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그냥 멍하니 하루 종일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결국은 배상도의 컴퓨터도 한 대 설치하여 게임 테스트를 하라고 하였다.
셋이서 앉아 게임을 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다 컴퓨터 한 대에서 시작하여 4대가 되었을까? 이제 더 늘어나지는 않겠지.
작은 커피숍에 컴퓨터가 4대나 되니 커피숍이 아니라 PC방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미나도 어이가 없는지 셋이 게임 하는 것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책을 보았다.
문이 열리며 진성 리조트 홍창호 사장이 들어왔다. 웬일이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 일이세요?”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앉으세요.”
“네.”
자리에 앉았다. 내부를 둘러보더니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여기가 소위 말하는 컴퓨터 카페입니까?”
“아니에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네요.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급한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정미나가 커피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배상도가 합류하면서 결국은 정미나도 내가 오션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커피숍 망할 걱정을 하지 않게 되어 이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커피를 준다.
물론 자신에게만 말하지 않았다고 잠시 시달리기는 했지만.
“커피 드세요.”
“감사합니다.”
커피 컵을 들어 마시는 홍창호 사장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한 모금 마시고는 커피 컵을 내려놓았다.
“그게 뭐냐면…….”
설명을 들었다.
이전 생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내가 황규천 어르신을 찾아가는 바람에 바뀌게 되었다.
괜히 찾아갔나? 이게 나한테 더 좋은 결과가 될지 아닐지 판단이 안 되었다.
“황규천 어르신이 갑자기 왜 그랬을까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줄까요?”
“황규천 어르신의 의중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현재 30%의 지분이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 무리가 없습니다. 다른 주주들도 진성의 상황을 잘 알고 있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어 이미 마음이 떠난 상태입니다. 차라리 진성에서 독립하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할 겁니다. 다만 대표 이사 해임안이 없는 것을 보면 경영권을 확보하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진성에서 가만히 있을까요?”
“진성에서 보유한 진성 리조트의 지분이 8%입니다. 분리를 부결하려면 다른 주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힘듭니다.”
“지분이 그것밖에 안 돼요?”
“네. 그렇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31%였지만 지분을 지속적으로 황규천 주주에게 매각하여 현재 상황이 된 겁니다. 정확히는 매각이 아니라 담보로 돈을 빌려 그렇게 된 것이지만요. 진성에서 가장 알짜 기업이 진성 리조트뿐이라 진성 리조트의 지분을 담보로만 잡은 겁니다. 그렇기에 진성 리조트는 진작에 독립해도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작은아버지는 뭔 짓을 한 거야?
왜 알짜 기업인 진성 리조트 지분을 담보로 돈을 빌리고 빌렸으면 갚아야지 갚지를 못해 지분을 넘기다니 제정신인가?
또 빌린 돈은 다 어디 갔고? 가슴이 답답하였다.
문제는 어르신이 무슨 의도인지가 중요한데.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다시 찾아가야 하나?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 만난 날 고분고분하게 처신할걸.
“진성 리조트 입장에서는 좋기는 하지만 저한테는 좋을지 모르겠네요.”
“도련님이 황규천 주주와 만나 보고 그 의중을 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죠. 근데 진성 어페럴 인수하겠다는 곳이 나타났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건 제가 자세히 모르지만, DS 자산운용사에서 조성한 사모 펀드라고 합니다.”
이게 우연일까? 난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사모 펀드에서 노리기에는 진성 어페럴은 먹음직한 먹잇감은 절대 아니었다. 지금 IMF라 먹음직한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진성 어페럴이라니?
냄새가 진하게 났다. 아무래도 이 건도 황규천 어르신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사모 펀드의 주인이 아무래도 황규천 어르신일 것 같아요.”
“저도 좀 이상하기는 했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진성에서는 매각한다고 하나요?”
“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기회가 없기에 적극적인 것 같습니다.”
“진성에서는 진성 어페럴이 법정 관리를 가는 게 더 좋지 않나요?”
“진성 건설은 몰라도 진성 어페럴은 법정 관리를 신청해도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낮은 편입니다. 그렇기에 부도난 후에 파산할 가능성이 크기에 조금이라도 받고 매각하는 것이 더 좋을 겁니다.”
내 계획이 하나씩 어긋나는 기분이었다. 노카아 주식을 지금 팔면 이런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지금 팔면 헐값이라 아쉽네.
“임시 주총은 언제쯤 할 건가요?”
“15일 후부터 20일 사이에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변동 사항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네.”
홍창호 사장이 가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가만히 지켜보아야 하나?
어르신을 찾아가야 하나?
아니야! 바로 찾아가면 내가 아쉽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어르신의 의도가 뭔지도 모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데.
황규희에게 연락하면 무슨 말이라도 듣지 않을까? 일단 전화부터 해 보자.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여러 번 울리다가 숨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 민재야. 뭐 하고 있었어?”
(민재 오빠. 운동하다가 받았어.)
“집 아니야?”
(집이야. 비디오 보면서 에어로빅했거든. 근데 나한테 전화도 주고 웬일이야?)
물어봐야 하나? 물어보면 알려나?
“규희야! 어르신이 진성 리조트 임시 주총 요구했다고 하던데 들었어?”
(아! 그거 나도 들었어.)
