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부탁할 게 뭔지 말하려는데 이아름 비서가 차를 들고 들어와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를 보며 말하였다.
“맛있게 드세요.”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비서가 나가자 장 회장이 인상을 썼다.
“부탁은 핑계고 다른 목적으로 온 거 아니야?”
장 회장을 몇 번 보지는 않았지만, 말을 할 때 돌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말한다. 난 이게 오히려 더 좋았고 편했다.
돌려 말하면 그 말뜻을 이해하려고 머리를 써야 해서 싫었다. 가끔은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에요. 근데 오늘은 산삼차가 아니네요.”
“젊은 놈이 무슨 산삼차야? 맹물을 마셔도 힘이 솟을 나이인데. 내가 네 나이라면 이까짓 산삼차 안 마셔.”
“맞는 말씀이네요. 청와대는 잘 갔다 오셨어요?”
“그래. 대통령님이 자네가 안 와서 서운해하시더라. 다음에는 같이 오라고 하시더라.”
저 말이 진짜 같이 오라고 하는 건지? 인사말로 오라고 하는 건지 헷갈렸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밥 한번 같이 먹자고 하는 말도 진짜 밥을 같이 먹자는 게 아니라 인사말인 것처럼.
인사말이겠지. 내가 특별한 존재도 아니고 할 말도 없는데. 진짜 나를 보자고 하면 따로 연락할 테니까.
“다음에 기회가 있겠죠.”
“부탁할 거나 말해.”
“저번에 제가 다른 사업 한다고 한 말 기억하세요?”
“나 노망 안 났어. 얼마나 되었다고 기억 못 할까?”
말을 꼭 저렇게 해야 하나? 한 성질 하시네.
“그래서 그 사업 때문에 부탁하려고요. 현도 전자의 도움을 받았으면 해서요.”
“뜸 들이지 말고 도움을 받고 싶으면 내가 이해하게끔 자세히 설명해야지. 앞으로 내 앞에서는 빙빙 돌리지 말고 바로 용건만 이야기해.”
“네. 제가 MP3 플레이어 제조 업체를 곧 인수할 거예요. 그래서 새로 MP3 플레이어를 개발할 계획인데 거기에 들어가는 소형 하드 디스크가 필요해서요.”
“MP3 플레이어는 뭐야?”
“그게 뭐냐면…….”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니까 카세트테이프도 아니고 CD도 아닌데 노래 파일을 작은 곳에 넣어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이야?”
“네. 음질도 CD 못지않고 그 작은 곳에 수백 곡이 들어갈 수가 있어요. 한국이 세계 최초로 원천 기술을 개발했고 이미 특허 출원까지 다 마쳤어요.”
“IT 기술이 가면 갈수록 발전하네. 나 같은 늙은이들이 따라가기가 힘들어. 그 정도 신기능이라면 인기가 많겠어.”
“그럴 거라고 예상해요.”
“MP3 플레이어가 인기가 많을수록 하드 디스크 수요가 많아질 테니 우리 현도 전자에도 도움이 되는 거네. 그럼 당연히 도와야지. 내가 연락하라고 지시할게.”
“감사합니다.”
“그 정도로 감사하기는. 근데 말이야. 내가 보기에도 유망한데 그 사업에 현도가 투자해도 되겠나?”
“대기업이 투자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크잖아.”
그렇기에 나눠 먹을 수는 없지.
“대기업이 중소기업 영역까지 침범하면 욕먹어요. 상도라는 게 있죠.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어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장 회장이었다.
“말해.”
“저에 대해 알아보셔서 저와 진성 그룹 간의 관계를 잘 아실 거예요. 저는 할아버지가 이룩하신 진성 그룹이 계속 발전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미래가 암울해요. 저라도 진성을 지키고 싶은데 아직은 저의 힘이 부족하네요. 회장님이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성진 건설이 진성 건설을 인수하지 못하도록 막아만 주세요.”
장 회장은 비서실장이 조사한 진민재에 대해 들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었다.
