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황정화 사장이 이메일로 보내준 주문 신청서를 보고 있었다.
일본에서 20만 개를 더 추가 주문을 하였다. 금액으로는 200억 원이 넘는다. 일본에서 잘 팔리기는 하지만 벌써 주문한다고?
이 정도 추세라면 올해 일본에서만 100만 개 이상을 판매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야 잘 팔리면 좋지.
생각을 접고 다시 프로그램 개발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진민재입니다.”
(나야 손이야.)
“안녕하세요? 회장님!”
(요즘 바빠?)
“그냥 그래요. 오션팟 20만 개 추가 주문했다고 하던데요. 일본에서 오션팟이 많이 팔리나 봐요.”
(그것 때문에 전화했어.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오션팟 인기가 많아 나도 놀라는 중이야. 그래서 타오르는 장작불에 더 불을 지피려고.)
“어떻게요?”
(대대적으로 판촉 행사를 하려고 해. 판촉 행사를 하면 언론에 알려지고 그럼 더 홍보가 되거든. 그래서 말인데 오션 모델이 일본에 왔으면 해서.)
오션 모델이면 미나인데.
“판촉 행사하는 데 모델이 필요하다고요?”
(당연하지.)
“행사 모델은 일본에서 구하면 되지 않아요?”
(아니지. 진짜가 있는데 짝퉁이 모델 하면 어떡해? 진짜 모델이 와서 해야 흥행에 성공하지. 직원들 말로는 그 모델이 인기가 많다고 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미나가 귀여우면서 예쁜 게 일본에서 먹히는 스타일 같았다. 그럼 가는 게 좋지.
한국이든 일본이든 어디서든지 인기가 많으면 좋은 거니까.
“알았어요. 모델한테 물어보고 전화드릴게요.”
(알았어. 올 때 자네도 같이 와.)
미나 혼자 보낼 수 없으니 나도 같이 가야지.
“네. 그럴게요.”
전화를 끊었다. 졸지에 일본 가게 되었네. 시계를 보니 미나가 오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데 미나가 들어오며 힘차게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미나 왔어요.”
“미나야! 이리 와 봐.”
“네.”
미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너 일본 갈래?”
“네? 갑자기 일본이라뇨?”
“아까 일본에서 전화 왔는데…….”
내 말이 끝나자 방방 뛰며 바로 대답하였다.
“저 무조건 갈래요.”
“알았어. 너 여권 있어?”
“아뇨. 없어요. 저 한 번도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거든요.”
“내일 당장 여권부터 신청해, 일본 비자도 받아야 하거든.”
“알았어요.”
가만히 있을 강성중이 아니었다.
“사장님! 미나 일본 가는 겁니까?”
“그래.”
“혼자서요?”
“아니, 내가 보호자로 가야지.”
“얼마 동안 가는 겁니까?”
“글쎄? 며칠 정도 되겠지. 가는 김에 일본 관광도 해야 하니까.”
부러운 듯 나와 미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장님! 짐 들고 잡일할 사람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 일 매우 잘합니다.”
“그건 소프트 뱅코에서 다 준비할 거야.”
“그래도 미나한테는 익숙한 제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얼굴을 보니 무척 가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동안 신상철 일도 많이 도와주고 했는데 데리고 갈까?
커피숍이야 며칠 문 닫으면 되니까. 그럼 신상철은 어떻게 하지? 그냥 다 갈까?
* * *
오늘은 현도 장 회장이 저녁 식사를 초대하여 집에 왔다.
현관 안으로 들어가자 장 회장을 비롯해 중년 남녀와 이십 대 초반의 여성이 서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 손녀 같은데 내가 뭐라고 문 앞에서 맞아 주니 황송하였다.
“어서 와.”
“안녕하세요? 회장님!”
“인사해.”
중년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장서필이네. 반갑네.”
근데 표정을 보니 뭔가 못마땅해하며 마지못해서 하는 인사 같았다. 사람 초대해 놓고 이게 뭐야?
손을 맞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진민재라고 합니다.”
“내 둘째 아들인데 현도 자동차 회장을 맡고 있어. 서로 인사했으니 앞으로 잘 지내봐. 여기는 며느리하고 손녀야.”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장 회장 자식들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 둘째 아들 내외만 있네. 같이 사는 건가?
며느리와 손녀 인사에 화답하였다.
