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감탄하듯 입을 여는 에릭이었다.
“상황을 보면 하늘이 고문님을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하필 이 시기에 고문님 아버지의 연구 자료를 찾게 되고 때마침 자동차 회사까지 준비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네요. 하지만 GN하고 경쟁해야 할 거예요.”
“GN보다는 우리 오션이 훨씬 좋을 겁니다. 또 얼마 전에 고문님이 한국의 외화 은행에도 투자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한국 정부라면 GN보다는 오션을 선택할 겁니다.”
“그렇기는 해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GN이 대유 자동차를 인수하는데 후려친다고 하더라고요. 아마도 오만 정이 다 떨어졌을 거예요.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GN에 넘기겠지만 우리가 나서면 판이 달라지겠죠.”
“그러니까 하늘이 고문님을 돕는다는 말입니다. GN이 양심적으로 나왔다면 우리가 들어갈 틈이 없었을 겁니다. 제가 오션 코리아 염중섭 대표에게 연락해 당장 한국 정부에 대유 자동차 인수에 관심이 있다고 전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내 사무실로 왔다.
소파에 앉아 사무실을 보는 데 좋기는 하였다. 돈이 좋기는 하다.
일단 연구 자료는 거의 확실한 것 같은데 문제는 소유권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CIA의 도움을 받을까?
어차피 우리가 대유 자동차를 인수한다고 하면 그 이유를 자연히 알게 될 텐데 나중에 알게 되는 것보다는 미리 말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레베카에게 연락하는 게 좋겠지.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여러 번 울리다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네.
(여보세요.)
“레베카 잘 지냈어요?”
(누구시죠?)
내 목소리를 벌써 잊은 거야? 난 기억하는데 억울하였다. 한국에 왔다가 말없이 떠나고.
“서운한데요. 저 진민재예요.”
(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네. 전에 그냥 가셨더라고요.”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겨 정신없이 떠났어요. 화나셨어요?)
“제가 화낼 일이 뭐가 있어요. 좀 서운했죠. 같이 식사라도 했으면 했었거든요.”
(미안해요. 제가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 그런 경우가 많아요. 근데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지금 어디세요? 미국에 있는 건가요?”
(네. 뉴욕에 있어요.)
“저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데 오실 수 있나요.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진 박사님 일인가요?)
“네. 맞아요.”
잔뜩 기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만도 하지.
(혹시 기억나는 게 있어요?)
“직접 보고 이야기하죠.”
(알았어요. 제가 내일 오전에 출발하면 오후 늦게 도착할 거예요. 어디로 갈까요?)
오랜만에 학교에나 가 볼까? 내 전용석에 앉아 커피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오후 5시에 스탠퍼드 대학 정문에서 보죠.”
(알았어요. 내일 봐요.)
회사에 하루 종일 있으며 사총사하고 점심도 같이 먹고 회사에 모르는 임직원들이 많아 인사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일행들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저녁을 먹고 온다고 연락이 왔다고 하였다.
가 볼 곳이 많기는 하지. 난 아줌마가 차려 준 저녁을 먹고 정원 파라솔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바다만을 바라보는 바다멍을 하였다.
“다녀왔습니다.”
인사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일행들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표정들이 밝았다. 그중에서도 희수의 얼굴이 꽤 밝은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
“좋았어?”
“네. 너무 좋았습니다.”
당당하게 말하는 강성중과는 다르게 김나영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사장님은 일하러 가셨는데 우리끼리 놀러 가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요. 내일부터는 같이 가요?”
“난 괜찮아. 다 구경했으니까.”
“내일도 일이 있으세요?”
“응.”
“희수는 좋았어?”
“네. 너무 즐거웠어요. 원래 제가 어학연수를 샌프란시스코로 오려고 했었거든요. 제가 오고 싶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관광하니 너무 행복하고 꿈만 같았어요.”
실컷 관광해. 나중에 둘이서 오붓하게 샌프란시스코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데이트하자.
“내일도 즐겁게 지내길 바래.”
고개를 돌리자 미나가 있었다.
서영이도 같이 나갔지만 미나는 아닌 데 같이 들어왔다.
“미나도 간 거야?”
“네. 오전 연습 끝내고 저도 합류했어요.”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아?”
