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회장님과 사장이 진행하는 거라 힘드오. 또 조만간에 성진 건설과 매각 협상을 할 것이오.”
“성진 건설은 곧 인수를 포기할 겁니다.”
“그게 정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이번 매각이 무산된다면 앞으로 회장과 진성 건설 사장이 매각하려고 해도 인수할 기업을 찾기가 힘들 겁니다. 그럼 전무님은 매각보다는 법정 관리를 신청하여 회생하자는 쪽으로 내부 여론을 조성하면서 강하게 주장하시면 됩니다. 그리 어려운 주문은 아닐 겁니다.”
운동수 전무는 자신의 비리 자료를 가지고 이상한 요구를 하는 젊은 청년이 누군지 정체가 궁금하였고 그렇게 해서 무슨 이득이 생기는지 궁금하였다.
성진 건설은 진성 건설과 오랫동안 라이벌 회사로 이름도 진성, 성진 서로 바꾸면 같은 이름이 된다.
그렇기에 성진 건설이 진성 건설을 인수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해 쉽게 포기하지 않을 텐데 성진 건설을 압박하여 인수를 포기하게 할 정도라면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그쪽이 얻는 것이 무엇이오?”
“2년 뒤에 내가 진성 건설을 인수할 겁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성 건설이 대단한 회사도 아니고 진성 건설보다 더 좋은 회사도 널리고 널렸는데 인수하고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또 인수하려면 지금 하지 왜 2년 뒤야? 저자는 왜 진성 건설을 인수하려는 거지?
“진성 건설을 왜 인수하려는 겁니까? 건설 회사를 인수하려면 더 나은 회사들이 많이 있소. 굳이 왜?”
“제가 누군지 궁금하시죠?”
“그렇소.”
“제가 진민재입니다.”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기억나지 않았다.
“진민재? 그게 누구요?”
“제가 진규촌 회장님 장손자입니다.”
꽤 놀라는 표정이었다.
“정말이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할아버지가 한평생 일구신 진성 건설이 없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인수하여 진성 건설을 더욱 성장시킬 겁니다. 이제 제가 왜 진성 건설을 인수하려는지 아시겠습니까?”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인수하려면 자금이 많이 필요할 텐데 자금은 충분하신 겁니까?”
갑자기 말투가 바뀌었다.
“자금은 2년 후면 해결됩니다. 그래서 법정 관리로 시간을 벌고자 하는 겁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진규촌 회장님을 생각하면 제가 그러면 안 되는데 차남 진동훈이 회장이 되면서 회사가 점점 기울다 보니 제 살길을 찾고자 해서 안 되는 욕심을 부렸습니다.”
저 말이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믿고 싶었다. 마음이 착잡하였다.
“사람이 해도 될 일과 해서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잘못을 인정한다면 다시 바로 잡을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 기회조차 놓치면 어떤 것으로도 변명할 수 없을 겁니다. 지켜보겠습니다.”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다시 바로 잡고 싶어도 이미 돈을 다 사용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열심히 하여 잘못을 만회하겠습니다.”
결국, 악어의 눈물이었던 거야? 돈을 다 쓰기는? 부인과 자식 명의로 부동산을 산 것을 아는데.
참회하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거네. 그 자료까지 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한번 배신한 자는 다시 배신하기 쉽고 한번 욕심을 낸 자는 다시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지금은 윤동수를 이용해야 하니 모른 척하지만, 나중에 반드시 그 죗값을 받도록 할 거다.
“알겠습니다. 잘못을 아니 앞으로 같은 잘못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지켜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매각하지 못하도록 하고 법정 관리하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게 가장 큰 일이고 그룹이나 회사 내 자세한 사정을 저한테 보고하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 후 그룹 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진성 그룹이 이렇게 되었을까? 예상보다 심각하였다.
작은엄마가 그룹의 실질적인 주인이었고 경영도 모르면서 자기 고집대로 아부하는 자들 말대로 그룹을 이끌어 점점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할아버지 계실 때 있었던 능력 있는 임원들은 벌써 물갈이가 되었고 작은엄마에게 아부하는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작은아버지도 이런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닐 텐데 회장이면 그룹을 살리려고 노력해야지? 왜 작은엄마한테 휘둘릴까?