“안녕하세요? 진민재입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자 장 회장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인사했으니 저쪽에 가서 앉지.”
“네.”
거실 소파에 앉아 거실을 둘러보았다.
재계 1위 그룹 회장이라 집이 으리으리할 줄 알았는데 작은 집과 거의 비슷한 규모였고 살림살이는 작은 집이 오히려 더 좋았다.
검소하게 사시나 보네.
“이 친구가 내가 저번에 말한 진상규 박사 아들이야. 또한, 오션의 창업주이기도 해.”
장 회장 말에 장서필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누군지 말을 하지 않았나 보네.
“수소 내연기관을 개발했다던 그 박사님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그 연구 자료만 찾으면 현도 자동차가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데. 그 생각만 하면 너무 아쉬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으니 네가 이 친구와 잘 협의해서 한번 찾아봐.”
“알겠습니다.”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못마땅하던 표정이 그새 사라졌다.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니야?
“우리는 조만간에 따로 만나세.”
장 회장과 장서필은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고 있나 보네. 난 이제 포기했는데 굳이 만나야 하나?
그래도 앞으로 현도 자동차가 잘 나가니까 친분을 맺어 놓으면 좋겠지.
“알겠습니다.”
“내 손녀 수아가 22살이거든. 서로 젊은 나이이니까 오빠 동생 하면서 친하게 지내고.”
“네. 할아버지.”
손녀가 대답하자 장 회장이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자넨 왜 대답 안 해?”
“알겠습니다.”
“이렇게 보니 서로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아.”
“그런 거 같아요. 아버님!”
가만히 있던 며느리까지 맞장구쳤다.
뭐야? 설마 나를 손녀와 엮으려는 건가? 아니겠지.
“배고프다. 이야기는 식사하고 하지.”
부엌으로 가니 커다란 식탁에 이미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고 의자에 앉자 가사 도우미들이 밥과 국을 갖다 주었다.
“차린 거는 없지만 많이 먹어.”
이게 차린 게 없는 거야? 이런 진수성찬 밥상은 난생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또 집밥을 먹네.
“음식이 너무 많아서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뭘 고민해? 다 먹으면 되지.”
날 배 터지게 하여 죽일 생각인가? 이걸 어떻게 다 먹어?
“감사히 먹겠습니다.”
“식사하지.”
“네.”
주방에 요리사복을 입은 분들이 몇 명 보이던데 요리사가 한 거라 음식들이 다 맛있었다. 오랜만에 포식하였다.
정작 장 회장은 조금만 먹었고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눈치가 보여 적당히 먹어야 하는데 음식들이 맛있어서 나만 계속 먹었고 식구들은 내가 신기한지 먹는 것을 구경들 하였다.
“며칠 굶었어?”
“제가 집밥을 먹은 지가 오래되어서인지 음식들이 너무 맛있어요.”
내 처지를 아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먹어. 갈 때 음식 싸 줄 테니까 집에서 밥해서 먹고.”
“감사합니다.”
며느리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집에서 식사하지 않으세요?”
“저 혼자 살 거든요. 그래서 밖에서 사 먹어요.”
“왜 혼자서 사세요? 부모님하고 같이 살면 되지 않아요?”
장 회장이 소리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음식이나 싸.”
장 회장의 호통 소리에 며느리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는지 대답하고서는 일어났다.
“네. 아버님!”
배불리 먹고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션팟 인기가 많은가 봐. 저번에 보니 수아도 오션팟을 듣고 있더라고.”
맞다. 미국하고 일본에서 지금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국은 아직 외환 위기라 그런지 두 나라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MP3 플레이어 용도보다는 휴대용 저장장치로도 인기가 많았다.
USB가 올 초에 정식으로 출시되었지만, 용량도 적고 가격도 비싸고 전송 속도가 느려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대신 오션팟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전송 속도도 빠르고 MP3 플레이어로 사용도 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라 그런 것 같았다.
오션팟이 인기가 있자 캐나다와 유럽에서도 판매하라는 요구가 계속 빗발치고 있었다.
곧 새 공장을 인수하니 생산량이 많아지면 바로 유럽도 수출할 계획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한국보다 미국하고 일본에서 인기가 많습니다.”
