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이전 생과는 다르게 어학연수를 가지 않아 안 좋은 일이 있나? 걱정했었는데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어학연수 대신 취업을 선택한 거네. 이유가 뭘까? 이것도 나로 인해 바뀌게 된 건가? 어떻게?
“희수야! 너희 부서는 어때? 인턴이라고 잡다한 일만 시키고 그래?”
“그렇지. 지금까지 복사하고 커피 타고 잔심부름만 했어. 너는?”
“나도 마찬가지야. 인턴이라고 잡다한 일만 시키고 너무한 거 아니야?”
“우리 입사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어. 일을 시켜도 하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 잔심부름하면서 서서히 일을 배우는 거지. 학교 선배 직원 말을 들어보니 한 달은 지나야 조금씩 일을 시킨다고 하더라.”
아! 희수가 인턴으로 입사했고 이제 일주일밖에 안 되었구나. 그러니 아직 급여를 받지 않아 자료가 없었던 거였네.
“언제 한 달이 지나냐? 나도 일다운 일을 하고 싶은데.”
“뭐가 급해? 어차피 시간은 흐를 테고 한 달 금세 지나.”
“하긴 일주일도 금세 지나가더라. 근데 인턴 3개월 하면 정직원으로 되는 거겠지? 다른 대기업들은 인턴에서 정직원 되기가 힘들다고 하던데.”
“거긴 대기업이고 진성 리조트는 중견 기업이잖아. 학교 선배 말로는 인턴 제도를 작년에 처음 시행했는데 인턴 20명 중의 19명이 정직원으로 되었대.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거의 다 정직원으로 되나 봐.”
희수가 진성 리조트에 입사한 거구나. 다행이었다. 어떻게 그 많고 많은 회사 중에 진성 리조트냐? 이것도 운명인가?
“그 한 명은 왜 안 된 거야?”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지각을 자주 하는 등 근무 태도가 좋지 않았나 봐.”
“그런 기본도 안 된 직원은 내가 사장이라도 정직원으로 채용하고 싶지 않겠다.”
“당연하지. 그런 사람은 어딜 가도 그럴 거야. 책임감이 없는 거지.”
“그렇지. 정직원으로 된다니 다행이다. 나는 이 회사가 너무 마음에 들어. 점심도 무료지 음식 질도 좋지. 건물도 좋지. 회사 사람들도 좋지. 거기다 재작년에 대규모로 투자하여 리조트를 전부 레노베이션해서 발전 가능성도 크고.”
“나도 그래. 다른 회사에 지원했지만, 번번이 떨어져 유일하게 합격한 이 회사에 왔지만 다닐수록 마음에 들어. 열심히 다닐 거야.”
“그래 우리 열심히 다니자.”
“밥 다 먹었으면 가자. 인턴이니까 미리 들어가 있어야지.”
“알았어.”
식판을 들고 일어서 가는 희수를 넋을 잃고 쳐다보다가 희수가 식당을 나가자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하나?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것처럼 내 신분을 속이고 만나야 하나? 희수한테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자연스럽게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길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그렇게 만나서 뭐라고 해?
내 얼굴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네. 시간 끌 거 없이 직진할까?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으로 들어가자 진성 리조트 홍창호 사장이 놀라며 일어났다.
“도련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진성 리조트에 온 게 무척 오랜만이었다. 특별히 용건도 없고 문제가 없으니 발길이 뜸했었다.
“잘 지내셨죠?”
“그럼요. 앉으시죠.”
“네.”
소파에 앉았다.
“도련님! 자주 오십시오. 말을 들어보니 다른 계열사는 자주 오신다고 하던데 진성 리조트는 오시지 않고 서운합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는 겁니다.”
“홍 사장님이 잘하시니 믿고 있는 거죠.”
“그렇게 해석이 되는 겁니까?”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잖아요.”
“믿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요즘 진성 리조트 어떤가요?”
“IMF를 벗어나서 그런지 사람들의 여행 수요가 늘어 매출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 낡은 시설들을 전부 레노베이션 했더니 고객들의 만족도도 올라가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저 같아도 어디 놀러 가면 깨끗하고 너무 비싸지 않은 곳을 찾게 되더라고요. 그런 고객들의 니즈를 우리 진성 리조트가 파고든 거죠. 그러니 앞으로도 시설 관리에 신경 많이 써야 할 거예요.”