이러니 임원들은 한몫 챙기려고 비리를 저지르고 있고 직원들도 사기가 떨어져 결국 그룹이 해체되는 거지.
가슴이 답답하였다.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텐데.
오후에는 진성 어페럴 신철민 상무를 만나기로 했는데 윤동수 전무랑 다를 게 없겠지. 임원들이 전부 이러지는 않을 텐데.
그중에서도 회사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임원들도 분명 있을 것 같은데. 박도진에게 알아보라고 해야겠다.
* * *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성진 건설 임정민 사장은 온갖 인상을 썼다.
갑자기 현도 건설 사장에게 전화가 왔다고 하여 받았더니 대뜸 진성 건설 인수를 포기하라는 말을 하였다.
거기에다 나는 포기 못 하겠다고 할 수 없어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생각할수록 기분이 더러웠다.
아무리 대형 건설사라고 하지만 이건 내정간섭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성 건설 인수는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 때부터 고대하던 일이었고 드디어 인수하게 되었는데 바로 코앞에서 멈추게 되었다.
그렇다고 현도 건설을 무시하고 계속 진행할 수가 없었다.
진행한다면 현도 건설은 어떻게 해서든지 압력을 넣을 것이고 성진 건설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방해할 것이 뻔하였다.
건설 사업은 서로 얽혀 있기에 대형 건설사인 현도 건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너무나 아쉬웠다. 현도 건설이 진성 건설을 먹으려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인터폰을 눌렀다.
(네. 사장님!)
“이기현 전무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이기현 전무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진성 건설 인수 협상 언제 하기로 했지?”
“3일 후인 목요일에 하기로 했습니다.”
“취소하고 진성 건설 인수는 없던 일로 해.”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네? 진성 건설 인수를 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그래.”
“거의 다 왔습니다. 갑자기 인수하지 않겠다니 왜입니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 뜻이 아니야. 조금 전에 현도 건설에서 연락이 왔는데…….”
“현도 건설이 왜 그러는 겁니까?”
“나도 모르지. 하지 말라는데 하지 말아야지. 안 그랬다가는 우리가 무너질 수도 있어.”
“현도에서 진성 건설을 인수하려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나도 정확히는 몰라.”
“아쉽습니다. 이제 다 왔는데요.”
“나도 마찬가지야. IMF를 기회 삼아 덩치를 더 늘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럼 진성 건설 말고 다른 건설사를 인수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사실 진성 건설보다 더 괜찮은 건설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알아봐.”
“알겠습니다.”
* * *
성진 건설과 통화를 끝낸 현도 건설 사장 양성일은 인터폰을 눌렀다.
(네. 사장님!)
“회장님 연결해 줘.”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들고 잠시 기다리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지시하신 진성 건설 해결했습니다.”
(잘했어.)
“회장님! 진성 건설을 인수하실 생각입니까?”
(아니야. 성진 건설에서 딴마음 가질 수도 있으니 잘 지켜봐.)
“알겠습니다.”
* * *
“5기가 하드 디스크는 만 원 이하로 가격에 맞출 수가 없습니다. 10기가는 당연히 안 되고요.”
지금 현도 전자 직원과 오션팟에 들어갈 하드 디스크 가격 협상을 하고 있었다. 하드 디스크 가격을 낮추어야 단가 면에서 경쟁력이 있는데.
“얼마까지 가능한가요?”
“2만 5천 원까지는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이하는 안 됩니다.”
그나마 장 회장이 특별히 지시한 거라 가격을 더 낮춘 거지만 아이팟이 출시했던 2001년과 3년 차이인데도 아직은 하드 디스크가 비싸다.
오션팟을 출시하는 내년에는 조금 더 가격이 내려가겠지만 그래도 가격이 부담되었다.
어쩔 수 없이 용량을 낮추어야 하나?
“1기가하고 2기가는 얼마까지 가능합니까?”
“1기가는 5천 원에 2기가는 8천 원에 납품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주문 수량이 많아지며 더 낮출 수가 있나요?”
“1,000만 개 이상을 주문하시면 500원, 1,000원 정도 더 낮출 수는 있습니다.”
