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박도진이 가자 생각에 잠겼다.
그 많은 직업 중에 하필 검사야. 그것도 비리 검사라니? 짜증이 몰려왔다.
팔라고 하면 팔까? 시세보다 더 준다고 하면 팔까? 일단 매입 의사를 전달하기 전에 그자에 대해 알면 도움이 될 텐데.
가만 그자 근무지가 동부지검이라고 했지? 그럼 유아영 검사가 있는 곳인데. 유아영 검사에게 물어볼까?
오랫동안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몰라. 핸드폰을 들었다.
(네. 유아영입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예쁘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세요? 당연히 기억하죠.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전 잘 지내고 있죠. 요즘 오션 성장이 무섭던데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계속 발전했으면 해요. 근데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요?)
“점심식사 같이 하실래요? 제가 사 드릴게요.”
(좋아요. 그냥 식사하자는 것은 아닐 테고 용건이 있을 테니 내일 어떠세요?)
검사라 그런가? 눈치 한번 빠르네.
이전 생에서도 원래 눈치는 아영이가 빨랐지.
“좋아요. 제가 전화 드릴게요.”
(그래요. 내일 봬요.)
다음 날 동부지검 앞으로 갔다.
여기도 두 번째 오는 거네.
입구에 서서 현관을 바라보고 있은 지 20분 정도 지나자 유아영이 나오고 있었다.
4년 전인 98년도에 현관에서 나오는 유아영은 풋풋한 모습이 있었는데 지금은 성숙한 여인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내 기억 속에는 항상 풋풋한 아름다움이었는데 세월이 야속하네.
유아영이 날 보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그전보다 더 예뻐지셨네요.”
“호호호. 농담도 잘하시네요.”
“진짜예요. 식사 어디로 갈까요?”
“저는 상관이 없어요.”
“예전에 왔을 때 유 검사님이 감자탕을 맛있게 드신 것이 생각나네요. 또 감자탕 먹으러 가실래요?”
“그걸 기억하고 계셨어요?”
당연하지.
“제가 기억력이 좋아서요. 가시지요.”
“네.”
맛있게 먹는 유아영을 보니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유아영이 감자탕을 좋아해 학교 끝나고 신림사거리에 있는 감자탕 집에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가서 먹었다.
한 번은 질리지 않냐고 물으니까 눈을 흘기며 왜 맛있는 것을 먹는데 질리냐며 오히려 나에게 되물었다.
아이노도 감자탕을 좋아하는데. 의외로 여자들이 좋아하나 보네.
다 먹었는지 수저를 내려놓았다.
“맛있어요?”
“네.”
“맛있는 음식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죠.”
“당연하죠. 여기 올 줄 알았으면 점심이 아니라 저녁에 올 걸 그랬어요. 소주도 한잔하면 딱인데요.”
유아영은 술은 잘 못 마셨는데.
“검사님은 술은 잘 못 마실 것 같은데요.”
“예전에는 못 마셨는데 검사하다 보니 술이 저절로 늘더라고요. 무슨 술들을 그리도 많이 마시는지 같이 어울리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래도 적당히 마시세요.”
“많이는 못 마셔요. 그리고 아버지 연구 자료는 찾았어요?”
“아뇨.”
“국정원에서 수사한다고 해서 찾기를 바랐는데 결국은 못 찾았군요. 너무 아쉬워요.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저도 매우 아쉬워요. 검사님은 아빠가 양평에 간 이유를 아세요?”
“저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양평에 있는 별장으로 가는 길이었을 거로 추정해요. 그게 아니라면 연고가 없는 양평에 가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역시나 아영이도 알고 있었네. 그럼 국정원이나 CIA도 알고 있었겠고. 나만 몰랐네. 알고 있었으면 말 좀 해 주지.
그럼 진작에 확인해 볼 수 있었는데.
그래서 아빠가 양평에 간 이유를 따로 조사하지 않은 거였구나. 나만 의문을 품었었네.
“그 당시 수사하실 때 별장은 확인해 보셨나요?”
“아뇨. 이미 경찰에서 다 확인했고 그 당시 안기부에서도 자료가 별장에 있을지 몰라 샅샅이 조사했다고 해서 우리는 확인하지는 않았어요. 사실 제대로 조사하지도 못하고 중단한 거라 별장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근데 별장은 왜요? 뭔가 생각난 것이 있어요?”
하긴 샅샅이 조사한다고 해도 거기는 찾기가 힘들었을 거다.
