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전미정은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다가 일어나 남편이 있는 서재로 향하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남편이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인상을 썼다.
특별히 할 일도 없으면서 집에 오면 여기에 들어와 있는지 하나에서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서재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뭐해?”
“생각하고 있어.”
“뭘?”
“뭐긴 뭐겠어? 어떻게 하면 그룹에 닥친 위기를 벗어날까? 생각 중이었지.”
“민재하고는 통화해 봤어?”
“아니.”
“여태 뭐했는데? 생각할 시간에 전화라도 해야지.”
“매일 했어. 계속 자리에 없다고 해. 메모 남겨 놨다고 하는데 연락이 없네.”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였다.
“그걸 믿어?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민재가 확실한 해결책이야. 전화 안 받으면 찾아가서라도 만났어야지.”
“바로 찾아갈 수는 없잖아? 이번 주까지 기다리고 연락이 없으면 내일 월요일에 찾아가려고 했어.”
“보면 뭐라고 할 거야?”
“투자를 부탁해야지.”
“그렇게 생각이 없어? 오랜만에 보자마자 투자해 달라고 하면 얼씨구나 투자하겠어? 당신 같으면 투자할 마음이 생겨?”
“어떻게 하라고?”
“아무리 급해도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어. 다른 말 하지 말고 외국 생활하느라 고생 많았다고 다독여 주면서 집으로 저녁 식사 초대해. 식사하면서 그동안 쌓인 앙금을 먼저 풀어야 투자하고픔 마음이 생기지.”
“그럴 거면 당신이 만나지?”
전미정은 짜증이 났지만 속으로 삼켰다.
이런 일은 자기가 알아서 다 해야지 이런 기본적인 것도 다 알려 줘야 하는 남편을 보자니 답답하였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는 거야. 집으로 오게만 해. 그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았어.”
* * *
다음 날 월요일 회사에 출근한 진성 그룹 진동훈 회장은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코리아 오션으로 향하였다.
비서와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한 직원이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비서가 대신 대답하였다.
“우리 회장님이 진민재 고문을 만나러 왔습니다.”
“약속하고 오신 겁니까? 고문님은 회사에 거의 출근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출근하지 않으셨습니다. 약속하고 오시지 그랬습니까?”
“회장님이 진민재 고문의 작은아버지 되십니다. 연락할 수는 없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연락처를 모릅니다. 저쪽에 앉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대표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네.”
직원이 대표한테 가자 진동훈 회장은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가서 앉았다.
전화했을 때 민재가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다고 하여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인 것 같았다.
이놈은 왜 출근하지 않는 거야?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자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코리아 오션 염중섭 대표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진성 그룹 진동훈 회장입니다.”
“제 방으로 들어가시죠.”
“알겠습니다.”
대표실 소파에 둘이 앉았다.
“고문님께서는 회사에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미리 약속하고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헛걸음하게 하여 죄송합니다.”
“지금 연락하여 오라고 할 수는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지금 고문님이 하시는 일이 있어 바쁘십니다. 제가 오셨다고 말씀은 드리겠습니다.”
“회사에는 왜 출근하지 않는 겁니까?”
“방해받는 것을 싫어하셔서 따로 작업하는 곳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한다는 겁니까? 오션팟 관련된 일을 하는 겁니까?”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 작업하는 곳을 알려 주실 수는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그건 제 권한 밖입니다. 작은아버지한테 전화 왔다고 알려드렸더니 고문님께서 조만간에 연락하신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기다리시면 연락이 올 겁니다.”
진동훈은 여기 더 있어 봤자 얻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게 연락한다고 했다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민재한테 연락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리아 오션에서 나온 진동훈은 차를 타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비서에게 말하였다.
“김 비서는 여기서 대기하면서 진민재가 오는지 확인하고 만약에 오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알겠습니다.”
진동훈이 차를 타고 떠나자 비서는 건물 현관 옆에 있는 편의점 파라솔 의자에 앉아 현관을 바라보다가 자신은 진민재의 얼굴을 모른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어떡하지?’
* * *
중국 헝도 전자 리우지빈 이사는 월요일 아침 출근했지만, 좌불안석이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주말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마음고생만 하였다.
출근하자마자 호출한 영업부장이 급히 들어오자 다그치며 물었다.
“알아봤어?”
“네. 알아봤습니다.”
“왜 그런 거야?”
“이사님! MP3 플레이어의 원천 기술을 가지고 있는 회사가 한국의 중소기업이 아니라 미국 기업인 오션이었습니다.”
“뭐라고? 잘못 알아본 거 아니야? 분명 한국의 중소기업에서 개발했다고 했어.”
“한국의 중소기업인 디지털 카스트에서 개발한 것은 맞습니다. 다만 디지털 카스트에서 오션의 투자를 받아 개발했기에 서로 50%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작년에 오션이 디지털 카스트를 인수하여 오션이 100% 지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순간 한국 거래처 직원이 MP3 원천 기술을 개발한 회사가 자금 부족으로 투자를 받으려고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때 오션이 인수한 거였구나.
“오션은 뭐 하는 회사인데?”
“오션은 미국의 포털 사이트 회사로…….”
설명을 들은 리우지빈 이사는 이제야 이해가 갔다.
오션이 비록 인터넷 기업이기는 하지만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의 포털 사이트를 평정한 요즘 잘나가는 기업이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건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진행할 것을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오션은 그렇다 치고 로우스 인터내셔날에서는 정말 전량 폐기한다고 해?”
