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이제 왔어?”
오전에 안 왔다고 그러는 건가? 오늘 오라고 했지 오전에 오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오늘 중으로 오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들어? 여태 뭐하다가 이제야 나를 찾아왔냐는 거야?”
도움받을 일이 없으니까 그랬지. 그것도 홍창호 사장을 만나서 연락한 거지, 아니었으면 연락도 하지 않았을 거다.
“할아버지께서 도움받을 일이 있을 때 찾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도움받을 일이 없다 보니 늦게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진성의 소식은 알아?”
“네. 압니다.”
“그런데도 도움받을 일이 없었다고?”
“진작에 도움을 요청했으면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는 겁니까?”
“없지. 네놈이 해결해야지 내가 왜 해?”
그러면서 왜 늦게 연락했다고 뭐라고 하는 건데? 그래서 요점이 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결국은 제가 일찍 연락했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보고만 있겠다는 거야?”
“그건 제 일입니다.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오늘 어르신을 찾아뵌 것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사차 들른 겁니다. 그러니 다른 말씀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알아서 어떻게 할 건데? 네놈이 능력이나 있어?”
“어르신은 모르겠지만 저 능력 아주 많습니다.”
“그 알량한 오션으로? 회사 자본이 얼마나 있다고 지금 큰소리치는 거야? 그럴 형편은 아닌 것 같은데.”
내 정체도 아는 거야? 하긴 기업을 상대로 사채업을 하려면 남들보다 정보가 빨라야겠지. 근데 내가 노카아 주식을 가지고 있다는 건 모르나 보네.
알기는 힘들겠지. 근데 왜 보자마자 시비야? 한 번쯤 반격해 볼까?
“생각보다 저를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작은 도움은 몰라도 어르신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놈이 말하는 것 좀 봐?”
기운이 아직도 정정하시네. 오래 사시겠다.
보통은 친한 사람의 손자가 찾아오면 반갑게 맞아 주는 것이 기본인데 보자마자 시비를 거는 것을 보면 나를 시험하는 것이거나 날 상대로 기 싸움을 하자는 것 같았다.
그럴 이유가 있나? 이럴 때 주눅 드는 것보다는 더 세게 치고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 기업을 주로 상대한다고 아는데 그런 정보력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말이라도 다 말이 아니야. 지금 내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건가?”
괜히 왔나? 내가 왜 처음 보는 사람하고 아무 이유 없이 이래야 하지? 이득도 없는 이런 신경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한테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그만하시든가 제가 못마땅하다면 그냥 가겠습니다. 저는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갈까요?”
내 말이 먹혔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태연하게 물컵을 들어 물을 마시고 얼음까지 깨물어 먹었다.
황규천은 능청스럽게 앉아 있는 놈을 보면서 속으로 놀랐다.
자신은 6·25 때 빈손으로 월남하여 밑바닥부터 거친 생활을 하며 사채업을 시작했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그때부터는 기업을 대상으로만 사채업을 하였다.
그동안 못 볼 거 다 보며 거친 자들 속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기에 뿜어나오는 기세가 사나워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본인들도 모르게 위축하며 겁을 먹었다.
그런데 저놈은 겁을 먹기는커녕 아무렇지 않았고 자신을 향해 도발까지 하고 있었다. 배포가 큰 건가?
자신의 친한 동향 진규촌 형님이 살아생전에 손자 자랑을 하여 어떤 놈인가? 시험해 보았는데 생각 이상이었다.
크게 될 놈인가? 그러니 그룹의 도움을 받지 않고 홀로서기를 하고 있겠지.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흥미가 생겼다.
근데 저놈이 뭘 가지고 자신감이 가득하지?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더 있나? 그게 뭐지?
조사한 바로는 한국에서 다른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오션이 전부나 마찬가지라 허세이거나 정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미간이 일그러졌다.
“내 도움이 정말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진성을 찾을 생각이 없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제가 찾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제 일입니다. 제힘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 건데?”
“진성 그룹의 계열사를 하나씩 인수할 겁니다.”
“뭐라고? 계열사를 하나씩 인수하겠다고? 자본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닐 텐데.”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계획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준비 기간을 가지고 2년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인수를 시작할 겁니다. 그때 어르신께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렇게 자신하는 것을 보면 결코 허세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뭔가가 있다는 건데. 기업을 인수하려면 자본이 꽤 많이 필요한데 자본을 어디서 조달한다는 거지?
저놈을 다시 한번 철저히 조사하라고 시켜야겠다.
“정말 내 도움이 필요 없다는 거야?”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그때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켜보겠어.”
“그러십시오. 오늘은 인사차 들른 것이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다음에 또 보고 싶지 않았다.
“안녕히 계십시오.”
인사하고 얼른 나왔다.
* * *
진민재가 나가자 황규천은 옆에서 가만히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자신의 손녀를 인자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규희야!”
“네.”
“저놈 어떤 것 같으냐?”
“한눈에 반할 정도로 잘생겼어요.”
한눈에 반하기는,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자신은 별로였다. 남자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얼굴 보고 사는 건 아니야.”