“아뇨. 아빠가 별장에 가려고 했으면 별장이 가장 유력한 곳이라 혹시나 해서요.”
“맞아요. 박사님의 연구 자료가 숨겨져 있다면 별장이 가장 유력하기는 하죠. 안기부도 그걸 알기에 집중적으로 조사했으나 발견하지는 못했으니 거기는 아닐 거에요. 제가 생각해도 뭔가를 숨기려면 남들이 쉽게 추측하지 못할 장소에 숨겼을 거예요. 진 박사님이 그 정도로 생각 못 하지는 않았겠죠.”
“그렇겠죠. 누구나 추측 가능한 곳은 너무 쉽죠.”
아영이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고서는 상에 내려놓았다. 오션폰이었다.
“저랑 그냥 식사하려고 오신 것은 아닐 테니 이제 용건을 말씀해 보세요.”
“오션폰이네요?”
“네. 맞아요. 디자인이 예뻐서 바꿨는데 성능도 좋아 아주 만족하고 있어요. 이런 핸드폰을 개발하다니 역시 오션이에요.”
“만족하신다니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오션폰 계속 사용해 주세요.”
웃으며 물었다.
“오션폰 홍보하러 저 만나자고 하신 거예요?”
“당연히 아니죠. 동부지검에 한상현 부장 검사가 있죠?”
“네. 있어요.”
“그분은 어떤 분이세요? 지검에서 평판은 어떤가요?”
“그건 왜 물어보는 거예요?”
뭐라고 말해야 의심하지 않을까?
“자세히 설명해 드리자면 꽤 긴 이야기인데 제가 지금 진성 되찾기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진성 그룹을 되찾기 위해 계열사들을 인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 핑계가 가장 자연스러울 거다.
“그래서 양평 별장도 다시 찾으려고 하는데 알아보니 소유주가 한상현 부장 검사더라고요. 그래서 매입 의사를 전하기 전에 어떤 분인가 알고 싶어서요.”
“별장 소유자가 한상현 부장 검사님이라니?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그러게요. 더구나 유 검사님이 있는 동부지검에 있으니 서로 연결이 되는 기막힌 우연이죠.”
“그러네요. 뭐라고 해야 하나?”
뭔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저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오직 별장 매입 때문에 알려는 거예요.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도 않아요. 절대 비밀을 지킬 테니 안심하고 말씀해 주셔도 돼요.”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지 계속 망설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런 말 하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말이라 하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진 고문님은 다른 불순한 의도가 없을 테고 별장 되찾기 위해서니 말할게요. 우리 지검에서도 말이 참 많은 분이세요. 하지만 높은 분들 비위를 잘 맞추어서 지금까지 자리를 보존했고 승진까지 곧 한다는 말이 있어요. 한마디로 말하면 검사의 수치이죠. 그런 사람이 검찰에 있고 승진하는 것을 보면 검사에 대한 자부심도 사라지고 회의가 들 정도예요. 제가 생각하기에 돈을 아주 좋아하는 자라 돈만 많이 준다면 별장을 매도할 것 같기는 해요. 근데 문제가 생길 수가 있어요.”
아영이도 맺힌 게 많나 보네. 하긴 그런 자가 있다는 자체가 검찰의 수치이고 얼굴을 더럽히는 거니까.
그런 놈들은 잡아 처넣어야 하는데 자기 식구라고 감싸기를 하니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런 놈들이 존재하는 거다.
결국은 검찰도 한통속이고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멀었다.
“무슨 문제요?”
“만약 진 고문님이 시세보다 많은 돈을 주고 별장을 매입하면 나중에 뇌물죄로 의심받을 수 있거든요. 원래 뇌물이 직접 돈을 주는 것도 있지만 부동산이나 그 밖의 자산을 시세보다 훨씬 싸게 팔거나 비싸게 사주는 경우도 많거든요. 정상적이라면 그런 경우는 없으니까요. 그자는 구린 곳이 많아 언젠가는 문제가 터질 거예요. 그럼 부동산 등 거래 내역을 조사할 텐데 시세보다 비싸게 사 준 것을 알게 되면 진 고문님이 곤란해질 수도 있어요. 나중에 문제가 없다고 결과가 나와도 그동안 조사받느라 고생하고 명예에 흠집이 잡히겠죠. 언론에서 이런 좋은 미끼를 가만히 보고 있겠어요? 흥미 위주의 추측성 보도가 많을 거예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시세보다 더 많이 주고 매입하는 것은 별로인 것 같아요.”
