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커피숍에 출근하여 커피를 마시며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진민재입니다.”
(나 장서필이네.)
“안녕하세요? 회장님!”
(왔었다며?)
“네. 당연히 가 봐야죠.”
(왔으면 얼굴이나 보고 가지 그랬어.)
“큰일을 당해 정신도 없으시고 바쁠 것 같아서 그냥 왔습니다. 잘 끝나신 겁니까?”
(그래.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 내일 오게. 차나 한잔하지.)
“알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집에서 바로 양재동에 있는 현도 자동차 사옥으로 향하였고 양재동 사옥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처음이네.
장주영 회장을 만나러 갈 때는 종로까지 가느라 멀어서 불편했는데 현도 자동차 사옥은 양재동에 있어서 가까워 좋았다.
나야 좋지만 장서필 회장은 속이 쓰라릴 것이다.
차남 장서필 회장은 2000년에 5남 장서헌과의 왕자의 난에서 패해 현도 자동차를 가지고 분가하여 이곳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현도 자동차를 가지게 된 것이 오히려 더 잘되었다. 아직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겠지만.
사옥은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아 종로 사옥보다 더 좋았고 깨끗하였다.
회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서류를 보던 장서필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게. 앉지.”
“네.”
소파에 앉았다.
장례를 치러서 그런가? 왠지 수척해 보였다.
“아버지가 자네를 참 좋게 생각하셨어. 아나?”
나한테 가끔 소리치기는 하지만 그분 원래 성격이고 생각해 보면 잘해 주기는 하였다.
“감사할 뿐이죠.”
“와주어 고마워.”
“회장님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끝날 때까지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죄송할 뿐이에요.”
“자네하고 우리 현도하고는 인연이 깊은 것 같아. 자네 아버지부터 인연이 이어졌으니까. 자네 아버지하고 인연이 잘 마무리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쉬워.”
한참 잠잠했던 아버지 연구 자료를 찾고 싶은 건가? 그만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이제는 장서필 회장인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나나? 자네가 집에 초대되어왔을 때 아버지가 자네 아버지 연구 자료를 찾으라고 했던 말?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게 불효를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러고 보니 나도 장 회장이 같이 금강산에 가자고 했는데 죄송하게도 가지를 못했네.
“찾으시려고요?”
“자네 생각은 어떤가?”
“찾고자 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제가 더 할 거예요. 하지만 국정원이나 CIA에서도 그렇게 찾았으나 못 찾았어요. 이제는 놔줘야 하지 않겠어요? 실체도 없는데 힘과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회장님도 이제 잊으세요. 없어요.”
“그렇겠지?”
“네.”
“나도 그런 생각에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거였어. 알겠네. 나도 미련을 버리겠네.”
잘 생각했어요.
“자네 작년부터 우리 현도에서 재미를 많이 봤더라.”
“서로 윈윈하는 거래죠.”
“자네 올해 몇 살이지?”
나도 이제 20대의 끝자락에 서 있네.
“29살입니다.”
“가정을 꾸릴 나이가 되었네.”
“아직은 아닙니다.”
“아니지. 남자는 가정을 일찍 꾸려야 안정되는 거야.”
갑자기 결혼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거지?
장 회장이 장서필 회장의 딸과 나를 엮으려고 한 적이 있어서 내가 강하게 거절한 적이 있었는데.
설마 장 회장처럼 날? 괜히 골치 아픈 일 생기지 않도록 확실히 알아듣게 말해야겠다.
“저는 지금 결혼할 생각이 없고 하더라도 저는 정략적인 결혼보다는 제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겁니다.”
저리 말하니 장서필은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원하던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진 박사의 연구개발 자료를 찾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민재와 자신의 딸 수아와 인연을 맺어 주는 거였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진 박사의 자료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고 수아도 나이가 어렸고 진민재의 진가를 잘 몰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뜻을 받들지 못해 불효를 짓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죄송스러웠다.
이제라도 그 뜻을 받들고자 했지만, 어느 것도 받들기가 힘들게 되었다.
