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나도 간절한 희망 사항이었다.
“저도 그래요. 그리고 오늘 점심같이 할래요? 제가 살게요.”
(검사가 얻어먹으면 안 돼요.)
“대가성이 없잖아요. 제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요.”
(어떤 거요?)
“법률적인 것이에요. 물어볼 사람이 검사님밖에 없더라고요.”
(호호호. 그게 대가성이죠. 점심은 제가 살게요.)
“아니에요. 젊은 청춘 남녀가 데이트한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아요?”
(지금 데이트 신청하시는 거예요?)
데이트 말을 들으니 대학 다닐 때 유아영과 데이트했던 것이 떠올랐다.
유아영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감자탕을 매우 좋아해 자주 먹으러 갔었는데. 그때가 그립네. 다시 오지 않을 추억인데.
오지 않으면 다시 만들면 되지 않을까?
“감자탕 데이트 어떠세요?”
(제가 감자탕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감자탕 좋아하거든요.”
(알았어요. 일단 오세요.)
“가서 연락할게요.”
(네.)
점심시간 맞추려면 지금 나가야 할 것 같아 일어났다.
* * *
동부지검에 도착하여 전화하고 유아영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찰은 처음 와 보는 건데 사람들이 꽤 많이 들락거렸다. 다들 무슨 일로 오는 건가? 올 일이 그렇게 많나?
사람들 구경하는데 유아영이 나오고 있었다. 손을 들어 흔들었다. 남들이 보면 연인이라고 생각하겠다.
유아영이 내 앞에 왔다.
“많이 기다렸죠?”
“아니에요. 배고픈데 가시죠.”
“네. 여기 근처에 감자탕 잘하는 곳이 있거든요. 거기로 가요.”
“네.”
걸어가는데 남자 3명이 유아영에게 말을 건넸다.
“유검! 애인이야?”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유검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는데. 좋을 때야. 맛있게 식사해.”
“네.”
“누구예요?”
“선배들이에요.”
그릇을 싹싹 비운 유아영이 배를 쓰다듬으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 먹었다.”
“감자탕이 그렇게 맛있어요?”
“네. 선배들하고 가끔 오기는 하는데 오늘같이 맛있지는 않았어요. 음식 맛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와 같이 먹는 가도 음식 맛이 좌우되나 봐요.”
“제가 자주 와야겠네요.”
“그냥 해 본 소리예요. 뭘 묻고 싶은 건데요?”
“만약에 안기부에서 아빠 자료를 찾게 되면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 건가요? 그게 궁금해서요.”
“법률적으로만 따지면 진민재 씨가 박사님 아들이라도 연구 자료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진 박사님은 정부와 대기업의 지원을 받은 연구소에서 일했기에 원칙적으로는 연구소 소유가 맞아요.”
그러면 찾아도 내가 좋은 것은 하나도 없고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네.
“정말이에요?”
“네. 진 박사님의 연구 자료는 개인 소유가 아니잖아요. 개인 소유라면 다를 수가 있지만, 가능성은 희박하죠. 다만…….”
뭔가 방법이 있나 보네.
“다만 뭐요?”
“진 박사님이 연구 자료를 누가 찾느냐에 따라 소유권이 달라질 수는 있어요.”
“제가 찾아도 연구소 소유가 되는 게 아닌가요?”
“원칙적으로는 맞아요. 그런데 그 연구 자료가 진 박사님이 연구했던 자료라는 증거는 없잖아요. 진민재 씨가 연구 자료를 찾고서 다른 누군가에게 매입했다거나 다른 연구소에서 연구한 자료라 주장하면 연구소에서는 그걸 증명할 길이 없다는 말이죠. 그걸 증명해야만 연구소의 소유권을 인정받을 텐데 연구소에서는 진 박사님의 연구 자료가 하나도 없으니 증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이에요. 심증은 확실히 있으나 물적 증거가 없는 거죠. 향후 법률적으로 다투면 논란이 많이 될 거예요. 더구나 진민재 씨는 미국 국적이라 한국에서 강하게 소유권을 주장하기에 부담이 가고 미국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정부와 협상하여 공동 소유로 하는 것이 깔끔할 거예요.”
