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리우지빈은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바로 일어설 것처럼 말하는 오션 대표를 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바로 꼬랑지를 내릴 수는 없었다.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여 회사의 손실을 줄여야만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상쇄할 수 있으니까.
“좋습니다. 1,100만 달러까지 지급할 용의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 문제뿐만 아니라 할 일이 많습니다. 이 문제로 신경 쓰고 싶지도 않고 오랫동안 시간 끌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합시다. 서로 양보하여 1,250만 달러 어떻습니까? 제가 양보할 수 있는 마지막 선입니다. 받아들이시든지 아니면 소송을 통해 해결하시든지 그건 헝도 전자 측이 결정해야 할 겁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대가 최후통첩을 내렸다.
사실 1,250만 달러면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사장님도 1,500만 달러는 넘지 말라고 했으니 이쯤에서 합의해도 될 것 같았다.
합의금을 더 깎으려다가는 아예 협상이 결렬될 수도 있고 자신도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오션 측에서 양보했는데 우리가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겁니다. 우리도 양보하여 1,250만 달러로 합의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런 일 가지고 시간 끌면 뭐 하겠습니까?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리면 다시는 오션의 MP3 원천 기술 특허를 침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양보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만약 헝도 전자에서 계속 MP3 플레이어를 판매하고 싶으면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사용하십시오.”
리우지빈은 속으로 미쳤냐? 라고 대답하였다.
물건만 미국에 없었다면, 그것도 소량이었다면 너희들이 소송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서 마무리를 잘하려면 상대 기분을 맞춰 줘야 하기에 예의상 대답하였다.
“물론입니다. 이번에 아주 큰 경험을 했기에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MP3 특허 사용료를 지급하면 얼마를 내야 하는 겁니까?”
“개당 5달러 정도 받아야 하지만 이번 일도 있으니 3달러 정도 받겠습니다.”
3달러가 뉘 집 개 이름이냐?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데 그걸 내게 바보냐?
“신중히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럼 물건은 언제 보내주는 겁니까?”
“일단 손해 배상 금액을 보내주시면 가압류 소송을 바로 취하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우리가 일주일 안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합의서에 서명은 서류를 준비해야 하니까 내일 오전에 하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서로 일어나 악수를 하였다.
* * *
며칠 전에 코리아 오션에 작은아버지가 찾아왔고 그 이후로도 내가 전화를 하지 않았더니 다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는 연락을 방금 받았다.
언제까지 연락할까? 내가 계속 연락하지 않으면 지쳐서 그만하지 않을까? 진성 그룹 상태가 나아지면 모를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보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한번은 만나야겠지. 만나서 확실히 매듭짓자.
전화하려고 핸드폰을 드는데 벨이 울렸다.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에릭 슈밋입니다.)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요. 중국 측과 협상은 했어요?”
(네. 어제 협상했고 지금 방금 특허 침해로 인한 손해 배상금 1,25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
1,000만 달러만 받아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250만 달러 더 받게 되었네.
“수고했어요. 근데 협상을 어제 했는데 바로 합의를 했네요.”
(네. 그렇습니다. 협상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합의금은 일주일 안으로 보내준다고 합니다. 이번 일로 중국 회사가 제대로 정신을 차렸을 겁니다.)
“그건 모르지요.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거든요. 두고 봐야죠. 그리고 이번에 받을 합의금 일부를 한국에 있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투자하려고 하거든요.”
(인수하려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요. 대략 20~30% 지분을 확보하려고요.”
(알겠습니다. 얼마 보내드리면 되는 겁니까?)
“아직 협상하지 않았지만, 신생 회사라 큰 금액은 들지 않을 거예요. 대략 100만 달러면 될 것 같아요.”
(그런 작은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왜 인수하려는 겁니까? 그쪽에 관심이 있다면 미국에 있는 회사를 인수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에릭은 모르겠지만 나중에 한류 열풍이 전 세계적으로 불기에 미리 선점하려는 거지. 지분을 더 높일까?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유망한 사업이라는 것만 알아두세요.”
(그러면 차라리 인수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인수해도 큰 금액이 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매각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결정되면 연락 주십시오.)
“그럴게요.”
중국 덕분에 졸지에 공돈이 생겼네.
하려다가 만 전화를 하려고 핸드폰을 들었다.
(진동훈 회장입니다.)
작은아버지가 직접 받는 것을 보니 알려준 전화가 직통인가 보네.
“안녕하세요? 민재예요.”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재라고? 내가 전화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야 했어?)
“제가 바빴거든요.”
(욕봤다는 뉴스 봤다. 아직도 그런 놈들이 있다니 그래도 합의했다니 다행이다. 액땜했다고 생각해.)
아빠처럼 자상하게 날 생각하듯 말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대하든가? 너무 속 보이잖아요. 아니면 평소에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제는 되돌아가기에는 서로 먼 길을 왔거든요. 각자 가던 길을 갔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근데 저는 왜 찾으신 거예요?”
(남도 아니고 조카를 보겠다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겠어? 언제 시간 되냐? 집으로 와. 오랜만에 저녁 같이 먹게.)
