다.
그 자료가 얼마나 연구가 진행된 것인지도 모르고 지금 수소 충전 기술과는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도 모른다.
그자를 만나 확인해 볼까? 아니면 그 회사를 인수할까?
“그 사장을 제가 만나도 될까요?”
“고문님이 만나시려고요?”
“네. 확인할 것도 있고 상황에 따라 인수할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오늘 오후 1시에 오라고 했는데 오면 고문님이 만나시면 됩니다.”
“그럴게요.”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는데 희수가 들어왔다.
“고문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이엠스 사장이 온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12시 40분이었다. 급한가? 일찍 오게.
“들어오라고 하고 차도 부탁해.”
“네.”
희수가 나가고 바로 40대 후반의 남자가 들어와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엠스 김갑수입니다.”
생각보다 젊은 사장이네.
“안녕하세요? 진민재입니다.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김갑수가 소파에 앉았다.
김갑수는 어제 전화 통화에서 오션 대표와 약속을 했는데 막상 오니 고문과 이야기를 하라고 하여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고문은 오션의 창업자이기에 그룹으로 치면 회장이나 다름없었다. 고문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수소 충전에 관심이 많다는 의미이었다.
오늘 이야기가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근데 고문이 너무 젊어 놀라기도 하였다.
“이엠스가 수소 충전기를 생산하는 회사인가요?”
“주로 전동차 충전기를 생산합니다. 수소 충전기는 현재 개발 중이며 80% 개발 단계에 와 있습니다.”
난 또 개발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80% 개발 단계라고 해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개발이라는 게 90%라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우리는 7년 전부터 수소 충전기를 개발하였기에 기술 노하우가 충분히 쌓여 개발에 자신 있습니다.”
“7년 동안 개발하지 못했으면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7년 전에 수소 충전기 개발을 시작하여 4년 정도 연구하다가 개발을 중단했습니다. 이번에 오션에서 수소 내연 기관을 개발하였다고 하여 다시 개발을 시작하려는 겁니다.”
“왜 중단했는데요?”
“그 당시 수소 충전기를 개발한다고 해도 사용할 만한 곳이 별로 없어 채산성이 맞지 않았습니다. 회사 자본이 튼튼하면 계속 개발을 했겠지만, 자금 사정이 열악하여 돈이 되는 전동 충전기를 개발하여 지금까지 생산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긴 7년 전이라면 수소 충전기를 개발해 봤자 돈이 안 되겠지.
“이해는 가네요. 그럼 오션은 왜 만나자고 한 건가요?”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것처럼 오션도 수소 충전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오션의 투자를 받고 싶습니다. 투자만 받는다면 반드시 개발에 성공할 겁니다.”
투자라? 개발 가능성만 있다면 투자해도 충분하지만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건데. 이엠스를 믿을 수 있을까?
“투자 제안서를 가져오셨나요?”
“죄송합니다. 급한 마음에 먼저 뵙자고 했습니다. 투자 제안서는 조만간에 정식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회사 자금 사정은 어떤가요?”
“여유가 있었다면 투자받으려고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연구원들은 실력이 있나요?”
“실력은 있다고 자부합니다.”
“혹시 연구 자료를 제가 볼 수 있을까요?”
“그건 곤란합니다. 고문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술 유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긴 대기업이 투자한다는 이유로 또는 연구원들을 빼돌려 중소기업의 기술을 강탈해 가는 경우가 흔하니까.
“오해했다면 미안해요. 사실은 우리 쪽에서도 개발하다가 만 연구 자료가 있거든요. 근데 그게 어느 정도 진행이 된 건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궁금해서 비교할 생각이었어요.”
“개발하신 분한테 물어보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물어볼 수가 없으니까 그러죠. 저도 물어볼 수만 있으면 좋겠어요. 그럼 혹시 실력 제일 좋은 연구원을 저한테 보내줄 수 있을까요? 그분한테 검증을 받아보게요.”
대답하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사실 회사에 연구 자료는 있지만, 연구원이 없습니다. 투자를 받으면 그때 데리고 오려고 합니다. 3년 전에 연구를 중단하면서 저와 함께 개발하던 연구원들이 다른 회사로 이직했습니다.”
솔직한 사람이네.
투자받으려면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과대 포장을 해야 하는데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그대로 말하면서 투자받기를 원하나?
엔지니어 출신이라 그런가? 디지털 카스트 황정화 사장이 떠올랐다.
이런 자라면 믿고 투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투자한 후에 연구원들을 데리고 와서 아빠 연구 자료도 공개해 같이 연구 개발하게 하면 개발에 성공할 것 같았다.
“투자할게요.”
놀란 눈을 하였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