그때라도 진민재의 진가를 제대로 보았다면 자신도 밀어붙였을 텐데 보는 눈이 없었다. 아버지는 진민재를 제대로 봤는데.
지금 수아 이야기를 꺼냈다가 거절당하면 다음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꺼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남녀 간의 사랑이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아. 너무 사랑에 목매지는 말게.”
“조언 깊게 새기겠습니다.”
“그래. 자네도 바쁠 텐데 그만 가 보게. 다음에 집으로 저녁 식사 초대할 테니 그때 보세.”
다행히도 내 말을 알아들어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초대는 왜 하는 거야?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엮으려는 건가? 제발 절 가만히 내버려 두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 * *
커피를 마시다가 커피숍 안을 둘러보았다.
배상도는 컴퓨터 앞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고 신상철은 게임 수정을 하고 있었으며 강성중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커피숍 안에는 잔잔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만족해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그대로 멈췄다.
내가 지금 잘못 본 건가? 미국에 있을 미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눈이 커진 나를 보며 미나가 소리쳤다.
“사장님!”
미나에 소리에 배상도도 신상철도 강성중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나 온다는 말이 없었는데.
“미나야!”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애가 미국에서 지내더니만 미국인 다 되었네. 스스럼없이 나에게 안기고.
잠시 안겼다가 내 품 안에서 떨어졌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기는요? 미국에서 온 거죠.”
“온다는 말 못 들었는데.”
“일정이 갑자기 바뀌어서 온 거예요.”
“언제 온 거야?”
“지금이요. 공항에서 바로 여기로 온 거예요.”
“바로 왔다고? 기자들도 따라온 거 아니야?”
“아니에요. 기자들은 제가 한국에 온 것도 몰라요.”
“한국에 왔으면 집에 제일 먼저 가야지. 부모님이 얼마나 보고 싶어 하시겠어.”
“여기 있다가 갈 거예요. 미국에 있을 때 커피숍 생각이 얼마나 많이 나는지 오고 싶었어요. 사장님 잘 지내신 거죠?”
“나야 잘 지내지. 미나 미국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어.”
“저 열심히 했어요.”
“알아. 수고했어. 여기 온 소감이 어때?”
“너무 좋아요. 옛날 생각도 나고.”
“미나야 우리하고도 인사해야지.”
강성중 말에 미나가 뒤를 돌아 인사하였다.
“상도 아저씨 안녕하세요?”
“어 그래. 반갑다.”
“상철 오빠. 성중 오빠도 잘 지냈지?”
“어.”
“당연하지. 와! 스타라서 그런가? 미나 더 예뻐졌네.”
“원래 예뻤거든.”
“미나야! 뭐 마실 거 줄까?”
“커피 줘. 미국에서 여기 커피 생각을 많이 했거든.”
“여기 앉아 있어. 내가 얼른 갖고 올게.”
“응.”
미나가 앉자 배상도와 신산철이 미나 옆에 따라 앉자 나도 옆에 앉았다.
강성중이 커피를 가지고 와 테이블에 내려놓고 앉았다.
“여기 있어. 마셔.”
“고마워.”
커피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 맛이야. 미국에서 여러 커피를 다 마셔 봐도 이 맛이 없었어.”
“이제 한국에 왔으니 매일 마시면 되지. 언제까지 한국에 있는 거야?”
“일단은 올해까지는 한국에 있을 거야.”
“오래 있네.”
“응. 미국에서 내 신곡 준비하고 있거든. 그래서 그래.”
“그럼 한국에서는 뭐해?”
“한국에서도 할 일이 많은가 봐. 방송에 출연도 하고 CF도 촬영해야 하고 행사도 있고 5월부터는 좀 바빠. 미국에서 그동안 제대로 쉬지 못해서 4월 동안은 쉴 거야.”
“그럼 커피숍 나올 거야?”
“난 나오고 싶은데…….”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미나가 커피숍에 나오면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 뻔하기에 그건 안 된다. 그럼 나의 평화로운 시간이 깨지게 된다.
