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오늘은 드디어 서영이를 보려고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학교에 왔다.
학생들에게 물어 국문학과 강의실 앞에 왔다. 지금은 수업 중이라 시계를 보니 강의가 끝나려면 30분 정도 남았다.
건물 들어오다가 1층에 자판기가 있던 것이 생각나 1층으로 내려가 유자차를 뽑고 현관 밖 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경제는 어렵지만, 학생들은 활기차 보였다.
이러고 있으니 미국에서 대학원 다닐 때 자주 앉던 내 전용 벤치가 생각났다. 그립네.
그렇게 학생들을 보다가 시계를 보니 5분 정도 남아 일어났다.
강의실 문 앞에서 조금 기다리자 교수로 보이는 자가 나오고 곧 학생들이 삼삼오오 나오기 시작하였다.
서영이를 놓칠까 봐 눈을 크게 뜨고 찾는데 친구 두 명과 함께 나오는 서영이가 보였다. 반가웠다.
3년 넘어 보는 거라 그런지 기억 속의 앳된 모습은 사라지고 엄연한 숙녀의 모습이었다. 어렸을 때의 꼬맹이 모습이 그리워졌다.
그때가 좋았는데.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겠지. 내가 과거로 또 돌아갈 수 있다면 볼 수는 있겠지만.
“서영아!”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크게 부르자 학생들이 전부 나를 쳐다보았다.
서영이도 나를 보고서는 큰 눈이 더욱 커졌다.
“오빠!”
사영이가 나한테 달려왔다. 반갑고 오랜만에 보는 거라 안아 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손을 잡았다.
“오랜만이야.”
손으로 내 가슴을 툭 쳤다.
“한국에 있으면서 연락도 하지 않고 너무하는 거 아니야?”
“미안.”
“미안하면 다야?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지.”
손으로 내 가슴을 다시 툭 쳤다. 안 본 사이에 애가 폭력적으로 변했네.
“대답이 왜 그래?”
“수업 또 있어?”
“아니! 끝났어.”
“어디 가서 커피 마시며 이야기하자.”
“학교 앞에 괜찮은 커피숍 있어. 거기로 가자.”
“그래.”
“누구야?”
어느새 서영이 친구 두 명이 다가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촌 오빠야.”
친구들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나에게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서영이 친구 서미영이에요.”
“안녕하세요? 저는 박민지예요.”
“안녕하세요? 진민재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박민지라는 친구가 서영이를 툭 쳤다.
“넌 이런 사촌 오빠가 있었으면서 여태 말 안 했어?”
“그러게.”
친구들의 말에 서영이가 뭐라 대답할지 망설이고 있어 내가 말했다.
“제가 외국에 오랫동안 유학 가 있어서 서영이가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유학 다녀오신 거예요?”
“네. 오늘은 오랜만에 서영이를 만나는 거라 양보 좀 부탁할게요.”
“네. 그러세요.”
학교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그동안 왜 연락 안 했어?”
“바빴어. 미안해.”
가져온 오션팟 상자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언제 주나 했는데 이제야 주네.
“이거 선물이야.”
상자를 본 서영이 얼굴이 활짝 폈다.
좋아하는 것을 보니 나도 기뻤다.
“이거 오션팟 아니야?”
“맞아.”
“고마워.”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영이 너 이제 4학년이지 않아?”
“응. 맞아. 4학년이야. 어제 입학한 것 같은데 벌써 4학년이라니 너무 슬퍼.”
“졸업하면 뭐 할 거야?”
“글쎄? 나도 고민이야. 그냥 하는 것 없이 지내기보다는 뭔가 하고 싶기는 해. 할 것 없으면 아빠 회사에 다녀야겠지.”
그래도 서영이는 놀고먹고 하려고 하지 않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하고 싶은 일은 있어?”
“내가 잘하는 게 글 쓰는 것밖에 없거든. 그렇다고 등단하기도 쉬운 것도 아니고 등단해도 돈은 못 벌어. 누구처럼 대박 치면 몰라도 대부분 작가는 배를 곪지.”
“서영아! 너 혹시 로맨스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 같은 것은 어떻게 생각해?”
