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나갔던 담당자가 무척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어떻게 됐나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확인해 보니 원래 오전 10시가 맞지만, 갑자기 녹음 기계에 문제가 생겨 뒤로 미루어지게 된 겁니다.”
“그럼 미리 연락이라도 주셨어야죠.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금세 문제 해결할 줄 알았는데 좀 시간이 걸리나 봅니다. 죄송하지만 가셨다가 다시 오셨으면 합니다. 그동안 문제없도록 해 놓겠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지 못한 잘못도 있지만, 기계가 문제라는데 어쩔 수 없지. 근데 6시간 동안 뭐하나?
커피숍 갔다가 다시 와야 하나?
“알았어요. 4시에 다시 올 테니 문제없도록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미나도 내심 실망한 눈치였다.
“미나야! 어쩔 수 없네. 다시 오자.”
“네.”
미나와 배상도와 나와 복도를 걸어가는데 미나가 소리쳤다.
“사장님! 저기 가수 홍이나예요.”
앞에 보니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남자와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홍이나는 요즘 잘나가는 미녀 솔로 가수였다. 커피숍에서도 홍이나의 노래를 자주 틀어 나도 알고 있었다.
실제 연예인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신기하였다. 이왕이면 선글라스를 벗은 얼굴을 보고 싶은데.
“그러네.”
“저 연예인 처음 봐요.”
“나도 그래.”
“사인받을 수 있을까요?”
“민폐지. 본 것으로 만족하고 그냥 가자.”
“네.”
서로가 지나치며 걸어가는데 홍이나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을 왜 그따위로 하는 건데. 갑자기 녹음하라고 하면 내가 해야 해?”
“스케줄이 그렇게 됐어. 오늘 하지 않으면 시간 없어. 안 된다는 거 힘들게 겨우 녹음 스케줄 잡은 거야. 그러니까 얼른 끝내자.”
“다음부터는 이따위로 하지 마. 안 할 거니까.”
“알았어.”
홍이나도 녹음하러 오는 것 같은데 순간 이상하여 걷다가 멈추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기계에 문제가 있다는데 어떻게 녹음하려는 거지?
저들도 우리처럼 모르고 온 건가? 순간 안 된다는 거 힘들게 겨우 녹음 스케줄 잡았다는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우리 대신 홍이나 먼저 녹음하게 하려는 건가?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사장님! 어디 가세요?”
“잠시만.”
배상도와 미나도 내 뒤를 따라왔다.
홍이나와 남자가 녹음실로 들어갔다. 만약 기계에 문제가 있다면 바로 나올 것이고 아니라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문 앞에서 10분을 기다렸지만 나오지 않았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였다. 순간 짜증이 몰려와 문을 벌컥 열고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홍이나는 녹음 부스 안에서 헤드폰을 끼고 있었고 남자는 밖에 있었다. 담당자는 나를 보고서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신 거 아니었습니까?”
“가다가 이상해서 다시 왔습니다. 지금 무슨 상황이죠?”
담당자가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계에 문제가 있다면서 저 여자는 왜 저 안에 있는 거죠? 설마 우리 대신 저 여자가 껴 들어온 건가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죄송한 짓을 하지 말아야죠. 기계에 문제가 없는 것을 보니 우리 먼저 해야겠어요. 저 여자 당장 나오라고 하세요.”
담당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가만히 있자 매니저로 보이는 자가 나섰다.
“지금 누구보다 저 여자라고 하는 거야? 누구 마음대로 나오라 말라야? 너 누구야?”
그 말을 무시하고 난 부스 문을 열고 소리쳤다.
“당장 나오세요.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새치기나 하고. 스타면 스타답게 행동하세요.”
“야! 너 뭐 하는 거야?”
매니저가 나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배상도가 드디어 자기 할 일을 찾은 것처럼 잽싸게 매니저의 팔을 잡고 뒤로 꺾어 제압하였다.
사실 내가 막 행동한 것은 배상도가 있기에 믿고 한 거였다. 경호원을 고용한 덕을 보는 순간이었다.
녹음 부스 안에 있던 홍이나가 바깥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헤드폰을 벗고 얼른 밖으로 나오더니 매니저를 째려보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일 좀 제대로 해. 이게 무슨 창피야?”
한마디 하고서는 밖으로 나갔다.
“이나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배상도에 제압당해 움직이지 못하자 소리쳤다.
“이거 안 놔.”
배상도가 나를 보자 내가 고개를 끄덕였고 배상도가 놓아주었다.
“너희들 내가 가만둘 줄 알아? 잘못 건드렸어.”
삼류 영화 속의 양아치처럼 대사 한마디 하고서는 급하게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홍이나! 이나야!”
어쩔 줄 몰라 하는 담당자 앞으로 갔다.
“이게 뭐하자는 거죠? 기계에 문제가 있다면서요?”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미안해하며 사죄하는 것을 보니 인성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저 담당자도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였겠지.
담당자에게 뭐라고 해 봤자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화풀이밖에 안 되었다. 따지려면 책임자에게 따져야지.
“책임자 오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지 담당자가 얼른 나갔다.
“미나야! 이렇게 돼서 어떻게 하냐?”
“전 괜찮아요. 근데 이런 상황인데 녹음할 수 있을까요?”
지금 녹음할 수 있다고 해도 이런 곳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녹음실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곳에서 하면 된다.
“여기서 하고 싶어?”
“아뇨.”
“나도 그래.”
“저는 사장님 하자는 대로 따를게요.”
배상도를 바라보았다.
“잘했어요.”
“아닙니다,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발생하면 과감하게 하세요. 뒷일은 제가 무조건 책임질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40대 중반의 남자와 담당자가 들어왔다.