“만약에 안기부에서 찾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그것도 좀 복잡해요. 안기부에서 찾게 되면 진민재 씨가 소유권을 주장하기가 힘들겠지만, 미국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워낙 민감한 기술이라 제가 생각해도 미국에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렇기에 제가 판단하기에는 진민재 씨가 연구 자료를 찾아 한국 정부와 서로 만족할 만한 협상을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 같아요.”
“찾아도 문제네요.”
“그렇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찾는 것이 더 급선무죠. 찾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찾은 이후에는 서로 협상하면 될 거예요. 법적으로 따지면 기간도 길어지고 한미 간의 마찰도 있을 거예요. 워낙 민감한 기술이잖아요.”
결국은 내가 찾는 것이 가장 좋다는 거네. 그렇다고 내가 할 일을 다 제쳐두고 보물찾기에 전념할 수도 없고.
“그렇군요. 고마워요.”
“도움이 되었나 모르겠네요.”
“도움이 많이 됐어요.”
* * *
오늘은 진성 리조트 홍창호 사장이 마련한 진성 그룹 옛 임원들과 현직 임원들을 만나는 날이라 서울에 있는 한 식당에 왔다.
작은 식당이었고 우리가 오후 4시까지 전세를 내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모인 인원은 홍 사장 포함해서 10명이었고 3명은 현직에 있고 나머지 7명은 그만둔 임원들이었다.
내가 할아버지 장손자라는 것을 알리자 다들 반갑게 맞아 주었다.
“도련님을 만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 줄 모릅니다. 진성은 진작에 도련님이 물려받아야 했었는데 능력도 없는 자가 물려받아 진성이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진성은 적장자가 물려받아야 하는 겁니다. 도련님이 진규촌 회장님의 적장자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장자가 중요하나? 차남이라도 능력 있는 자가 물려받아도 되는데 작은아버지는 무능력하면서 욕심만 있었다.
능력이 없어도 현명하기만 해도 되는데.
“진동훈 회장은 뭐 하는 사람인 줄 모르겠습니다. 그룹을 살리려고 하는 건지 그룹을 망하게 하려는 건지 하는 것을 보면 울화통이 다 생깁니다.”
“맞아요. 전미정 감사는 또 뭡니까? 집에서 내조만 잘하면 되지 기업 경영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그룹을 주무르려고 하니 진성이 제대로 가겠습니까?”
다들 한이 맺혔는지 한동안 성토의 장이 이어졌다.
그동안 어디 가서 답답한 마음 하소연도 못 하다가 자리가 마련되고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모이자 답답한 마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이럴 때 하지 언제 하겠어?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았다.
홍창호 사장이 준 자료를 보니 회사에서 쫓겨난 후에 다른 기업에 취업한 경우는 단 한 명뿐이었고 그것도 중소기업이었다.
나머지 6명 중의 2명은 아파트 경비 일을 하고 있었고 4명은 집에서 놀고 있었다. 그래도 대기업 임원까지 했던 분들인데.
그런 분들이 지금 한두 분일까? IMF 시기라 많을 것이다.
할 만큼 했는지 성토가 잦아들자 내가 입을 열었다.
“제가 너무 늦게 여러분들을 찾은 것 같습니다. 먼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제라도 저희들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가 진성을 찾을 겁니다. 다만 준비 기간이 필요하기에 본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2년 후부터가 될 겁니다. 앞으로 2년 후라 여러분들이 기다리기에는 긴 시간이 될 수 있어 죄송할 뿐입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있는 겁니까? 찾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절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자본도 충분히 있어야 합니다. 자본이 없다면 시작하나 마나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세히 말씀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진성을 찾을 자본은 충분합니다. 그러니 자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 진성을 찾는 데 여러분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합니다. 저와 함께 진성을 찾아 다시 예전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우리들도 도련님과 함께할 겁니다. 열심히 돕겠습니다.”
“당연합니다. 진규촌 회장님을 생각해서라도 성심성의껏 도련님을 도울 겁니다. 뭐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한동안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황규천은 손녀 황규희와 명동에 있는 동신 금융 사장실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있던 유한성 사장이 벌떡 일어나 구십 도로 허리를 꺾어 큰소리로 인사하였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황규천이 인사를 무시하며 소파에 앉았다.