진민재가 진성과 등을 지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핀란드로 유학 가면서 지금까지 척을 지고 있는 건데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였다.
“그건 어렵지 않아. 왜 자네는 진성과 등을 지게 된 건가? 작은아버지가 강제로 자넬 핀란드로 쫓아 버린 거야?”
비록 작은아버지와 관계가 좋지는 않지만, 굳이 남 앞에서 작은아버지를 흉볼 필요는 없었다. 자기 얼굴에 침 뱉기다.
“꼭 그런 것은 아니에요. 핀란드 유학은 제 자의로 간 것이고 적지만 제 몫을 챙겼고 자세한 상황을 말하자면 길어요. 저는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고 이해하시면 될 거예요.”
“내가 인수만 막아 주면 되는 거야?”
“네.”
“그다음은 어떻게 할 건데?”
“저는 2년만 시간을 벌면 돼요. 그럼 저의 힘으로 진성 건설을 비롯해 다른 계열사들을 인수할 수 있거든요.”
“2년 뒤면 곗돈 타? 계열사까지 인수하려면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닐 텐데.”
“제가 몇 년 전에 주식을 사 놓은 게 있는데 지금 많이 올랐어요. 앞으로 그 회사가 계속 성장하기에 주가가 더 오를 거예요. 2년 뒤에 매도할 생각입니다.”
“얼마나 올랐기에?”
“생각보다 커요.”
“알았다.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이렇게 진성 건설 매각을 막았지만, 장 회장에게 신세를 진 것이라 나도 나중에 뭔가 하나를 주어야 할 텐데.
서로 주고받아야 깔끔한 거래일 테니까. 뭘 주어야 하나?
“더 부탁할 거는 없어?”
“네. 없습니다.”
“저기 있잖아.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데 자네가 아빠의 기억이 전혀 없으니 진 박사의 연구 자료 찾기가 당분간은 힘들 것 같아. 미국에도 넘어가지 않았다고 하니 분명 진 박사의 연구 자료는 한국에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야. 진 박사가 힘들게 개발한 그 아까운 연구 자료를 이대로 썩힌다면 국가적으로 엄청나게 손해고 진 박사도 원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말을 하다 끊고 내 눈치를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지?
“그래서요?”
“내 생각으로는 자네나 내 힘만으로는 연구 자료를 찾는 것은 불가능해. 차라리 수사 기관에서 비밀리에 다시 수사하여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야. 내가 얼마 전에 청와대 들어갔을 때 이걸 대통령에게 건의할까? 하다가 자네 의사를 물어보고 건의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으로 미뤘어. 자네 생각은 어때?”
유아영도 수사를 포기한 것 같은데. 근데 수사한다고 해도 그때도 찾지 못했는데 13년이나 지난 지금 연구 자료를 찾을 수 있을까?
다시 수사한다고 바뀔까? 내가 하는 것도 아니라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혹시 알아? 뭔가 새로운 단서나 증거를 발견할지?
나로서는 손해 보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장 회장은 아빠의 연구 자료가 무척 탐이 나는지 쉽게 포기할 줄 몰랐다.
하긴 그 연구 자료만 있다면 현도 자동차가 단숨에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성장할 수 있을 테니 이해가 가기는 했다.
그러니 그 연구 자료를 찾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네요. 회장님 편한 대로 하세요.”
장 회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당연하지. 아들 된 도리로서 아빠의 연구 자료를 찾아야지. 내가 북한에 다녀온 뒤에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할게. 그렇게 알고 있어.”
“네.”
근데 만약 아빠의 연구 자료를 찾으면 소유권은 누가 갖는 거지?
난 아들이니까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고 현도 하고 정부는 아빠에게 연구비를 지원했기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잖아?
연구소의 소유물이라고 하면 나한테 불리할 수도 있겠는데. 이건 누가 찾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찾아야 하는데. 어렵다.
* * *
현도에서 나와 커피숍으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지금 핀란드는 아침이라 핸드폰을 들었다.