언제 저녁을 같이 먹었는지 기억은 하고 말하나? 난 기억도 안 난다.
“말은 고맙지만, 그 집에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아요. 안 좋은 기억들이 많아서요. 이제 겨우 잊고 지내는데 그때 기억들이 다시 떠오를 것 같아서요. 제가 그 집을 떠날 때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한 약속 기억하세요? 또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저한테 한 말도요.”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야. 유학 가서 집 생각하지 말고 공부에만 전념하라는 의미로 말한 거야. 네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오해는 만나서 풀자. 집이 싫으면 회사로 올래?)
내가 국민학생인 줄 아나? 그런 뻔한 말로 나를 설득하게? 차라리 미안하다고 하지.
“알았어요. 모레 오전에 회사로 찾아갈게요.”
(알았다. 모레 보자.)
전화를 끊었다.
괜히 전화했나? 마음이 착잡하였다.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소나무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션의 진민재라고 하는데 대표님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잠시만요. 연결해 드릴게요.)
음악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바꿨습니다. 오현서입니다.)
“안녕하세요? 오션의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어쩐 일로 전화 주셨습니까?)
미나 때문에 나를 아는 것 같았다.
“소나무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자를 구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인정하니까 홍이나에게 들었다고 말해도 되겠지?
“홍이나와 소속사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들었습니다.”
(오션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인데 엔터테인먼트 사업에도 관심이 있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제가 찾아뵙고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저 사람이 찾아오는 것보다는 내가 가서 회사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제가 가겠습니다. 언제가 괜찮습니까?”
(수고스럽게 안 오셔도 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회사를 봐야 투자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그렇기는 합니다. 저는 언제든지 상관없으니 편한 시간에 오시면 됩니다.)
“그럼 내일 오전에 갈게요.”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네.”
* * *
다음 날 오전에 소나무 엔터테인먼트로 향하였다.
4층짜리 작은 건물이었고 1층에는 식당이 있었고 2층은 무슨 회사 같았고 3, 4층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3층으로 올라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은 5명 정도가 있었다.
젊은 남자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오현서 대표님 만나러 왔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감사합니다.”
직원을 따라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자 오현서 대표가 일어나 나를 맞아 주었다.
근데 전화 통화할 때 목소리가 굵다는 것을 느꼈지만 실물을 보니 턱수염과 구레나룻이 가득했고 덩치도 있어 사극에 나오는 무슨 산적을 보는 것 같았다.
순간 미나를 여기에 맡겨도 되나 싶었다. 홍이나도 마찬가지고.
내가 멈칫하는 것을 느꼈는지 쑥스럽게 웃으며 말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오현서입니다. 제가 생긴 게 이래서 종종 오해를 받습니다.”
“안녕하세요? 진민재입니다.”
“앉으시죠.”
“네.”
소파에 앉았다.
“홍이나에게 말은 들었지만, 진짜 배우 해도 인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혹시 배우 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미나가 아니라 홍이나가 내 이야기를 했다고?
“제안은 고맙지만 제 본업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진짜 아깝습니다. 정말 잠깐이라도 외도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조강지처가 최고잖아요.”
“혹시나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럴게요. 홍이나가 제 이야기를 했어요?”
“어제 고문님 전화 받고 홍이나에게 어떤 분인지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고문님 배우로 데뷔시키면 대박 날 거라고 하여 농담하는 줄 알았는데 실제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고문님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대어급입니다. 홍이나도 그렇게 봤으니 저한테 그런 말을 한 겁니다.”
난 투자하러 왔는데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었다. 홍이나가 나한테 그런 뜻을 한 번도 비추지 않았는데.
한번 배우 해 봐? 아니야.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지.
“다른 대어급을 찾는 게 더 빠를 겁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투자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회사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겁니까?”
“들어서 아시겠지만 2년도 안 된 신생 기업이고 제가 거의 20년 동안 매니저 하면서 모은 돈을 다 투자하여 만든 회사이지만 넉넉한 형편은 아닙니다. 자금이 충분해야 더 많은 신인을 뽑고 데뷔를 시킬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좀 벅찬 상황입니다. 투자를 받으려고 해도 엔터테인먼트가 사람들에게는 아직은 생소한 분야이고 IMF라 선뜻 투자하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그나마 홍이나가 7월에 오면 상황이 나아지겠지만 홍이나한테 참 고맙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톱스타이기에 그만큼 대우를 해 주어야 하는데 계약금도 제대로 주지 못합니다.”
계약금을 제대로 받지 않고 올 정도면 홍이나가 대표를 꽤 신뢰한다는 말이네. 생긴 거 답지 않게 믿을 만한 사람인가 보네.
원래 인상은 과학이 맞기는 하지만 항상 예외가 있기는 하지.
홍이나도 쉽지 않은 결정일 텐데 다시 보게 되었다.
“홍이나하고는 그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습니까?”
“제가 매니저 생활을 할 때 홍이나 데뷔를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다. 사정이 있어 같이 일하지는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기는 했지만, 사이가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홍이나와 친한 가수가 우리 회사 소속이기도 합니다.”
도움을 받았기에 이제는 도움을 주려는 마음인가? 보통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홍이나 인성은 제대로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