“앉아.”
“네.”
유한성이 재빨리 소파에 앉았다.
“그게 사실이라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확실해?”
“네. 그렇습니다. 진짜 힘들게 얻은 정보입니다.”
“자세히 이야기해 봐.”
“진민재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한국 행적은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진민재가 미국이나 핀란드에 있었을 때는 사실상 조사하기가 힘듭니다. 혹시나 안기부에는 자료가 있지 않을까? 하여 안기부 구영서 국장을 만나 부탁을 하였더니 진민재를 아는 눈치라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장이 진민재를 알고 있다는 것은 뭔가 있구나! 라는 생각에 끈질기게 매달려 절대 비밀을 지킨다는 약속을 하고 진짜 어렵게 알아낸 정보입니다. 저도 들으면서 그런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무척 놀랐습니다.”
“이 사실 누가 또 알고 있어?”
“저밖에 모릅니다.”
“어디 가서 헛소리하지 마.”
“물론입니다.”
황규천은 유한성 사장이 보내온 보고서를 보고 너무 놀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사무실에 나왔다.
안기부에서 나온 정보라 틀림없는 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놈이 그토록 자신했던 게 이거였나? 충분히 자신할 만한 건이기는 했다. 그래서 당장은 아니고 2년 정도 기다렸다가 행동하겠다고 한 거였다.
그동안 진상규 박사의 연구 자료를 찾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건 엄청난 큰 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물로 가는 자동차라니? 정확히는 수소이지만 수소가 물에서 나오니까 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능성은 있는 일이라고 해?”
“네. 그렇습니다. 저도 듣고서는 너무 믿기지 않고 궁금해서 바로 전문가에게 물어봤더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현도 자동차에서도 2년 전부터 수소 자동차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이게 개발되면 자동차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 분야에 끼치는 영향이 아주 크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초대박이라고 합니다. 그걸 85년도에 연구했다니 진짜 그걸 개발한 박사는 천재가 맞는 것 같습니다.”
황규천은 욕심이 강하게 났다.
돈은 누구보다 많고 기업들 회장이나 사장들이 자신에게 와 고개를 조아리며 회장님이라고 부르지만, 자신은 엄연한 사채업자지 기업인은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만약 저 기술을 가진다면 천하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안기부가 개입한 것이기에 자신이 욕심 낼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그놈을 통해서라면 일말의 가능성은 있었다.
조금이라도 한발 걸치면 지금보다 위상은 올라갈 것이며 아들과 손녀에게 떳떳한 자리를 물려줄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놈이 정답인데. 그놈이 하는 행동을 보아서는 자신에게 손을 절대 벌리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알았어. 진행 상황 안기부를 통해 계속 알아보고.”
“알겠습니다.”
“잠시만 나가 있어 봐.”
“네.”
유한성이 나가자 황규천은 손녀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해요. 그 기술의 값어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거예요. 다만 찾아야 값어치가 있는 거죠. 찾지 못하면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렇기는 하지만 안기부에서 나섰으니 찾지 않을까? 그러니 그놈도 자신하고 있는 거겠지.”
“근데 조금 이해가 가지는 않아요.”
“뭐가?”
“그 연구 자료는 13년 전에 사라졌고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지금 찾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게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아요. 확률상으로는 지극히 낮거든요. 낮은 확률로 자신한다는 것은 도박과 마찬가지인데 제가 그날 본 진민재는 도박 같은 확률에 승부 거는 모습이 아니라 매우 확신하는 모습이었어요. 뭔가 자꾸 괴리감이 느껴져요.”
“다른 게 있다는 말이야?”
“그건 저도 몰라요. 진민재 상황을 보면 다른 게 있을 게 전혀 없거든요. 저도 헷갈리고 궁금해요.”
“그놈이 궁금하다는 말이야?”
“할아버지! 잘생기고 머리 똑똑하고 능력 있는 남자를 싫어할 여자는 없을 거예요. 관심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예요.”
“그래서 결론이 뭔데? 남자로서 관심이 있다는 거야?”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두고 봐야죠. 묘하게 흥미를 끄는 구석이 있어요. 앞을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