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배 대리님은 효자인가 보네요.”
“효자라기보다는 요즘 같은 시기에 아들이 양복 입고 번듯한 직장에 더구나 외국계 기업에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부모님은 전부 좋아하실 겁니다. 부모님이 보시기에 아들이 분식집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백배 더 좋아하는 것은 당연할 겁니다.”
그렇기는 하지. 순간 난 효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효도할 부모님이 안 계시는데 ‘효자이다’, ‘아니다’라고 할 수도 없지. 엄마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고 보니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네.
같은 분당이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엄마를 보러 갈 수도 있었는데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피했던 것 같았다.
바보. 엄마 때문에 분당에 자리 잡았으면서 용기가 나지 않아 피하기만 하다니. 조만간에 한번 가 볼까?
“형제는 어떻게 되나요?”
“남동생과 누나가 있습니다. 누나는 결혼했고 동생은 대학 다니고 있습니다.”
“동생도 있고 누나도 있고 부럽네요.”
말로는 하지 못했지만 속으로 ‘부모님도요’라고 말하였다.
“고문님은 혼자십니까?”
“네. 혼자예요.”
현도 사옥에 도착하여 주차하고 회장실로 올라갔다.
회장 비서실 안으로 들어가자 이아름 비서가 나를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아름 비서가 없었다면 여기 오는 재미도 없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네. 근데 오늘은 두 분이시네요.”
“제 비서이거든요. 여기 있어도 되죠?”
“물론이에요. 저쪽에 앉아 계시면 돼요.”
“고마워요.”
“회장님 기다리세요, 들어가 보세요.”
“네.”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비서실 소파에 앉은 배상도는 놀랐다.
처음 면접을 커피숍으로 가라고 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도착해 보니 역시나 자신보다 어린 자가 면접을 보았다.
뭔가 이상하고 꺼림칙했지만 군대 선배가 소개해 준 자리라 일단 다녀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만둘 생각으로 면접을 보았다.
자신이 입사하는 회사가 오션이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외국 기업이라 다른 기업보다 급여도 높았고 발전 가능성이 큰 회사라 마음에 들었다.
근데 출근하고 나서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커피숍에서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고문과 다른 사람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하는데 좋은 사무실 놔두고 왜 여기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구나 커피숍 알바생은 게임만 하고 있었다. 하여튼 이상하고 신기한 직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모처럼 만에 할 일이 생겨 운전하고 현도 그룹에 왔는데 고문이 만나는 상대가 대한민국 재계 1위인 현도 그룹 회장이라는 것을 알고 꽤 놀랐다.
거래처 부장 정도 만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고문이 거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회사에 꼭 붙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오늘 집에 가서 자신은 아니지만, 현도 장주용 회장을 만나러 현도 그룹에 왔었다고 말하면 부모님이 아주 좋아할 것 같았다.
* * *
“어서 와.”
“안녕하셨어요?”
“앉아.”
“네.”
소파에 앉아 오늘은 왜 불렀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실 오라고 해도 오지 않아도 되는데 이상하게도 장 회장을 보면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정에 약했던가? 아니었는데. 점점 내가 변하는 것 같았다.
“소식 들었지?”
“네? 어떤 소식이요?”
“이번에 방북해서 금강산 관광 합의했다는 소식 말이야.”
“네. 뉴스 보았어요. 축하드려요.”
“근데 다음 달에 다시 방북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할 생각인데 북에서 지정한 관광 구역 근처에 정말 군사 기지가 있더라고. 지금은 적자라 문을 닫은 베트남 소유의 해금강 호텔이 있어서 그걸 인수할까 생각 중인데 자네가 한 말도 있고 해서 군부대 이전을 요구했는데 난색을 보이더라. 내가 생각하더라도 군부대 이전이 보통 일은 아니잖아.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러는데 굳이 그래야 할까? 관광객들 관리만 잘하면 되지 않을까? 자네 생각은 어떨 것 같아?”
관리만 잘하면 되기는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고 자신도 모르게 할 수도 있었다.