1기가면 노래가 대략 200곡이 들어가기에 MP3 플레이어로 충분하기는 하다. 처음부터 고용량이면 좋겠지만 가격이 비싸지기에 무리였다.
그래 2년 일찍 출시하는 건데 일단 1기가, 2기가 두 종류로 출시하고 점차 용량을 늘리면 될 것 같았다.
“알았어요. 조금 더 생각하고 결정할게요.”
“알겠습니다. 결정되시면 연락 주십시오.”
현도 전자 직원이 가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HQ 컨설턴트 장기호 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진행은 잘되고 있나요?”
(네. 그렇습니다. 작은 회사라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될 것 같아 연락 드렸습니다. 이번 주까지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별문제는 없나요?”
(네. 없습니다. 실사 자료 정리해서 다음 주 화요일에 결과 보고서를 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디지털 카스트 인수도 다음 주면 마무리되고 오션팟 준비가 하나씩 진행되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오션 코리아에 접속하였다.
요즘 새로 나온 ADSL을 설치하여 인터넷 속도가 빨라졌다.
게임도 출시할 제반여건이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고 내년에 ADSL 기반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 지금 서서히 늘어나는 PC방도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뉴스를 보니 현도 장 회장이 소 떼를 몰고 방북한 뉴스로 도배되었다. 잘 갔나 보네.
* * *
오늘 아이노가 한국에 도착하는 날이라 아침에 공항으로 향하였다.
아이노도 오는데 택시를 탈 수 없어 일주일 전에 대형 승용차를 한 대 구매했다. IMF 시기라 차가 잘 안 팔리는지 계약하고 사흘 만에 차를 받았다.
구매하고서 주차장에 주차만 하다가 오늘 처음으로 운전하는 거였다. 아이노 가면 또 주차만 할 텐데.
새 차이고 대형 승용차라 그런지 차가 부드럽게 잘 나갔다.
공항 주차장에 주차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출국장 앞에서 기다린 지 30분이 지났을 때 아이노가 캐리어를 밀면서 나왔다. 그 모습을 보는데 정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 같았다.
보는 눈이 다 똑같은지 주변 남자들이 전부 아이노를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노.”
큰 소리로 부르며 손을 들어 마구 흔들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아이노가 미소를 머금고 나에게 급히 다가왔다.
“안녕! 아이노. 한국에 온 걸 환영해. 많이 예뻐졌네.”
내 인사에 아무 말 없이 내 품에 안겼다.
순간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다들 부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승리자가 된 것 같아 괜히 우쭐거리며 그대로선 채로 질투 어린 눈길을 즐겼다. 잠시 후 아이노가 내 품에서 떨어졌다.
“안녕! 진!”
“오느라 힘들었지?”
“직항이 없어서 갈아타느라 더 오래 걸렸어.”
“피곤할 텐데 빨리 가자.”
“응. 가서 샤워부터 하고 싶어.”
“알았어.”
아이노 숙소는 호텔로 정할까 하다가 한국에 있는 기간이 10일밖에 안 되어 시간이 부족해 내 아파트로 정했다.
방이 3개라 2개가 비어 있어 상관은 없었다.
“와! 집 좋다.”
아이노가 집 안을 돌아다니며 감탄을 하였다.
핀란드의 아파트는 거의 다 렌트만 주다 보니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 정도로 좋은 건 아닌데.
“씻는다며? 샤워하고 천천히 구경해.”
“알았어.”
아이노가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가자 캐리어를 아이노 방으로 옮기고 컵에 얼음을 넣고 물을 따라 소파 테이블에 올려놓고 앉았다.
잠시 기다리자 아이노가 나왔다.
“아! 개운하다.”
“이리 와 시원하게 물 마셔.”
“응. 고마워.”
소파에 앉아 물컵을 들고 마셨다.
“난 한국이 IMF 구제를 받는다고 해서 못사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오다 보니 괜찮게 사는 나라인가 봐.”
“핀란드보다 한국이 경제 규모가 몇 배나 더 높을걸.”
“정말?”
“응.”
“몰랐네. 근데 어떻게 하다가 IMF 구제를 받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