“내가 꼭 순문학을 고집하는 건 아니야. 그것들도 나름 문학의 한 장르라고 생각해. 가끔 나도 한번 써 보고 싶기는 해.”
잘됐다. 이러고 보니 꼭 서영이를 위해 준비한 것 같잖아.
“우리 오션 사이트에서 이번에 만화하고 소설을 연재할 수 있는 공간을 준비 중이거든. 거기에 글을 연재할 작가들이 필요한데 글을 한번 올려 봐. 실명이나 얼굴 까고 올리는 것도 아니니까 네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올리는지도 몰라. 나중에 유료화하면 돈도 벌 수 있어.”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진짜?”
“응. 근데 오션하고 네이브는 남성향이고 여성향은 다옴에서 할 거야. 네가 여성향을 쓸 거면 다옴에서 연재해야 해.”
“난 그런 거 별로 안 따져. 판타지도 좋아하거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알았어. 한번 해 볼게.”
“그래. 나도 네가 글 올리면 꼭 읽고 응원해 줄게.”
“말 안 해 줄 거야.”
“왜?”
“창피하잖아.”
“뭐 어때? 남들도 아니고 오빠인데. 혹시 알아? 내가 피드백도 해 줄 수 있잖아.”
“그렇기는 하네. 알았어.”
갑자기 작은 집 상황이 궁금하였다.
“요즘 집안은 어때?”
서영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빠 사업이 잘 안되나 봐. 아빠하고 엄마하고 툭하면 싸워. 오빠들이나 언니도 정신 못 차리고 다들 그래. 보고 있으면 참 한심해.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
괜히 물었나? 오늘 제대로 서영이 기분을 풀어 주어야겠다.
“서영아! 오늘 늦게 들어가도 되지?”
“응.”
“오늘 내가 너를 위해 이 한 몸 희생할 테니까 네가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말해. 다 들어줄게.”
“정말?”
“그래.”
“뭐할까?”
생각하는 서영이를 보면 진작에 연락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 * *
홍이나는 방송을 끝내고 방송사 근처 식당에서 매니저와 박성현 팀장과 뒤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 먹고 수저를 내려놓은 박 팀장이 홍이나에게 물었다.
“너 재계약 안 한다고 했다며?”
홍이나는 순간 밥맛이 떨어져 수저를 내려놓았다.
어제 친분 있는 가수와 통화하다가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말을 매니저가 우연히 들었는데 그새 팀장에게 말하였다.
식사하는 매니저를 째려보자 모른 척 고개 숙이고 식사하는 매니저였다.
“네.”
“회사에서 얼마나 잘해 줬는데 너무하는 거 아니야?”
“저도 5년 동안 회사에 할 만큼 했어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저도 할 말이 많아요.”
“JMS로 가는 거야? 계약금 많이 준대?”
“돈 때문에 옮기는 것이 아니에요. 맨날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는 거에 질렸어요. 카센터도 아니고 툭하면 땜질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니까 지난번과 같이 갑질 사건이 일어나는 거잖아요. 저도 이제 지겨워요. 제대로 된 회사 가서 제대로 일하고 싶어요.”
“잘 해결되었잖아.”
홍이나는 그때 일만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싫다고 하는데도 데리고 가서는 그 사달을 만들었으니.
그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이해하지. 덕분에 진민재를 알게 되고 커피숍 식구들도 알게 되어 전화위복이 되었지만.
“잘 해결되지 않았으면 저는 갑질하는 가수로 찍혀 가수 생명 끝날 수 있었어요. 더는 불안해서 지낼 수 없어요.”
“3년만 더 같이 일하자. 그때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아무 말 하지 않을게.”
“죄송해요. 이미 마음을 굳혔어요.”
“내가 약속할게. 다시는 임의대로 스케줄 잡지 않을게.”
“저도 잘 알아요. 팀장님 잘못이 없다는 거요. 이기현 이사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기는 거잖아요. 이 이사가 있는 한 이런 일은 고쳐지지 않고 계속 생길 거예요. 저 말고도 사람들이 소속사를 옮기는 이유를 팀장님도 잘 알잖아요? 당사자는 빠지고 우리 을들끼리 다툼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만해요. 팀장님하고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아요.”