(오션 디자인실 아이노입니다.)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가? 목소리는 여전히 예쁘네.
“안녕! 나야 진민재.”
(오, 진!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그럼 나야 잘 지내지. 아이노는 어때?”
(나도 잘 지내. 오션 핀란드 새로 디자인한 거 못 봤지?)
에릭이 코리아 오션을 보고 핀란드와 독일, 프링스에서 시범적으로 서비스한다고 했는데 그걸 말하는 건가 보다.
“응. 새롭게 사이트를 개편한다는 것은 알아.”
(그것 때문에 바빴어. 지금은 거의 마무리가 되어 곧 서비스를 시작할 거야. 진은 그때 봐.)
“괜찮게 나왔어?”
(응. 내가 보기에 이전보다 훨씬 좋아. 회사에서도 다 그렇다고 하고.)
“다행이네. 그 일 끝나면 아이노가 할 일이 또 있어?”
(글쎄? 일이야 계속 있지.)
“나 한국에 있는 거 알지?”
(응. 한국에는 언제까지 있을 건데? 핀란드에는 안 와? 보고 싶네.)
“한동안은 있어야 해. 내가 핀란드 못 가면 아이노가 한국에 오면 되지?”
(내가 어떻게 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한국으로 출장 올래? 디자인 하나 할 게 있는데 아이노의 도움이 필요해서.”
(코리아 오션 사이트 디자인이야?)
“아니야.”
(그럼 무슨 디자인?)
“상품 디자인인데 가능하겠어?”
(내가 저번에 말한 거 기억 안 나나 보네. 내가 디자인 회사 설립하는 게 꿈이라고 했잖아. 웹디자인뿐만 아니라 상품 디자인도 포함이야. 나 할 수 있어. 사실 나 상품 디자인도 해 보고 싶었거든.)
기억났다. 대학원 여름방학 때 잠깐 핀란드에 방문했을 때 말했다. 하긴 디자인의 기초가 그리는 거라 상관은 없지.
“잘됐네. 그럼 와. 내가 회사에는 말할 테니까.”
(알았어.)
출장 일정을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션팟 디자인은 아이노에게 맡기면 되겠네.
* * *
만나도 하필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한 거야? 만날 곳이 여기밖에 없나?
대한민국에 이런 곳이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일식집이었는데 인테리어며 집기, 장식 등이 왜색풍이 짙었다.
주인이 일본 사람인가? 장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이 불편하였다.
다행히 직원은 일본 사람이 아닌지 한국말을 하였다.
직원 안내를 받아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가자 50대 초반의 남자가 혼자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날 보자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도 젊은 내가 들어오니까 그런 것 같았다. 무심하게 그 앞에 앉았다.
“당신이 날 보자고 한 것이오?”
“네. 그렇습니다.”
“당신은 누구이고 날 왜 보자고 한 것이오?”
박도진이 진성 건설 윤동수 전무에게 연락해 만나자고 하였다.
싫으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말했더니 찔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약속을 잡아 내가 나온 것이었다.
가지고 온 서류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먼저 이것부터 보시죠.”
나를 잠시 째려보더니 봉투를 들어 서류를 보면서 점점 얼굴이 굳어져 갔다. 자신이 저지른 비리가 담긴 서류이니까 당연하겠지.
다 보고 나서는 버럭 화를 내었다. 방귀 뀐 놈이 화를 낸다니 딱 그 짝이었다. 지금 누가 화를 내야 하는데.
“당신 누구야? 지금 날 이딴 걸로 협박하는 거야? 내가 이딴 거에 겁먹을 줄 알아? 당신 사람 잘못 봤어.”
나이를 먹으면 그 사람의 인상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나타난다고 하더니 역시나 얼굴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자식들 보기에 창피하지도 않나?
“그럼 바로 일어나 이 자료를 들고 검찰로 찾아갈까요? 그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겁을 먹었는지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나에게 이걸 보여 준다는 것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인데 그게 뭐요?”
“진성 건설이 매각하지 않도록 내부에서 막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