듣고 보니 그러네.
나는 떳떳하지만,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정황상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래서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가지 말아야 하는 거다.
그자가 시세대로 팔면 다행이지만 안 팔면?
“그러네요. 과연 그자가 시세대로 팔까요?”
“아닐걸요. 먼저 매매 제의를 하는 순간부터 을이 되는 거예요. 그자가 그걸 모를까요? 눈치가 보통이 아니니 절대 팔지 않겠다고 할 거예요. 더 많은 돈을 받고 팔려고 하겠지요.”
쉽지는 않겠네. 계속 시간 끌 수는 없으니까 그자를 빨리 만나 그 이후를 생각해 봐야겠다.
“조언 고마워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시간 다 된 것 같은데 나가시죠.”
“네.”
지검으로 들어가는 유아영을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유아영은 결혼한 거야? 안 한 거야? 유아영이 검사가 되었다는 소식만 들었지 그 이후는 나도 모른다.
물어볼 걸 그랬나?
그래도 유아영이 나의 첫사랑이었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나? 첫사랑을 만났더니 마음이 뒤숭숭했다.
커피숍으로 돌아와 고민하다가 시간 끌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들었다.
(동부지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상현 부장 검사님하고 통화 좀 할 수 있을까요?”
경계하는 투의 말투가 들려왔다.
(어디신데요?)
“저는 오션의 진민재 고문이라고 합니다.”
(오션이라면 오션폰 그 회사를 말하는 건가요?)
얼마 전까지 오션하면 오션 사이트를 말했는데 요즘은 오션폰으로 통한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오션폰이 강인한 인상을 준 결과이다.
“네. 맞습니다.”
(잠시만요.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전화를 바꿔 주는 것을 보면 나를 알고 있나 보네. 안 바꿔 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음악 소리가 들리더니 내시 같은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성현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션의 진민재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오션의 고문님께서 저한테 무슨 일로 전화를 주신 겁니까?)
“만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시간 되십니까?”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검사는 사적으로 만나면 안 되는데 오션의 고문님께서 특별히 전화해 면담을 요청하시니 거절하기가 힘드네요.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제가 편하십니까?”
(급하신 것 같으니 내일 저녁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그럼 약속 장소와 시간은…….)
장소와 시간을 약속하였다.
(내일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는데 반가운 얼굴이 들어오고 있었다. 미나였다.
나에게 달려오더니 넙죽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어서 와. 오늘은 한가해?”
“어제부터 활동을 접었어요. 그래서 한가해요.”
“왜? 힘들어서?”
“아뇨. 신곡이 나와 다음 주에 저 미국 가요. 가기 전까지 커피숍에 나오려고요.”
마나가 한국에 온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한국에서도 활동을 활발히 하여 인기가 많았다. 이제 미나는 미국과 한국에서 명실상부한 톱스타 반열에 오른 것과 마찬가지였다.
“미국 가면 또 바쁠 텐데 집에서 푹 쉬지.”
“이상하게 집보다 여기가 편해요.”
나오겠다는데 내가 막을 수는 없지만, 이제는 미나 얼굴이 대한민국에 다 알려졌는데.
“손님 예전보다 많이 늘었어. 손님들이 알아보면 피곤할 텐데.”
“손님 있을 때는 선글라스 끼고 있으려고요.”
“알아서 해.”
“근데 사장님! 미국에 몇 개월 있을 거라니 왜 금세 왔어요? 미국에서 보나 했는데.”
“보니까 세상은 계획한 대로 다 되지 않더라. 나도 더 있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어.”
“미국은 또 언제 가요?”
“글쎄? 아직 계획은 없어.”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저 미국에 있을 때 그 집에 있어도 되나요?”
미나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내 집에서 머물다가 나중에 LA에 숙소를 마련해 주어 그곳에서 지냈었다.
“LA에 소속사에서 마련해 준 집 있잖아?”
“있기는 한데 당분간은 신곡 연습만 하기에 사장님 집에서 머물 수가 있어요. 활동 시작하면 다시 옮겨야겠지만요. 거기는 서영이도 있어서 좋아요.”
“서영이도 좋아하겠다. 편한 대로 해.”
“고맙습니다. 사장님!”
“다들 너 보고 싶어 했어. 인사들 해.”
“네.”
나랑 이야기가 끝나자 강성중이 기회다 싶었는지 손에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래 그게 프로정신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