“왜 그런지 알아?”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대로 가만두면 진성과 같이 침몰할 수도 있으니까. 리조트라도 살려야지.)
그런데 이전 생에서는 왜 지금처럼 안 그랬을까? 그랬다면 리조트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고 계속 지분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전에 팔았겠지.
“다른 뜻은 없는 거야?”
(글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그건 오빠 하기 나름이 아닐까?)
뭐야?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
“그게 무슨 말이야?”
(나중에 말해줄게.)
“그럼 진성 어페럴 인수도 어르신이 한 거야?”
(알았네? 맞아.)
“그건 왜?”
(그것도 나중에 말해 줄게.)
“언제?”
(오빠 언제 시간 돼?)
만나야 말해 주겠다는 건가? 그럼 만나야겠지.
“언제든지.”
(그럼 모레 보자. 내가 시간하고 장소는 문자로 보낼게.)
“알았어.”
통화로 인수도 어르신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모레 만나면 자세히 알 수 있을 테니 신경 쓰지 말자.
* * *
전화를 끊은 황규희는 바로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DS 신동환입니다.)
“저 규희예요.”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어음 업체들 연락은 했어요?”
(네. 어제 바로 했습니다.)
“뭐라고 해요? 할인해서 팔겠다고 하나요?”
(네. 그렇습니다. 연락하니 대부분 반가워하며 무조건 팔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일 만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업체는 진성 어페럴 인수 제안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는지 내일 약속을 취소한 곳도 있습니다.)
황규희의 미간이 순간 일그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진성에서 벌써 정보가 새 나갔네요.”
(그렇습니다. 진성 측에 인수 제안을 비밀로 하라도 했는데도 그 모양입니다. 그러니 진성이 그런 상황이 된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진성과 언제 만나기로 한 거죠?”
(이번 주 금요일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럼 약속은 무기한 연기하세요. 어음 다 인수하기 전에는 만날 필요는 없어요.”
(알겠습니다.)
* * *
진성 그룹 진동훈 회장은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진성 리조트 대주주인 황규천 주주가 계열사 분리 임시주주 총회를 요청했다는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빨리 대응해야 합니다.”
대주주인 황규천은 자신도 잘 안다.
기업을 대상으로 사채업을 하는 큰손이며 아버지의 친한 고향 동생이었다. 아버지의 소개로 알게 되었고 돈이 급할 때 신세를 여러 번 지기는 하였다.
돈이 필요해 진성 리조트 주식을 팔아 융통했었는데 이런 결과로 다가올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우군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 같았다. 역시 인정사정없는 사채꾼이었다.
대응해야 하지만 진성 리조트 지분이 고작 8%라 가진 패가 없다는 게 문제다.
“대응 방법은 있어?”
“다른 대주주들을 설득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대주주 지분 현황이 어떻게 되지?”
“우리에게 우호적인 대주주는 곽민철 외 3인이 4.3%이며 글로벌 에이가 3%이며 신영 증권이 2.3%입니다.”
“그래 봤자 다 합쳐도 10%도 안 돼. 상대는 30%야.”
“자사주도 1%가량 있습니다.”
“자사주는 분리를 원할 거라 우리 편이 아니야. 그렇다고 소액 주주들이 주총에 참여하여 우리 편을 들지도 않을 테고. 방법이 없어. 방법이.”
“그렇다고 이대로 분리를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나마 그룹에서 진성 리조트가 제일 우량한 기업입니다. 이대로 분리하게 되면 큰 손실입니다.”
자신도 잘 안다. 하지만 해결한 방법이 없는데. 자본이 많다면 시장에서 지분을 확보하겠는데 그렇게도 못하고.
한 가지 방법은 자신이 황규천을 찾아가 협상하는 거지만 이미 마음을 결정했기에 되돌리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대로 보내야 하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때 인터폰이 울리자 비서실장이 버튼을 눌렀다.
“왜?”
(진성 어페럴 김성한 사장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회장을 바라보자 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결해.”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들어 회장에게 건넸다.
“나야!”
(회장님! 조금 전에 DS 자산운용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번 주 금요일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했습니다.)
“왜?”
(자신들의 인수 제안 정보가 샜다고 합니다.)
순간 큰소리를 질렀다.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 무슨 정보가 샜다는 거야?”
(저도 지금 황당합니다. 무슨 정보가 샜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보가 샜다는 것은 핑계이고 아무래도 인수 가격을 더 낮추려는 수작 같습니다.)
“더 낮출 게 어디 있다고? 아무리 사모 펀드라고 하지만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이익도 좋지만, 상도가 있어야지.”
(그러게 말입니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 만나겠다는 말은 없었어?”
(무기한 연기라고 합니다.)
“마음이 변한 게 아닌가?”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인수 제안하기 전에 충분히 검토하고 인수를 결정했기에 단시간에 마음을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다시 한번 연락해 보겠습니다.)
“알았어. 연락해서 의중이 뭔지 정확히 알아봐.”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비서실장이 물었다.
“진성 어페럴 인수 제안을 철회한다고 합니까?”
“아직 몰라. 협상을 무기한 연기했다고 하네.”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무슨 꿍꿍이속인지 모르겠어.”
어제는 기대하지도 않던 진성 어페럴 인수 제안이 들어와 기분이 좋았는데 하루아침 사이에 안 좋은 소식이 두 개가 들어오자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사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