박성현 팀장도 홍이나가 하는 말이 뭔지 잘 안다.
하지만 자신은 팀장이기에 회사 입장에서 말할 수밖에 없고 자신이 하는 약속은 공염불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렇기에 홍이나에게 강하게 말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었다.
“사장님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가만있지 않으면요? 계약 기간이 끝났기에 어떻게 할 수도 없어요.”
“나도 모르겠다.”
“팀장님은 모른 척해 주세요. 나중에 사장님한테는 제가 말할게요.”
“알면서 보고하지 않을 수는 없어. 보고는 할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알았어요.”
* * *
식사를 마친 박성현 팀장은 회사로 돌아왔다.
홍이나가 소속사를 옮긴다는 사실을 자신만 알고 있으면 모른 척해 줄 수 있지만, 매니저에게 보고를 받았기에 자신도 보고해야만 하였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이기현 이사였다.
이쪽 일도 잘 모르면서 낙하산으로 이사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하여 문제가 발생한다.
일을 모르면 실무자의 말에 따라야 하는데 자신도 답답하였다.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신도 지겨웠다.
원래는 이 이사에게 보고해야 하지만 이 이사 때문에 홍이나가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보고할 수 없기에 사장에게 바로 보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사장실 안에 들어가니 사장과 이 이사가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기현 이사가 물었다.
“박 팀장이 여기는 웬일이야?”
“보고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사님이 사장실에 계신다고 하여 온 겁니다.”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하지.”
“급한 일입니다.”
주호식 사장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홍이나가 이번 6월에 계약이 끝나는데 재계약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옮긴다는 말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이기현 이사가 소리쳤다.
“이런 배은망덕한 년 같으니라고. 우리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지난번에도 자기를 위해 사장님하고 내가 자존심 버리고 시퍼런 애송이한테 고개까지 숙였는데 뭐? 소속사를 옮겨?”
“넌 가만히 있어.”
사장이 이 이사에게 소리치고 박 팀장에게 물었다.
“어디로 옮긴다고 해?”
“소나무 엔터테인먼트라고 합니다.”
“어디 대단한 곳으로 옮기는 것도 아니고 어디 들어보지도 못한 삼류 회사로 옮긴다고?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거 아니야?”
화를 내며 사장에게 말하였다.
“사장님! 홍이나 이대로 보내면 안 됩니다. 소송을 걸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흠집을 내야 합니다.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합니다.”
이 이사의 말을 무시하고 박 팀장에게 다시 물었다.
“소나무 엔터테인먼트가 확실해?”
“네. 홍이나가 직접 말했습니다.”
“옮기는 이유가 뭐래?”
이유를 알지만, 이 이사가 이 자리에 있어서 말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홍이나가 말하겠지.
“저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소나무 엔터테인먼트가 신생 회사라 돈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중에 사장님을 뵙고 말씀드린다고 했습니다.”
주호식 사장은 현재 회사의 간판스타가 홍이나 이기에 절대 보내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다른 스타들도 많지만, 간판스타가 빠지면 회사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남들이 보기에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계약금을 많이 주더라도 잡고 싶지만, 문제는 하필 소나무 엔터테인먼트라는 거다.
며칠 전에 소나무 엔터테인먼트에 오션이 투자하여 35%의 지분을 확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제는 지난번 갑질 사건에 연루된 진민재가 오션의 창업주이고 대한민국 재계 1위인 현도 그룹 장주용 회장과 매우 친밀한 사이라는 거다.
지난번 갑질 사건으로 경고를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 홍이나를 건드는 것은 진민재를 건드는 것이고, 이는 현도 그룹 장주용 회장을 무시하게 되는 거다.
재계 1위인 현도 그룹 회장의 심기를 거슬리고 회사가 살아남기는 힘들다. 아쉽지만 홍이나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하필 소나무야?
“알았어. 이 순간부터 홍이나에게 계약 관련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이 이사를 바라보았다.
“너도 내 말 명심해.”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