“모자 쓰고 선글라스 썼더니만 알아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어요. 일부는 알아보기는 했지만, 그냥 보기만 하더라고요”
“일행들이 많아서 그런가 보네.”
“저도 그런 거 같아요.”
“성중아! 비디오 촬영은 많이 했냐?”
“네.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운 광경을 제 비디오카메라에 전부 담았습니다. 아울러 미나도 덤으로 담고요. 너튜브에 미국에 있는 미나 근황이라고 올리면 조회수가 많을 겁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구나.
“밥은 먹은 거야?”
“네.”
“피곤할 테니 올라가서 씻어.”
“네.”
다음 날 아침 일행들은 다시 샌프란시스코 관광에 나갔고 난 집에 있다가 스탠퍼드 대학교로 향하였다.
햄버거와 콜라를 하나 사서 내 전용 벤치에 앉아 먹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오는 학교지만 학교 건물도 그대로이고 학생들도 그대로라 마치 어제 온 것처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내 전용 벤치 페인트가 벗겨져 세월의 흔적만을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앉아 있다가 시간이 되어 정문으로 향하였다.
10분 일찍 왔는데 레베카가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다. 레베카도 변한 것 없이 그대로네.
“레베카!”
내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진! 오랜만이야.”
“오랜만이기는 하지.”
“학교에 있었어? 난 앞만 보고 있었네.”
“조금 일찍 와서 학교에 있었어. 잘 지냈어?”
“그럼 잘 지냈지. 진 소식은 가끔 들었어. 한국에서 활약이 대단하던데.”
“무슨 활약?”
“공격적으로 기업을 인수하더라. 다시 진성 그룹을 세우려는 거지?”
“그렇지.”
“이야기하려면 우리 조용한 곳으로 가야겠지.”
젊은 남녀가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하니 남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내가 아는 곳이 있어. 거기로 가자.”
“좋지.”
학교 안으로 들어가 매점에서 커피 두 잔을 사서 내 전용 벤치로 왔다.
“여기야.”
“여기라고?”
“응. 답답하지 않고 누가 엿들을 일도 없고 조용하잖아. 커피 마시며 이야기 나누기에 이만한 곳도 없어.”
“하긴 그렇기는 하네.”
레베카가 벤치에 앉자 나도 따라 앉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나에게는 익숙한 곳이고 추억이 깃든 곳이야. 학교 다닐 때가 생각나네. 그때 여기에 앉아 생각도 많이 하고 햄버거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다용도로 사용했는데.”
“좋은 추억이네. 난 그런 추억이 없어서인지 진이 부럽네. 이런 사소한 추억들도 지나고 나면 소중한 추억이 될 거야. 뭐 생각나는 게 있어?”
“레베카도 알다시피 난 진성 계열사를 인수하고 있어. 얼마 전에 진성이 소유했던 별장을 인수하여 별장에 갔었는데 그때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어. 내가 어렸을 때 아빠랑 별장에 갔을 때 해 주신 말이 있거든. 별장 안에 작은 비밀 공간이 있었어. 그 안에서 아빠가 남겨두었던 연구 자료를 내가 찾았어.”
레베카의 목소리가 커지며 큰소리로 물었다.
어지간히도 놀랐나 보다. 아마도 레베카는 어떤 단서를 말할 줄 알았지 직접 찾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정말 진 박사님이 남긴 연구 자료를 찾았다고?”
“응.”
“역시나 별장에 있었네. 우리도 별장에 있을 거로 생각했고 국정원에서도 별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를 못했거든. 별장 어디에 있었는데?”
“말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
“나는 괜찮은데 15년 전에 별장을 조사한 선배는 무척 궁금해할 거야.”
“난 모르는 사람이니까 내가 궁금증을 해결해 줄 의무는 없겠네.”
“근데 연구 자료가 확실한 거야?”
“응.”
“전부 다 있는 거야?”
“응. 내가 미국에 온 이유거든. 검증받았어.”
“한국에서 검증받은 거야? 혹시 모르니까 미국에서 다시 한번 받아보자.”
“미국에서 받은 거야. 수소 내연 기관의 권위자인 로버트 크레나 박사에게 검증받은 거야.”
“그러면 확실하다는 말이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기 전에 소유권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소유권?”
