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좋다는 말이네. 젊은 피 강성중이 좋다고 하니 됐다.
“배 대리님은 어떠세요?”
“저도 좋습니다.”
“상철이는?”
“나도 좋아.”
대답들이 다 짧아? 물어보면 뭐가 어쩌고저쩌고해야지 물어본 내가 잘못했네. 두 사람에게 뭘 바랄까?
그래도 좋다고 하니 됐다.
코리아 오션 염중섭 대표에게 말해 TV CF 일정 잡으라고 해야겠다. 미국에도 보내주고.
“사장님! CF 광고는 언제부터 나가는 겁니까?”
“글쎄? 9월쯤에 내보낼 생각이야.”
“그럼 광고 촬영하는 영상은 지금 올리면 안 되는 겁니까?”
“그렇지. 광고 나간 후에 올려야지.”
“일본 광고도 마찬가지입니까?”
“그렇지. 일본은 조만간에 방송할 테니까 조금만 참으면 될 거야.”
“언제 한다고 합니까?”
“나도 모르지. 방송하면 나한테 연락 올 테니까 알려줄게.”
“부탁드립니다.”
“그래. 편집은 다 했어?”
“하긴 다 했는데 오늘 광고 영상을 보니 편집 공부도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다시 편집할 생각입니다.”
“그래. 열심히 해.”
“그럴 겁니다. 저는 너튜버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은근히 부담되네. 나중에 너튜버 제대로 안 되면 오션에 취직시켜 줘야지.
“근데 너튜버로 인생을 걸었으면 알바 계속할 수는 없지 않아?”
“저도 고민입니다. 하루종일 알바 하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처럼 오전에만 알바 하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 말 나온 김에 오후 알바 구한다고 종이 써 붙이고.”
“여기에 칙칙한 남자들만 있으니 알바는 여자로 구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손님들도 더 좋아할 겁니다.”
너의 음흉한 속마음을 모를까 봐? 알면서 속아 준다.
“그러든가.”
“알겠습니다. 바로 붙이겠습니다.”
“그래.”
강성중이 종이에 알바 구인 공고를 쓰는 것을 보고 핸드폰을 들었다.
(염중섭입니다.)
“안녕하세요?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고문님! 지금 일본입니까?)
“아니에요. 이틀 전에 한국에 왔어요.”
(일본에서 촬영은 잘한 겁니까?)
“네. 그리고 오션폰 광고 영상 나왔어요. 방송사하고 방송 일정 잡으시라고요.”
(알겠습니다. 9월 중으로 잡으면 되는 겁니까?)
“네.”
(사장님이 일본에 가 계실 때 금감원에서 외화 은행에 관심이 있냐며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있다고 하니 다른 곳과 합작하여 인수할 생각은 없냐고 물었습니다. 의향에 있다면 자기가 알아봐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뭐지? 금감원에서는 누구든지 인수하기만 하면 될 텐데. 설마 어르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닐 텐데. 아직 여유가 있나?
“뭐라고 대답했어요?”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본사에서 결정할 일이라며 대답을 미뤘습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한다고 했는데 전화 오면 뭐라고 대답합니까?)
“연락 오면 우린 기존 DS 자산 운용사에서 조성한 사모 펀드에 투자할 생각이라고 말하세요. 이미 그쪽과 이야기가 다 되었는데 인제 와서 변경하기는 힘들다고 하시고요.”
(투자하는 거라 어디랑 합작하든지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파트너를 잘 알고 믿을 수 있는 곳이 좋겠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어르신에게 알려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뒤통수 맞지 않고 미리 대응하겠지.
“네. 그리고 누구한테 연락 온 거예요?”
(금감원 부원장보인 오진석이라는 사람입니다.)
“알았어요.”
전화를 끊자 강성중이 다가왔다.
“사장님! 방금 미나하고 통화를 했는데 미나가 알바 추천해 줄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친구래?”
“친구는 아니고 소속사에서 배우 지망생이라고 합니다. 오전에는 소속사에서 연기 수업받기에 오후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왕이면 미나가 추천하는 친구를 고용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미나가 추천하는 것을 보니 괜찮은 친구 같습니다.”