“알아보니까 폐기는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냥 겁주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 많은 것을 자기들 멋대로 폐기한다고? 말이 안 되지.”
“근데 이사님! 어렵게 로우스 인터내셔날 내부 인사에게 알아낸 사실인데 오션에서 이번 주에 우리 제품을 특허권 위반으로 미국 법원에 가압류를 신청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뭐? 그게 가능해?”
“현지 변호사에게 알아보니 특허권 위반한 것이 사실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합니다. 가압류를 신청한 후에 손해 배상 청구를 진행하는 것이 수순이라고 합니다.”
“그럼 우린 그 제품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
“특허권 침해 손해 배상 소송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최선의 방법은 소송하기 전에 직접 오션과 협상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팔린 제품도 적기에 실제 피해를 입은 것이 미미하기에 잘만 하면 적은 금액으로 합의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 소송해도 결과가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건 아니랍니다. 법원은 실제 판매한 것보다는 특허권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고 문제는 4,000만 달러치의 상품이 미국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소송은 불리하고 협상이 좋다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나는지 잠시 인상을 쓰다가 입을 열었다.
“오션도 그 사실을 잘 알 텐데 협상이 잘될까?”
“알기는 하겠지만 소송이 진행되면 시간도 오래 걸리기에 오션도 빨리 마무리 짓는 것이 좋을 거라고 합니다.”
“알았어. 계속 현지 상황 알아봐.”
“알겠습니다.”
영업부장이 나가자 자신도 사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일어났다.
사장실에 들어가자 사장의 심기가 매우 안 좋아 보여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장님! 알아봤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상황 설명을 자세히 하였다.
설명을 다 들은 사장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리가 너무 경솔했어. 자넨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그딴 식으로 일해?”
“죄송합니다. 먼저 일을 수습하고 그 이후에 책임지고 그만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만두면 다 해결되는 거야? 회사에 끼친 손해가 얼마인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오션과 협상하면 얼마 정도 배상해야 하나?”
“제 생각으로는 500만 달러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고개를 저었다.
“미국에 있는 우리 제품이 4,000만 달러야. 근데 500만 달러만 받고 끝낼까? 나 같으면 최소 2,000만 달러 이상은 받아낼 거야.”
“제가 미국으로 가서 최대한 적은 금액으로 협상해 보겠습니다.”
“만약 2,000만 달러 이상을 요구하게 된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실제 제조 원가는 그 정도는 아니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제가 판단하기로는 2,000만 달러가 넘지 않는다면 협상하여 돌려받는 것이 좋을 겁니다.”
“2,000만 달러 주고 받아와서 그걸 어떻게 처리하려고? 팔 곳이 있어? 유럽에서도 같은 꼴 당할 테니 못 팔고.”
“우리 중국 내에서 팔고 특허권을 중시하지 않는 국가에 팔면 됩니다.”
“그런 국가들은 못사는 국가들이라 고가의 MP3 플레이어를 누가 사겠어?”
“가격을 조금 낮추고 못사는 국가들이라도 부유층은 존재합니다. 그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면 됩니다. 일단은 협상해 보고 포기할지 말지를 결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알았어. 오션에 연락해 협상하자고 해.”
“알겠습니다.”
* * *
아침에 커피숍에 출근하자 홍이나가 안 보이니 평상시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합의한 이후 서로 간에 원만한 합의를 하였고 잘못을 반성하는 의미로 기부를 하겠다는 기사가 나간 이후로 홍이나의 활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전에도 홍이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기사를 서하연 기자가 작성하여 홍이나에 대한 비난이 많이 사그라지기는 했었다.
근데 왠지 허전한 기분은 뭐냐?
강성중이 주는 커피를 받으며 물었다.
“넌 요새 며칠째 허전한 느낌 안 드냐?”
“사장님도 그럽니까?”
“너도 그렇다고?”
“네. 홍이나가 없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홍이나가 커피숍에 영향을 많이 준 것 같습니다. 제가 즐겨 하던 게임도 흥미를 잃은 것 같습니다.”
하긴 요즘 강성중이 게임하는 시간이 많이 줄기는 했다.
홍이나가 커피숍에 와서 특별히 한 것은 없었다.
게임하고 가끔 조잘대고 한 것이 전부였는데 있을 때랑 없을 때랑 차이가 크게 났다. 신기하네.
나보다는 강성중이 홍이나랑 더 많이 붙어 있어서 더 허전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시간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사장님! 홍이나가 놀러 올까요?”
“온다고 했으니 오겠지. 다만 그게 언제일지는 나도 모르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상철이도 그런 것 같지?”
“네. 제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홍이나가 상철이 형이 무뚝뚝하게 대해도 애교를 부리며 게임에 관해 자주 물어보곤 했잖습니까? 말은 안 하지만 상철이 형도 홍이나가 꽤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신상철도 홍이나가 간 뒤로 힘이 없는 것 같아 물어본 거였다. 내 예상이 맞았네.
오래 같이 있었던 미나도 신상철하고는 별로 말을 하지 않는데 홍이나는 보자마자 말을 걸고 애교부리고 그랬으니 신상철에게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홍이나가 커피숍 남자들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고 떠났다.
“너 상철이 앞에서 홍이나 이야기하지 마.”
“알겠습니다.”
핸드폰이 울려 받았다.
“진민재입니다.”
(고문님! 에릭 슈밋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