“흥미로운 자 같아요.”
“네가 보기에 허세 같냐? 자신감 같냐?”
“제가 보기에는 자신감 같아요. 허세를 부리는 자는 허세를 숨기기 위해 겉으로 일부러 자신감을 계속 내비쳐 상대방에게 믿게 하려고 하는 데 저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어요. 믿든 말든 상대방을 전혀 개의치 않고 알아서 하라는 그런 모습이었어요. 그렇다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말일 거예요.”
자신도 그렇게 느꼈다. 자신을 설득하기보다는 괘씸하게도 귀찮아하는 모습이었다. 형님 말이 맞은 거였나?
형님이 살아생전에 자신의 손녀를 보고 저놈 며느릿감으로 생각해 인연을 맺어 주자고 했지만, 자신이 가장 애지중지 귀하게 여기는 손녀이고 아직 어려서 거절하였는데 지금은 약간 후회가 들었다.
직접 보니 형님 말보다 더 크게 될 놈 같았다. 잘못 생각했나?
“잘 봤다. 저놈이 가지고 있는 패가 무엇일 것 같냐?”
“저도 저자의 자료를 보았지만,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아마도 미국이나 핀란드에 있지 않을까? 해요.”
“그쪽을 알아봐야겠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미국하고 핀란드라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제대로 알아내지 못할 가능성도 커요. 차라리 직접 물어보시는 것이 더 빠를 거예요.”
“대답해 줄까?”
“쉽지는 않겠지만 그게 가장 확실할 거예요.”
오늘 하는 것을 보니 물어본다고 대답해 줄 놈이 아닌 것 같았다.
“네가 해 보겠냐?”
“아직은 제가 나설 차례는 아닌 것 같아요. 좀 더 지켜보고 결정할게요.”
“알았다.”
서재로 들어온 황규천은 전화기를 들었다.
(동신 금융 유한성입니다.)
“나야.”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그놈 자료 조사 빠진 게 있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다시 조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
(알겠습니다.)
* * *
“사장님!”
강성중이 날 부르는 소리에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주문대 앞에 웬 남자가 서 있었다. 저 사람인가 보네. 누구지? 그 남자가 나를 보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안기부 손석진 팀장입니다.”
안기부라고? 장 회장이 대통령에게 말했나 보네. 근데 이번 정권에서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바뀌지 않나? 아직 안 바꾼 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앉으시죠.”
“네.”
옆 테이블에 앉았다.
“여기 커피숍을 직접 운영하시는 겁니까?”
묻는 표정이 왜 쓸데없는 일을 하냐는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네. 작업실이기도 합니다. 근데 안기부에서 저는 왜 찾아오신 겁니까?”
“진상규 박사님 건을 안기부에서 다시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드님인 진민재 씨의 도움을 받고자 온 겁니다.”
“제가 아는 것이 없어서 도움을 줄 게 없습니다.”
내 대답을 괘의치 않게 넘기고는 바로 질문을 하였다.
“먼저 미국에 박사님의 연구 자료가 없는 것이 확실한 겁니까? 있다면 헛수고하는 일이 될 것이라 매우 중요합니다.”
“그건 확실해요. 미국도 찾고 있었고 저한테 아빠의 연구 자료를 물어봤거든요.”
“자세히 설명 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92년도에 핀란드로 유학을 갔었는데 그때 거기서…….”
상황 설명을 하였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손석진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면 미국에 없는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진 박사님의 연구 자료는 아직도 한국에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혹시 알고 계신 것이 있다면 뭐든지 좋으니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아는 것은 별로 없고…….”
검찰에서도 조사한 것과 휴게소 공중전화 등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이야기하였다.
“검찰에서는 얻은 결과물이 있다고 합니까?”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조사를 중단했겠죠. 자세한 것은 검찰에 물어보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흘렀는데 아빠의 연구 자료를 찾을 수 있을까요?”
“제가 반드시 찾겠습니다.”
의욕만 앞세운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정보기관인 안기부에서 다시 조사하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검찰보다는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았다.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혹시라도 기억나거나 하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그럴게요.”
안기부 손석진 팀장이 가자 핸드폰을 들었다.
(유아영 검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저 진민재입니다.”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살다 보면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한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척도가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서 내가 누군가에 연락했을 때 상대방이 반갑게 맞아 주느냐? 시큰둥하게 맞아 주느냐? 따라 가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걸 보면 난 그래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웬일로 전화 주셨어요?)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진민재 씨는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다름이 아니오라 조금 전에 안기부에서 사람이 다녀갔는데 안기부에서 아빠의 일을 다시 조사할 예정인가 봐요. 그래서 유 검사님이 조사했던 내용까지 이야기해서 연락 갈지 몰라서 알려드리려고 전화했어요.”
(안기부에서 진 박사님 건을 다시 조사한다고요? 그걸 어떻게 알고요?)
“저도 자세한 것은 몰라요.”
(와! 잘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조사를 그만두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거든요.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었어요. 안기부에서 조사한다니 꼭 진 박사님의 연구 자료를 찾았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