연기 지망생이면 예쁠 것 같았다.
나도 그 생각을 하는데 강성중이 그 생각을 하지 못할까? 아무래도 흑심이 있는 것 같았다.
난 상관이 없지.
“왜? 예쁠 것 같아서?”
“손님들도 예쁜 알바가 있으면 더 많이 옵니다.”
“우린 손님이 많아지면 더 골치 아파. 손님이 오지 않도록 씨름 선수 데려다 놓을까?”
“사장님!”
“농담이고 그럼 내일 오라고 해 봐.”
“알겠습니다.”
신이 나서 자리로 돌아가는 강성중을 보며 어르신에게 전화하려고 핸드폰을 들었다.
* * *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한 DS 자산 운용 사장 신동환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생각에 잠겼다.
오늘 금감원 부원장보인 오진석을 만나기로 하였다.
지난번에 한번 만나 외화 은행 인수 건에 대해 운을 띄웠더니만 가당치도 않다는 듯 비웃음 짓던 표정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었다.
사채업을 하던 자가 은행 인수를 꿈꾸다니 은행이 만만하냐며 이룰 수 없는 꿈은 꾸지 말라고 하였다.
오션과 같이 합작하여 인수한다고 해도 거절 의사를 보였다. 문제는 그자가 회장님을 좋지 않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뒤로 오션에 전화해 다른 금융 자본과 합작하여 인수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고, 자기가 다른 금융 자본을 알아봐 준다고 했다고 하였다.
생각할수록 괘씸하였다.
회장님을 좋게 보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로 이간질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회장님이 그토록 화를 낼까? 좋게 진행하려고 했던 회장님의 심기를 그자가 먼저 건드렸다.
‘자업자득이지.’
회장님이 주신 서류 봉투를 바라보았다.
저 봉투 안에는 그자를 올가미로 묶어 놓을 수 있는 그자의 비리가 있었다. 자신도 그 내용을 보았다.
보면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시궁창인 주제에 어디서 누구보고 깨끗하냐고 유세를 부리다니?
생각 같아서는 언론에 공개해 매장하고 싶었지만, 회장님이 조용히 처리하라는 지시에 그럴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이 10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오지 않았다. 더구나 그자는 회장님이 나오시는 줄 아는데도.
이는 회장님을 철저히 무시하는 거라 화가 났다.
10분이 더 지나고 문이 열리더니 오진석이 거만하게 들어왔다.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억지로 화를 참으며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인사에 대꾸도 하지 않고 앉는 오진석이었다.
“회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곧 오실 겁니다. 그전에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닙니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애초에 쳐다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알아야지.”
속으로 화를 참으며 나직하게 입을 열면서 서류 봉투를 오진석 앞으로 밀었다.
“이거 한번 보시지요.”
“이게 뭡니까?”
“보시면 아십니다.”
거만하게 서류 봉투를 열어 서류를 꺼냈다.
서류를 보면서 점점 똥 씹은 얼굴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며 통쾌함을 느꼈다. 이래서 사람은 항상 겸손해야 하는 법이다.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누가 양아치 아니랄까 봐 남 뒷조사까지 합니까?”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 맞습니다. 지금 협박하는 겁니다. 아, 그리고 입을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양아치보다 더한 분이 그런 말을 하시니 당황스럽습니다.”
버럭 화를 내었다.
“뭐라고? 말이면 다 말인 줄 알아? 이러고도 외화 은행 인수할 줄 알아?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신동환이 정색하며 말하였다.
“똑바로 들어. 이 자료가 언론에 넘어가는 순간 당신 인생은 끝이야. 외화 은행 인수? 당신이 가만있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당신 비리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당신과 친하다는 사람 모두가 등을 돌릴 거야. 아무도 당신 말에 귀 기울이지도 않고 당신은 바로 구속이야. 당신이 뭘 할 수 있겠어? 정년까지 그 더러운 가면이 벗겨지지 않고 퇴직하려면 잘 생각해야 할 거야. 당신 자식들이 아빠가 파렴치한 비리 공무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떨까? 자식을 위해서라도 명예는 지켜야 하지 않겠어? 아직도 뭐가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겠어?”