난 당연히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지금 남의 회사에서 왜 행패를 부리는 겁니까?”
이런 황당한 경우는 난생처음이었다.
“네? 뭐라고요? 이게 행패로 보이나요? 당신들이야말로 지금 뭐하자는 거죠? 10시에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새치기하여 그것도 거짓말로 고객과의 약속을 깨고서는 행패라고 하는 건가요? 먼저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요?”
“상황에 따라 좀 늦어질 수도 있고 급한 사람부터 먼저 양보해 줄 수 있는 융통성도 없는 겁니까?”
“약속은 왜 하나요?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겁니다. 그런 급한 사정이 있다면 먼저 우리에게 말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사람 헛수고하게 하고 거짓말을 하고서는 무슨 융통성을 논하는 건가요? 기본적인 상식도 없나요?”
“상식이 있는 사람이 상식 없게 행동합니까? 남의 회사에서 왜 영업을 방해합니까?”
세상에는 상대할 사람과 상대하지 못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지금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이 무얼 잘못한지도 모르고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있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내고 있었다.
“누가 영업을 방해했는지 모르겠네요. 그쪽에서 우리 영업을 방해한 거예요. 아세요? 오늘 녹음하기로 한 광고 송 녹음 못 해 피해를 본 게 우리라고요. 아세요? 어떻게 하실 건데요?”
남자가 얼굴이 벌게진 채 한마디 하려고 하자 담당자가 막았다.
“부장님! 제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부장님은 나가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부장이라는 사람이 나가자 담당자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부장님도 진심은 아닙니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 따르지 못해 화가 나서 그러는 겁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직원은 그래도 제대로 되었네.
“책임 소재는 나중에 묻기로 하고 우린 가 볼게요.”
“지금이라도 녹음하시면 됩니다. 준비는 다 해 놓았습니다.”
“그럴 기분이 들까요? 갈게요.”
* * *
키아이 엔터테인먼트 박철기 매니저는 홍이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회사에 도착하여 바로 이기현 이사에게 향하였다.
이기현 이사의 지시를 수행하지 못해 몸을 잔뜩 움츠리고 들어가자 바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음 못 했다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보니 KG 음향에서 이미 연락을 받은 것 같았다. 어떻게 보고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잘되었다 싶었다.
“네. 어떤 미친놈이 난장판을 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할 거야? 모레 발표할 뮤직비디오 티저 영상에 들어갈 곡인데 녹음을 못 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난장판을 치든 말든 녹음은 하고 왔어야지 그냥 오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설득했는데도 홍이나가 오늘은 도저히 녹음할 기분이 아니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가 다시 이야기해 놓았으니 내일 오전에는 가서 꼭 녹음해야 해. 안 하면 큰일이야. 오늘 했어도 편집할 시간이 부족한데 이게 뭐야?”
“홍이나가 하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겨우 데리고 간 건데 그 사달이 났으니까요.”
“살살 잘 구슬려야지.”
“알겠습니다. 내일은 꼭 녹음하겠습니다.”
“어떤 놈들이야?”
“처음 보는 얼굴이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KG 음향에서는 오션 놈들이라고 하던데 들어봤어? 난 처음 들어. 신생 회사 같은데.”
“오션이 엔터테인먼트 회사라고 합니까?”
“녹음하러 온 것을 보면 그러지 않을까?”
“엔터테인먼트 회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션은 포털 사이트 이름이기는 합니다. 미국 기업이면서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사이트입니다.”
“그래? 아닐 거야. 이름만 같은 거겠지. 포털 사이트에서 왜 녹음을 하겠어? 내가 이놈들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감히 키아이 하는 일에 난장판을 쳐? 반드시 이 바닥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매장하고 말 거야. 오션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
“알겠습니다.”
* * *
커피숍으로 돌아와 테이블에 앉자 강성중도 따라 앉아 눈치 없게 굴었다.
“미나야! 녹음 잘하고 왔어?”
“아니! 못했어.”
“왜?”
“일이 있었어.”
“무슨 일?”
미나가 내 눈치를 보며 작게 설명을 하였다.
“그게…….”
설명을 다 들은 강성중이 펄쩍 뛰었다.
“뭐라고? 홍이나가 그랬다고?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 톱스타면 톱스타답게 행동해야지 그런 양아치 같은 짓을 하다니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 욕이라도 실컷 했을 텐데.”
“아니야. 홍이나는 녹음하러 오는 걸 싫어했는데 회사에서 강제로 시킨 것 같아. 그렇죠? 사장님!”
복도에서 들은 말로는 그런 것 같았다.
“맞아.”
강성중이 물었다.
“사장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대로 잠자코 있을 겁니까?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호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놈들이 더 그러는 겁니다.”
나도 이런 황당한 경우가 처음이라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자존심 상하고 성중이 말대로 호구처럼 당하는 것 같아 싫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언론에 알리시죠. 연예인이라 이 사실이 알려지면 치명적일 겁니다. 절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나보다 강성중이 더 열 받아 하냐? 근데 홍이나는 잘못이 없는데 언론에 알리는 것은 홍이나를 저격하는 거라 찜찜하였다.
“홍이나는 잘못이 없는데.”
“홍이나라는 실명을 쓰지 말고 기자들이 잘하는 가수 A양의 소속사인 키아이 엔터테인먼트에서 갑질을 했다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될 것 같았다. 키아이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이 많으니까 누군지는 모를 것 같았다.
키아이는 그렇게 하면 되고 KG 음향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계약 위반을 근거로 손해 배상을 받아야 하나?
근데 대금이 그리 크지 않아 타격은 별로일 것 같은데.
“알았어. 생각해 볼게.”
황정화 사장에게 정확한 금액을 알아보는 게 순서일 것 같아 핸드폰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