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오빠!”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황규희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은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만 입고 있어 청순한 여대생 그 모습 자체였다. 그전에 커피숍에 왔을 때는 연예인처럼 화려하게 입고 왔었는데.
무슨 팔색조도 아니고 때때마다 변신하냐? 황규희가 어떤 여자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모습이 더 보기는 좋았다.
“왔어?”
“많이 기다렸지?”
10분 늦은 것 같고.
“아니. 어디 갈까?”
“오빠 밥 언제 먹었어?”
“1시에.”
“그럼 출출할 때가 됐겠네. 우리 간단하게 뭐 먹으러 가자.”
“그래.”
황규희를 따라간 곳이 어느 분식집이었다.
떡볶이와 순대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평범한 여대생 모습이었고 이런 소박한 면이 있다니 진짜 황규희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비싼 것만 먹고 명품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서 살짝 호감이 들기는 하였다.
황규희를 보자 서영이가 생각났다. 연락해서 만나야 하는데.
“맛있어?”
“응. 학교 다닐 때 친구들하고 여기 자주 오거든. 지금은 방학이라 오빠랑 온 거고. 오빠도 먹어.”
“알았어.”
포크로 떡볶이를 찍어 먹었다. 먹을 만하네.
“맛있지?”
“그러네.”
여기서 어르신에 관해 물어볼 수는 없기에 나도 먹는 데만 집중하였다.
다 먹었는지 포크를 내려놓았다.
“잘 먹었다.”
“그렇게 맛있어?”
“응. 난 이 집이 제일 맛있어. 졸업하면 여기 자주 못 오는데.”
“졸업하더라도 오면 되지.”
“가끔 그래야 할 것 같아. 나가서 입가심하러 가자. 근처에 내가 자주 가는 커피숍이 있거든.”
“알았어.”
근처 작은 커피숍에서 황규희는 커피를 나는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이곳도 개인이 하는 커피숍이라 작고 아담하였다.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 여자들이 좋아할 만하였다.
빨대로 한 모금 마신 황규희가 입을 열었다.
“원래는 오빠랑 영화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오빠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아 다음으로 미뤘어. 이제 궁금한 거 물어봐.”
막상 물어보라고 하니 묻기가 그랬다.
“어르신 의중이 알고 싶어.”
“할아버지가 가로챌까 봐 걱정돼?”
“난 우리 할아버지가 이룩한 진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싶어.”
“그러면서 왜 그때 할아버지한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어? 할아버지 도움받으면 일이 더 수월할 텐데.”
“이건 내 일이니까. 나 혼자 할 수 있으니까.”
“2년 후에나 가능하다며? 2년이면 긴 시간이야. 그 안에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는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나 같았으면 든든한 보험 하나는 들었을 거야.”
“내가 도움을 청했다면 어르신이 아무 이유 없이 보험을 들어줄까? 한 번은 도움을 주신다고 해도 이건 규모가 커서 들어주기 힘들었을 거야. 아마 보험료가 더 많이 들 거야. 난 지금 보험료를 지급할 형편이 안 되거든.”
“맞는 말이야. 내가 할아버지 옆에서 일을 배우다 보니까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을 잘 알겠더라.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주는 것이 세상의 이치 같아. 오빠가 하나를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주면 되거든.”
“지금 당장 내가 줄 게 없으니 그게 문제지.”
“지금이 아니더라도 미래 가치가 있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잘 생각해 봐. 오빠가 가지고 있는 패 중에 할아버지가 혹할 만한 것이 있는지.”
어르신이 혹할 만한 패가 없기도 하고 있다고 해도 그걸 주고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2년만 기다리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안타깝게도 없네.”
황규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정도로 말했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 박사님의 연구 자료에 대해 말을 해야지 없다고 하면 어떡해?
말할 생각이 전혀 없는 건지? 그게 좋은 패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건지? 그렇다고 자기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연구 자료를 찾는다는 확신이 없기에 선뜻 말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었다. 불확실한 것으로 협상할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2년 후에는 왜 가능한지라도 말하든가?