“좋겠어. 자네는 하는 사업마다 다 성공이네.”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운도 실력이지. 내가 사업을 수십 년 동안 하면서 느낀 점인데 사업은 타이밍이라는 게 있어. 내가 보기에는 자네는 운보다는 그 타이밍을 잘 맞추는 것 같아. 그 말은 소비가가 뭘 필요로 하고 뭘 원하는 것이 제대로 안다는 거야.
그런 면에서 자네는 제대로 된 사업가지. 젊은 나이에 이 정도인데 앞으로 많이 기대돼.”
“과찬이십니다.”
“여기서 만족할 건 아니지?”
“네. 그렇습니다. 3년 안에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열정과 젊음이 부러워. 나도 아직 할 일이 많은데 120살까지 살면 아주 좋겠는데.”
말을 하고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장 회장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딱 하나 죽음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오래 사실 겁니다.”
“그래야지. 그리고 해금강 호텔 우리가 인수하기로 했어.”
“가격은요?”
“베트남에서 제시한 가격보다 더 낮춘 1,500만 달러에 인수했어. 그 가격 아니면 인수하지 않겠다고 하니 매각하겠다고 하더라. 헐값이라도 팔지 않으면 계속 빈 건물로 놔둬야 하니 어쩔 수 없었겠지. 자네 때문에 헐값에 인수하게 되었어.”
“잘됐네요. 이제 군부대 가는 길만 철저히 막으면 되겠어요.”
“그것도 북한하고 합의했어. 자기들도 관광객들의 접근을 막으면 좋으니까 순순히 좋다고 해. 이제 곧 호텔 인테리어 공사 들어가니까 8월부터는 관광을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축하드려요.”
“관광 시작하면 내가 초대할게. 같이 가자고.”
“네. 감사합니다.”
장서필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버지! 북한 금강산에 있는 호텔이 왜 베트남 소유입니까?”
“그게 1988년에 호주의 한 기업인이 4,500만 달러를 들여 7층짜리 수상 호텔을 지었어. 관광객이 없으니 적자가 났고 그걸 베트남에서 인수했는데 또 적자로 인해 문을 닫고 있었거든. 그걸 처음에 6,000만 달러에 우리한테 팔려고 했었어. 우리로서는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근데 이 친구 덕분에 결과적으로 1,500달러에 인수하게 된 거지.”
“그렇군요. 근데 수상 호텔은 뭡니까?”
“고정된 선박에다 지은 호텔이야. 그래서 파도가 심하게 치면 흔들리는 단점이 있어.”
한동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왔다.
* * *
장 회장은 진민재가 가자 아들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가 보기에 저놈 어때?”
“젊은데도 혼자서 저 정도의 사업을 일꾼 것을 보면 보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기에도 반듯한 것이 마음에 들기는 합니다.”
“보통이 아니라 천재야. 아빠의 머리를 타고 태어났어. 인성도 좋아. 저 나이에 성공하면 세상 다 가진 것처럼 건방지거나 교만해지는데 그런 점이 전혀 없어. 또 키도 크고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도 가지고 있잖아. 내가 알아봤는데 여자 문제도 깨끗해. 저러기 힘든데 말이야. 수아 짝으로 괜찮을 것 같아. 넌 어떻게 생각해?”
“그래서 오늘 저녁 식사 초대한 겁니까?”
“그래.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만나게 해 줘야지.”
어쩐지 아버지가 누구를 초대한다고 해서 의아했었다.
예전에는 집으로 손님 초대를 많이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거의 초대하지 않았는데 초대했다고 하여 누군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했었다.
잠깐이지만 첫인상은 자신도 마음에 들었지만, 딸은 아직 어렸다.
“수아 이제 22살입니다.”
“누가 당장 결혼시킨대? 약혼 먼저하고 결혼은 몇 년 뒤에 하면 돼.”
“아버지! 혼자 산다고 하던데 그건 무슨 말입니까?”
“저놈 진성 그룹 장손이야. 근데…….”
진민재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래서 시댁 문제도 전혀 없어. 남남으로 살기에 우리 현도 그룹으로 맞을 수도 있어 좋잖아.”
“그렇기는 합니다. 제가 나중에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
아버지와 이야기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온 장서필은 부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 청년 어떻게 생각해?”
“뭘?”
“아버지가 수아 짝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
“난 찬성이야.”
“왜? 어디가 마음에 들어?”
“잘생겼잖아.”
순간 장서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자신은 못생겼기 때문이었다. 딸이 자신이 아닌 엄마를 닮아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얼굴 보고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