“이제 미나는 공인이야. 공인답게 행동해야지.”
“사장님! 안 돼요?”
“집에서 편히 쉬어. 여기 나와서 할 것도 없는데 심심하기만 하지.”
“나오고 싶은데.”
말을 하고서는 커피숍을 둘러보다가 한곳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미나의 시선은 아이노의 브로마이드였다.
“사장님! 아이노 언니 브로마이드가 걸려 있네요?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7개나 있네요.”
미나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예전에 일본에서 미나의 브로마이드를 제작했을 때에는 커피숍에 붙이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미나도 그걸 염두에 두고 묻는 것 같았다.
“내가 붙인 거 아니야. 성중이가 붙였어.”
미나가 성중이를 째려보자 강성중이 날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사실이잖아? 내가 뒤집어쓸 수는 없지.
“성중 오빠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내 정신 좀 봐. 물 올려놓고 그냥 왔네.”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더니 주방으로 향하는 강성중이었다.
잠시 후 미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름 머리를 굴렸지만 이미 늦었어. 여자의 한이 얼마나 무서운데.
미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오랜만에 만난 해후를 풀다가 집으로 갔다. 내일 오전에 또 온다고 하는데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참 난처하였다.
그래도 오전에는 손님이 별로 없으니까 그나마 괜찮지만.
핸드폰이 울렸다.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주주님! 소나무 오현서입니다.)
“안녕하세요?”
(미나 방금 커피숍에서 떠났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보시니 반갑지 않습니까?)
“반갑죠. 근데 갑자기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된 거예요? 연락도 없이 와서 놀랐어요.”
(미국에 있었던 행사 하나가 취소되는 바람에 일찍 오게 된 겁니다. 공항에서 사장님을 뵈어야 한다고 해서 바로 커피숍으로 간 겁니다. 저도 아직 미나 보지 못했습니다. 미나 입장에서 사장님이 은인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 나 아니었으면 아직도 알바나 하며 지냈을 테니까.
“4월 한 달은 쉰다고 하던데요.”
(네. 그렇습니다. 좀 쉬고 싶다고 하여 5월부터 일정을 시작할 겁니다. 그동안 푹 쉬게 해 줄 겁니다.)
“잘하셨네요. 미나 미국에서 고생 많이 했어요.”
(저도 압니다. 힘들 텐데도 꿋꿋이 잘 견디어 대견합니다.)
“미나 왔다는 거 언제 공식적으로 발표할 건가요?”
(저절로 알려질 때까지는 비밀로 할 겁니다. 안 그러면 미나 제대로 쉬지도 못할 겁니다.)
“그렇죠. 최대한 들키지 않게 해야겠네요.”
(알아서 잘할 겁니다. 선글라스 끼고 마스크 쓰면 못 알아볼 겁니다.)
“하긴 미나가 국내에서는 얼굴이 많이 알려지지 않아 괜찮을 것 같네요. 알았어요.”
전화를 끊자 강성중이 다가왔다.
“사장님!”
“왜?”
“미나가 있을 동안 당분간이 브로마이드 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어지간히도 미나가 무서운가 보네. 하긴 미나가 커피숍에서 일할 때도 강성중이 미나 눈치를 많이 보기는 했지.
“그러든가. 근데 나중에 아이노 오면 그대로 말할 거야.”
“사장님! 너무하십니다.”
“알았어. 잘 떼서 잘 보관해.”
“알겠습니다.”
대답하고서는 벽에 붙은 브로마이드를 떼는 강성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커피쇼에 출근하자 미나가 강성중에게 뭐라고 하고 있다가 나를 보고 인사하였다.
예전과 같이 서로 투닥거리는 것을 보니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커피 드릴까요?”
“좋지. 오랜만에 미나가 타 주는 커피 마셔 보겠네.”
“이러니까 예전 생각이 나요. 그때도 참 즐거웠거든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커피 맛있게 내려 드릴게요.”
“고마워.”
자리에 가서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