“물론입니다.”
이제 희수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인턴들 채용했어요?”
“네. 그렇습니다. 사세 확장으로 인해 신입 사원이 필요해서 인턴 30명 채용했습니다.”
“근데 왜 정직원이 아닌 인턴을 채용한 거예요?”
“그전까지는 인턴제가 낯선 제도였지만 IMF를 겪으면서 인턴제를 시행하는 기업들이 하나둘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재작년까지는 진성 리조트는 정직원으로 바로 채용했지만 사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면접만으로 그 사람에 대해 알기는 매우 부족합니다. 그런데 인턴제를 시행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알게 되어 직원 채용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겪어 보고 판단하니 제가 생각하기에는 좋은 제도입니다. 인턴들이 특별히 문제가 없으면 바로 정직원으로 전환합니다. 작년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홍 사장이 말한 장점도 있지만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걸 악용하는 인간들은 항상 있다.
저렴한 급여로 실컷 부려먹다가 내보는 등 문제점도 많다.
“급여는 어떻게 지급하나요?”
“급여는 신입 사원 기준으로 지급하고 있습니다.”
인턴제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급여는 제대로 주네. 시간이 가면 점차 악용하여 조금만 주고 계속 인턴만 뽑는 기업들이 나올 것이다.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제가 비서 한 명이 필요한데 인턴 중에서 한 명을 뽑았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도련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십시오. 근데 인턴들은 전부 이번에 대학을 졸업하여 사회 초년생이고 일 경력이 없어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2~3년 경력이 있는 직원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말이 비서지 간단한 일들이라 인턴으로도 충분해요.”
“그럼 제가 적당한 인턴을 선정하여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데리고 다닐 비서인데 제가 뽑고 싶네요. 인턴들 이력서 볼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대답하고서는 인터폰을 눌렀다.
(네. 사장님!)
“인턴들 입사 지원서 가져와.”
(알겠습니다.)
잠시 후 비서가 인턴들 이력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네.”
이력서들 들고 하나씩 보기 시작하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희수였지만 고민하며 신중히 선택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다른 사람들 이력서도 천천히 보았다.
이 친구는 아까 희수랑 밥 같이 먹던 친구인데. 난 같은 학교 출신인 줄 알았는데 다른 대학이었네.
조금 더 보자 드디어 희수의 이력서가 나왔다.
이력서는 특별한 것은 없고 집 주소가 신림동으로 되어 있었다. 여기서 자취하나 보네.
나머지 이력서도 다 보고 나서 희수의 이력서를 따로 빼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 친구로 했으면 해요.”
이력서를 들고 보는 홍 사장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친구를 어디로 보내면 됩니까?”
당분간은 커피숍에 있을 거라 커피숍으로 나오는 게 좋은데. 신림동에서 분당까지 출퇴근하기에는 힘들 텐데.
신상철 집이 봉천동이니까 같이 퇴근하면 되려나? 아니면 내가 데려다주지.
“내일은 여기 제 사무실로 11시까지 오라고 해 주세요. 그 이후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겠습니다.”
볼일 다 끝났으니 가 봐야지.
“그럼 저는 가 볼게요.”
“벌써 가시게요?”
“할 일이 있어요.”
진성 리조트에서 나와서 내 사무실로 왔다.
커피숍 상황이 어떤지 궁금하여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배 대리님! 저예요. 커피숍 상황 어때요?”
(여전히 밀려오는 손님들로 만원입니다. 커피숍 밖에까지 손님들이 줄 서고 있습니다.)
아침에도 그랬는데 아직도 줄을 서고 있다고? 안에 들어온 손님들이 나가야 자리가 비는데 안 나가고 있으면 줄이 줄지가 않겠지.
“매장 안에 너무 오래 있으면 내보내고 그러세요. 테이블 회전이 되어야죠.”
(그러고 있습니다. 매장이 꽉 차니까 대부분 테이크아웃을 해서 갑니다.)
“순순히 그냥 가요?”
(미나가 주문받고 커피 내려주니까 그 정도에 만족하고 갑니다. 더불어 커피 컵에 사인도 해 주고 있습니다.)