분명 뭔가 믿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자신은 진 박사님 연구 자료보다 그게 더 뭔지 궁금하였다.
“진성 어페럴과 리조트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
“내가 궁금한 게 그거야. 어르신의 의중을 모르겠어.”
“오빠 천재라면서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봐.”
이제는 천재라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았다. 진짜 천재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난 천재가 아니라서 부담되었다.
“어르신이 하는 일을 봐서는 계속 소유할 것 같지는 않아. 사모 펀드를 이용한 것을 보면 나중에 매각할 생각이겠지.”
“오빠한테 매각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심 그게 아닐까?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머리 아프고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날 위해 그런 수고를 한다는 게 조금 이상하기는 하였다. 할아버지를 생각해서 그런 거라면 조금 이해는 가겠지만.
“아니라는 뉘앙스 같네?”
“할아버지를 제대로 봤네. 내가 조언하나 해 주자면 할아버지는 인정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아. 특히 돈 앞에서는. 지금까지 그렇게 했기에 오늘날의 할아버지가 있는 거야. 할아버지를 너무 믿고 있지 말라는 말이야. 물론 오빠 할아버지에 대한 의리 때문에 한 번은 도와주실 거야. 하지만 큰 도움은 아닐 거야.”
“내가 그만큼 이득을 주어야 나에게 넘기겠다는 말이네.”
“그렇지. 할아버지는 이익을 많이 주는 쪽을 선택할 거야.”
결국은 지금보다 2년 후에 비싸게 인수해야 한다는 말인가? 만약 2년 후에 매각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럴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한다. 머리 아프네. 가만히 놔두어도 되는데 왜 어르신은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크게 돈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날 위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어르신이 다른 쪽을 선택하면 우린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될 수도 있겠네?”
“굳이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해. 나도 할아버지도 오빠에게는 아직 호감이 있으니까.”
아직 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의미인가?
“무서운 말이네.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로 들려.”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면 걱정할 일은 없어. 정확히는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이 맞겠지.”
어르신에게 일을 배운다고 하더니 벌써 사채업자가 다 되었네. 실실 웃으며 말하는 황규희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누가 청순한 여대생처럼 보이는 황규희가 사채업자 뺨친다고 하면 믿을까?
“이득이라면 다른 괜찮은 기업들도 많을 텐데 굳이 진성 어페럴과 리조트를 선택한 이유가 뭐야? 꼭 이득만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 같은데.”
“내가 15살 때인가? 할아버지 따라 낚시를 간 적이 있었어. 그때 할아버지가 작은 고기를 낚았는데 그걸 다시 미끼로 사용하는 거야. 난 그대로 놔주거나 갖고 갈 줄 알았거든. 그래서 그냥 놔주지 왜 미끼로 사용하냐고 물어봤어. 할아버지가 그러더라. 작은 물고기로 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그렇듯 진성 어페럴과 리조트는 더 큰 물고기를 잡을 미끼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진성 어페럴과 리조트로 무슨 더 큰 물고기를 잡겠다고. 설마 진성 전부를 노린다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진성은 나에게나 중요하지 다른 사람에게는 맛없는 고만고만한 물고기였다.
뭘 원하는 거야? 오션과도 연관시킬 게 없는데. 설마 나 개인을? 이것도 아니다. 사람 인연을 두 기업으로 엮을 수도 없고 무리였다.
어르신이 그걸 모르지는 않을 거다.
“난 모르겠네. 어르신이 무엇을 낚으려고 하는지?”
“모르면 두고 보면 알겠지. 지금은 나도 확신할 수 없으니까. 어쩌면 보험으로 끝날 수도 있으니까.”
점점 아리송하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인수하면 바로 매각할 수는 없을 테고 흑자로 만들어야 하니 당분간은 소유할 것 같았고 나에게 우선권이 있을 것 같았다.