조금 전까지 죽일 듯이 노려보던 눈에 힘이 빠지며 공손해졌다.
“외화 은행 인수를 도와주면 자료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당연하지. 이 자료 10년 전 자료야. 공개할 것 같았으면 진작에 공개했지 지금까지 금고에 처박아 놓았겠어? 우리도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 이제 말귀를 알아듣겠어?”
“약속할 수 있는 겁니까?”
“회장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제가 회장님이 외화 은행 인수하도록 힘을 쓰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비아냥거리던 신동환이 자세를 바로 하였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정부에서도 외화 은행 매각을 빨리 결정짓기를 원할 겁니다. 이 어려운 시국에 골칫덩어리를 하루빨리 처리하는 것이 공무원의 본분이고 애국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걸 회장님이 도와주시겠다는 겁니다.”
“물론입니다. 외화 은행을 하루빨리 매각하여 새 주인을 찾아 경영 정상화를 이루는 것이 시급하기는 합니다.”
“그럼 부원장보님을 믿고 조만간에 정식으로 외화 은행 인수 의향서를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외화 은행 매각은 금감원 혼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경부와 외화 은행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오진석은 재경부와 외화 은행도 자신과 같이 협박을 당해 협조하기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사채업자가 은행을 인수하는데 협조할 리가 없었다. 순간 오물을 피하려다가 똥을 밟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나중에 외화 은행 매각 건이 문제가 될 수가 있었다. 하긴 자격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니 문제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만약을 위해 재경부와 외화 은행도 끌어들여야 자신의 안위가 보장되기에 둘을 거론한 것이었다.
이미 말이 되었다고 하니 부담이 덜어졌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잘 부탁합니다.”
이야기가 끝나고 오진석이 가자 씁쓸한 마음에 물을 벌컥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도 나와 바로 성북동으로 향했다.
서재 안으로 들러가자 회장님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다가 내려놓았다.
“다녀왔습니다.”
“앉아.”
소파에 앉았다.
“이야기는 잘되었습니다.”
황규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방법까지는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쩔 수 없지 않았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이런 방법으로 일을 해결한 적은 한 번도 없어. 물론 협박은 많이 했지만 추잡하게 남 뒷조사해서 비리로 협박하고는 싶지 않았어.”
“때로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습니다. 애초에 잘못은 그자가 한 것이지 회장님이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자가 깨끗하게 살았다면 그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업자득입니다.”
“내가 왜 비리 자료를 많이 모아 놓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는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황규천이 과거를 회상하듯 입을 열었다.
“나도 깨끗한 편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일하면서 나와 관련이 있었던 기업가든 공무원이든 정치인이든 깨끗한 놈을 한 명도 보지 못했어. 더러움을 보며 그 더러움 속에서 난 평생을 살아온 거지. 금고에는 아직도 많은 놈들의 비리 자료가 있어. 그 자료를 사용하기보다는 보험으로 모아 둔 거야.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처음으로 사용했지만. 내가 떳떳하지 못해서 그랬어. 나도 온몸에 더러움이 가득한데 그런 내가 더러운 놈을 향해 뭐라고 할 수 있었을까? 말이 안 되고 웃기는 일이겠지만 어쩌면 마지막 양심은 지키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어.”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깨끗한 자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말 대신 눈빛으로 누구냐고? 물었다.
“진민재 말입니다. 제가 그동안 보아온 바로는 진민재는 깨끗한 자였습니다. 더러움을 피하려고 오히려 더러움을 멀리하는 자입니다.”
“그놈은 내가 보기에도 그래. 그래서 더 걱정이야. 맑은 물에서는 고기가 살 수 없기에 적당히 더러움도 묻혀야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더러움을 묻히지 않아도 크게 될 인재입니다. 요즘은 6, 7, 80년대 같이 권력에 결탁해야만 하는 기업 환경도 아니고 미국 국적이라 권력에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천재적인 두뇌가 있기에 독야청청해도 전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행이지. 알았어. 다음 주에 정식으로 외화 은행 인수 의향서 제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