“미나가 너무 힘들 것 같은데 내일부터 미나 나오지 말라고 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힘드니까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했더니만 미나가 내일까지는 나오고 싶다고 합니다. 자신은 하나도 힘들지 않고 자신을 보러 여기까지 와 준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하다며 미국에 가면 한동안 한국에 오지 못하는데 이것으로 팬서비스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물론 사장님이 허락하신다면요.)
미나도 은근히 고집이 있네. 어차피 물은 엎질러졌고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 미나가 원하는 대로 해 주자.
하루만 더 나오면 끝나는데.
“미나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 배 대리님 혼자 감당하기 힘들지 않나요?”
(소나무 엔터테인먼트에서 매니저가 와서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나영이는 나왔어요?”
(네.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오늘은 일찍 나왔습니다. 옆에서 미나 도와주고 있습니다.)
“강성중은 뭐해요?”
(성중이도 옆에서 미나 도와주고 틈틈이 비디오 촬영도 합니다.)
“신상철은요?”
(묵묵히 게임 개발만 하고 있습니다.)
역시 신상철이네. 아마도 강성중이 제일 신났을 것 같았다. 미나 덕분에 비디오 촬영할 게 많으니까.
어제 촬영한 비디오 영상 올렸을 것 같은데.
“식사는 했어요?”
(샌드위치 사 와서 대충 먹었습니다.)
“알았어요. 수고하세요.”
(고문님은 언제 오실 겁니까?)
“오늘하고 내일은 가지 못할 거예요. 모레 갈게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끓고 핸드폰으로 너튜브를 보았다.
강성중이 어제저녁에 올린 커피숍에서 일하는 미나의 영상 조회수가 8만이 넘었다. 하루로 안 지났는데 벌써 8만이 넘다니?
대박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진민재입니다.”
(양평 별장 소유주 한상현입니다.)
며칠 있다가 올 줄 알았는데. 빨리 왔네. 나로서는 더 좋지.
“안녕하세요?”
(우리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언제가 편하십니까?”
(내일 1시에 같은 장소에서 봅시다.)
“알겠습니다. 내일 뵙죠.”
오늘 무슨 날이냐? 좋은 일이 연달아 생기네. 박도진에게 희수 찾았다고 알려줘야겠다.
핸드폰을 들었다.
(박도진입니다.)
“저 진민재예요. 정희수 출국 기록 확인하지 않아도 되고 소재지 파악도 하지 않아도 돼요.”
(네? 시간이 좀 걸리지만 찾을 수 있습니다.)
“정희수 찾았거든요.”
(네? 어떻게 말입니까?)
“등진 밑이 어두웠어요. 회사 구내식당에서 봤거든요.”
(정말입니까?)
“네.”
(어찌 그런 우연이 있답니까?)
“글쎄요? 우연일지 운명일지는 모르겠네요. 하여튼 수고하셨어요.”
(찾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아침에 커피숍에 오자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미나 인기가 이 정도였나? 인기가 많으면 좋지.
오늘만 고생하면 되지. 미나가 3일 뒤에 미국으로 떠나니 이틀은 가족하고 보내야지.
커피숍 안에 들어가지 않고 역삼동 사옥으로 향하였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희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수를 만나면 뭐라고 첫마디를 내뱉어야 할까? 어떻게 대해야 할까? 처음부터 친근하게 대하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여러 생각들이 들었지만, 결론은 못 내리고 있었다.
똑똑-
긴장하고 있었는지 작은 노크 소리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왔나 보네.
“네.”
오션 비서가 들어왔다.
“고문님! 정희수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비서가 나가고 곧이어 희수가 긴장한 모습으로 들어오더니 나를 보고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정희수라고 합니다.”
“어서 오세요. 앉으세요.”
“네.”
소파에 조신하게 앉았다.
“이야기는 듣고 오신 거죠?”
“네. 고문님 수행비서로 보직이 이동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갑작스러운 보직 이동이라 당황스럽겠지만 어쩌면 희수 씨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열심히 하시고 앞으로 서로 잘 지내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궁금한 게 많을 것 같은데 물어볼 거 있으면 부담 갖지 마시고 물어보세요.”
“제가 이곳이 처음 직장이고 더구나 비서 일은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인턴인 저를 비서로 보내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괜히 폐만 끼치는 것이 아닐까? 걱정됩니다.”
“어려운 일은 없기에 인턴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