피격 사건 이전에도 관광객들이 군사 구역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들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 거고, 사람이 하는 일이라 모든 일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어요. 문제가 될 만한 것은 미리 제거하는 것이 좋아요.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그날로 금강산 관광은 끝이에요. 투자한 돈 그냥 날리고 싶으세요? 저라면 그런 문제를 미리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 투자하지 않을 거예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세요. 굳이 불섶 옆에 있을 필요는 없죠.”
장 회장은 고민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오직 금강산 관광만 성사시키려고 했었는데 이놈 말을 듣고부터는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 호텔을 사용하지 않으면 관광객들의 숙소 문제를 해결하기가 힘들어.”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세요? 북에서 군부대를 이전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관광지나 숙소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 돼요.”
“어디로?”
“그건 저도 모르죠. 조금 떨어지더라도 관광객들이 묵을 만한 다른 숙소가 있는지 알아봐야 하고 없다면 남한 쪽 숙소를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해 보시면 좋아요. 고성 근처에 숙소가 많으니 그곳에 묵었다가 아침 일찍 출발하여 저녁 늦게 돌아오는 방안도 있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이었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자신은 숙소를 꼭 북한에 있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남한 쪽 숙소를 이용하라고?”
“어쩔 수 없잖아요. 한동안은 그렇게 운영하면서 대안을 마련해야겠죠. 북쪽에 호텔을 건설하든가, 다른 숙소를 찾든가 해야죠. 제 생각에는 호텔을 새로 짓는 것보다는 북의 다른 숙소를 활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자신은 북에 갔다 온 이후로 이 문제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골머리를 썩였는데 이놈은 어떻게 모든 게 쉬워?
이놈을 북에 데리고 가 협상하면 좋을 것 같은데.
자신 주변에는 인재는 많은데 왜 이런 놈이 없을까? 하나같이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내 눈치만 보고 있으니 답답하였다.
“알았어. 자네 나랑 같이 북에 갈 생각은 없는가?”
“제가 거길 왜 가요?”
“자네가 금강산 관광에 투자하면 되지 않아? 원래 투자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자네가 한다면 투자받아 줄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네.
“지난번에도 말했잖아요. 저는 투자할 자본도 없고 생각도 없어요. 제 사업하고는 업종이 전혀 달라요. 나중에 관광객으로 한번 가 볼게요.”
“왜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려고 해? 다른 기업들은 서로 투자하려고 난리인데. 꼭 금강산 관광 사업뿐만 아니라 이번 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다른 사업에도 진출할 수 있어.”
“말씀은 고마우나 전 전혀 생각이 없어요. 투자하겠다는 다른 기업 투자받으시던가요.”
포기하기에는 아깝지만, 이놈을 설득할 만한 것이 없었다. 평안 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진 박사 연구 자료 건은 소식 들은 거 있어?”
그렇지 않아도 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안기부 직원이 왔다가 간지 시간이 좀 지났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쉽지는 않겠지.
“없어요. 회장님은 들으셨어요?”
“나도 들은 거 없어. 잘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네.”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려 봐야죠.”
* * *
아파트 현관 앞에 있다가 내가 나오자 배상도 대리가 인사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이네요. 가시죠.”
“네.”
경호원은 집 앞부터 경호를 시작한다고 하여 아침에 배상도 대리가 집 앞까지 와서 기다렸다가 같이 출근한다.
퇴근도 마찬가지고.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자 오늘따라 신상철이 상기된 표정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 게임 개발 끝냈어.”
“정말? 언제 끝난 거야?”
“방금.”
“수고했네.”
“너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야. 고마워.”
“네가 노력한 결과야. 게임 이름도 정해야 하지 않아?”
“이미 정했어.”
“뭐로?”
“서머위즈 워야. 어떤 것 같아?”
“괜찮은데. 라니지와 같이 런칭하려면 테스트 빨리해야겠네.”
“일정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개발 도중 성중이가 틈틈이 테스트해 주었거든.”
하긴 성중이가 서머위즈 워의 일등 공신이기는 하지. 캐릭터 디자인부터 시나리오, 테스트까지 진짜 열심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보너스까지 주었으니까.
“성중이한테 한턱내야겠다.”
“응. 오늘 점심 내가 살게.”
“좋지. 이 대표한테 연락은 했어? 좋아할 텐데.”
“네가 해 줘.”
“아니지. 이건 네가 해야지. 찾아가기 부담되면 전화로 하면 돼.”