* * *
집으로 돌아온 황규희는 서재로 향하였다.
손녀가 들어오자 신문을 보던 황규천이 보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다녀왔어요.”
“왜 이리 늦게 와?”
“할아버지는? 데이트하다 보면 늦을 수 있는 거예요.”
“그놈이 뭐라고 해?”
“할아버지 의도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흑기사로 생각하겠지. 꼭 이렇게 복잡하게 해야 해? 내가 하던 방식이 아니라서 마음에 안 들어.”
“걱정하지 마세요. 손해는 안 볼 테니까요.”
“손해가 중요한 게 아니야. 같은 돈을 들이더라도 수익률은 천차만별이야. 더 높은 수익률을 얻어야 그게 남는 장사지.”
“모험이잖아요. 손해 보지 않는 모험이요.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어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안기부에서 건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이러다 꽝이 될 것 같아.”
“꽝이면 어때요? 솔직히 저는 별 기대는 하지 않아요. 13년 전에도 못 찾았는데 지금 찾는 것은 더 힘들 거예요.”
“그러면서 왜 이러는 건데?”
“흑기사가 되어 주는 것도 좋잖아요. 제가 보기에 진민재는 앞으로 크게 될 인물이에요. 그런 자에게 신세 하나 지우는 것도 남는 장사예요. 나중에 다 돌려받게 되어 있어요. 멀리 보고 하는 거니까 할아버지는 지켜만 보세요.”
“알았다. 가서 쉬어.”
“네.”
* * *
오늘도 출근하여 커피를 마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세요? 고문님! 이주희예요.)
“안녕하세요?”
(미국 오션과 통화했는데 라니지와 서머위즈 워 베타 버전을 잠정적으로 9월 1일에 오픈하기로 했어요. 그전까지 서머위즈 워 테스트 끝날 수 있는지 확인차 전화했어요.)
원래는 8월 10일에 라니지 베타 버전을 공개하기로 했는데 서머위즈 워가 개발 완료하는 바람에 같이 공개하려고 날짜가 뒤로 미루어졌다.
“잠시만요.”
(네.)
“상철아!”
테스트하던 신상철이 내가 부르자 뒤를 돌아보았다.
“왜?”
“9월 1일에 서비스 시작한다고 하는데 8월 25일까지 테스트 다 끝낼 수 있어?”
“응. 충분해.”
“알았어. 가능하다고 하네요. 그대로 진행하면 될 거예요.”
(알았어요. 오픈 일은 9월 1일로 픽스할게요.)
“언어 패치 작업은 잘되고 있어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일본어 이미 작업 끝났어요.)
“벌써요?”
(글자가 많지 않아 금세 끝났어요.)
하긴 글자는 많지 않으니까.
“알았어요. 그대로 준비해 주시고요.”
(네.)
전화를 끊자 강성중이 물었다.
“9월 1일부터 정식으로 서비스 시작하는 겁니까?”
“그래.”
“기대됩니다.”
“네가 보기에 인기 끌 것 같아?”
“네. 제가 테스트를 해 본 결과 분명 인기를 끌 겁니다.”
“어느 게 더 인기를 끌 것 같은데?”
내 질문에 신상철을 슬쩍 보고서 대답하였다.
“둘 다 백중세가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라니지가 더 인기를 끌 것이다.
이미 검증된 게임이니까. 강성중도 그렇게 느꼈지만, 신상철이 있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거였다.
그래도 서머위즈 워도 꽤 재미있다는 것 같아 어느 정도 인기를 끌 것이다. 뚜껑을 열어보면 알겠지.
근데 나중에 서머위즈 워가 출시되고 게임 캐릭터에 아이노 자신의 얼굴이 나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물론 미리 허락을 받았지만, 실제 캐릭터는 보지 못하였다. 출시하면 직접 보라고 하였다.
캐릭터라 실제 사진처럼 똑같지는 않지만 아이노를 아는 사람이라면 단숨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