“원래 아빠가 한국 정부와 현도 그룹의 지원을 받아 연구하고 개발한 거잖아. 그럼 그 기술의 소유권은 한국 정부와 현도 그룹이 아닌가? 난 아들이지만 이건 상속받을 수 있는 재산 같은 것이 아니잖아.”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 천재 맞아? 나도 생각하는 것을 진은 왜 생각 못 해?”
“뭘?”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자가 주인이지. 그 연구 자료가 진 박사님의 것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증거가 없으면 소유권 주장을 할 수 없어. 한국 정부에서는 진 박사님이 연구하던 자료가 하나도 없거든.”
“어떻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어? 중간에 보고는 했을 거 아니야?”
“모든 걸 비밀리에 진행했기에 일절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했던 거야. 연구 보고 자료가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증거가 남게 되니까.”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한국 정부는 우리 미국을 의식해서 그런 거야. 일절 꼬리를 잡히지 않겠다는 의지였어.”
“왜? 핵무기 개발하는 것도 아닌데.”
“생각해 봐. 15년 전에 물로 가는 자동차를 개발한다고 해 봐. 그건 핵무기 이상 가는 전략적인 무기야. 지금도 그런데 15년 전에는 더욱 그렇지. 80년대 초반에는 오일쇼크로 전 세계가 오일로 고통받을 때잖아. 그럴 때 물로 가는 자동차가 나온다고 생각해 봐. 어떻게 해서든지 숨기고 싶었을 거야.”
말을 들어보니 이해가 가기는 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아빠가 수소 내연 기관을 개발한다는 것을 어떻게 안 거야?”
“이런 말 하면 진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한국 정부나 사회 지도층에서 미국에 잘 보이려고 하는 자가 아주 많았어. 미국이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바치는 자들이 줄을 섰거든. 당연히 그런 고급 정보도 우리에게 알려주었지.”
어떻게 나라를 팔아먹는 자들이 많냐? 하긴 특권층이 아니어도 기업 기술도 중국에 돈 몇 푼 받고 팔아넘기는 자들도 많은데.
위나 아래나 다 썩었다.
이러니 친일파 놈들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아직도 판을 치고 있지.
가만 그러면 연구소장이 아빠의 기술을 팔아넘기려는 곳도 미국이라는 말인가?
“미국에서는 아빠가 연구 자료를 숨긴 이유를 알아?”
“정확히는 아니지만, 대충은 알아.”
“그게 뭔데?”
“조금 전에 말했듯이 미국에 잘 보이려는 자들이 많았다고 했잖아.”
“응.”
“그렇듯이 일본에 잘 보이려는 자들도 많았어. 당연히 일본 귀에도 들어갔지. 진 박사님의 연구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그 기술을 일본에 팔아넘기려고 했던 자들이 있었어. 아마도 진 박사님이 그걸 알고 개발이 끝나자마자 연구 자료를 숨긴 것 같아. 우리도 그걸 알기에 진 박사님을 회유해서 미국으로 데려가려고 무척 공을 들였거든. 진 박사님도 긍정적이었어.”
일본에 팔아넘기려고 했던 거구나.
“아빠가 긍정적이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개발에 성공해도 한국에서는 사용하지 못했어. 그전에 일본으로 넘어갔을 테니까.”
“일본에 넘기지 않고 한국에서 사용하면 되잖아?”
레베카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난 그 당시 미국과 한국, 일본의 관계가 어떤지 자세히는 몰라. 진도 잘 모를 거야. 진 박사님이 개발에 성공해도 미국 아니면 일본에 넘어갔을 거야. 진 박사님도 그걸 잘 알았고 일본에 넘길 바에는 미국을 선택한 거지.”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아? 그 당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컸잖아?”
“크기는 했지. 다른 국가에서 보더라도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야. 하지만 한국은 내부 깊숙이 친일파들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거든. 미국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의 영향도 무척 컸거든. 미국이 일본을 압박할 수도 있었지만, 그 당시 미국은 만성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일본을 압박하여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하여 엔화 가치를 상승하게 하였어. 그래서 일본은 미국의 감정이 좋지 않았고 미국도 심하게 압박할 수도 없었고 압박하면 일본이 심하게 반발할 것을 염려해 미국은 진 박사님을 미국으로 데려가려는 방향으로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