연락하기 싫은 표정이었지만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 * *
한참 오션팟 OS 개발하고 있는데 강성중이 다가왔다.
“사장님! 바쁘세요?”
“왜?”
“혹시 제 알바 후임 구했어요?”
“아니, 8월까지는 다닐 거잖아.”
“저 계속 알바했으면 해서요.”
“9월에 복학하지 않아?”
“아뇨. 1년 더 휴학하려고요. 일찍 졸업해도 경기가 좋지 않고 취업하기도 힘들다고 하고 집에서도 제 학비가 부담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학비는 알바해서 제가 벌게요.”
나도 강성중이 더 하면 좋기는 하였다. 넌 졸업하면 취업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스카우트할 거니까.
미리 말해 주면 나태해져서 안 된다. 졸업할 때쯤에 말해야지.
“그렇게 해.”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맙지.”
프로그램 개발하다가 시계를 보니 벌써 1시가 되었다. 신상철이 처음으로 밥 산다는데 밥 먹으러 가야지.
근데 어딜 갈까? 한 번도 가지 않았는데 배 대리 때문에 엄마 생각이 났으니 생각난 김에 엄마 남편 식당에 갈까?
“밥 먹으러 가자.”
강성중이 제일 신나 하였다.
“가시죠. 오늘은 상철이 형이 사는 건데 특별한 거 먹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당연하지. 오늘은 새로운 곳에 가보자.”
“비싼 곳입니까?”
“따라와.”
“네.”
식당 안으로 들어와 앉아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고급 식당은 아니지만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메뉴판을 보니 다른 곳보다는 조금 비싼 편이었다.
손님들도 3분의 2 정도 차 있어 웬만큼 장사가 잘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없나 보네. 아직 일하지 않나? 자식이 큰 후에는 식당에 나와 카운터를 본다고 했었는데 카운터에 아무도 없었다.
“사장님! 뭐 드시겠습니까?”
“난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성중이 너 먹고 싶은 거 주문해. 오늘은 상철이가 너 사 주려고 온 거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넉넉히 주문하겠습니다.”
대답하고서는 신상철을 바라보았다.
“상철이 형! 많이 시켜도 돼요?”
“그래. 많이 먹어.”
“알겠습니다.”
크게 대답하고서는 직원을 불렀다.
“여기요.”
* * *
식사하면서 강성중이 감탄하였다.
“여기 음식이 깔끔하고 맛이 있습니다. 분당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가격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나중에 부모님하고 같이 와야겠습니다.”
신상철도 배상도도 맛있는지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맛있었다. 자주 와야겠네. 진작 와 볼걸.
맛있게 배불리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상철이 카운터에서 계산하는데 그곳에 그리운 얼굴이 미소 지으면 서 있었다. 엄마였다.
언제 오셨지? 식사하느라 오신 줄 몰랐다.
“맛있게 드셨어요?”
“네.”
신상철이 짧게 대답했지만 강성중이 옆에서 거들었다.
“오늘 처음 왔는데 음식이 아주 맛있었습니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앞으로 자주 오세요.”
“알겠습니다.”
난 그 옆에 서서 엄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엄마가 나를 보았지만, 시선을 바로 돌리는 것을 보니 나를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어렸을 때 날 보고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더구나 내가 아빠를 닮았다면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난 엄마를 닮았으니 못 알아보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래도 핏줄이라면 뭔가 당기는 것이 있지 않았을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건가? 날 못 알아보는 엄마가 괜히 밉고 원망스러웠다.
엄마가 민재야! 하며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기를 나도 모르게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상상이었고 현실은 아니었다.
그런 나는 이렇게 엄마 가까운 곳에 있었으면서 이제야 찾아오고서는 내가 뭘 바라는 것일까?
그래도 엄마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것을 보니 행복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이면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이게 무슨 이중적인 기분이냐?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이 근처에서 일하시나 봐요.”
“네. 근처에 있는 커피숍 식구들입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예쁘장한 여자가 들어왔다.
“서희 왔어?”
“응. 엄마!”
딸인가 보네. 예전에 아파트 앞에서 봤을 때는 꼬맹이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컸냐? 가만! 내 동생이잖아.
이름이 서희라고? 이름도 예쁘네.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