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정말 그만두어도 괜찮다는 건가요?”
“제 아빠 사건이라 그만둔다고 하면 솔직히 아쉽기는 하죠. 하지만 제 마음대로 공권력을 움직일 수는 없잖아요. 새로운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있던 단서도 날아가 버린 상황이니 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유아영이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
더는 유아영과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는데 핑곗거리가 생겨 다행이었다.
“잠시만요. 중요한 전화라서요.”
“네. 받으세요.”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HQ 컨설턴트 장기호 팀장입니다. 기업 인수건을 의뢰하셨다고 하여 전화 드린 겁니다.)
“안녕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만요.”
유아영을 바라보았다.
“제가 중요한 전화라 그런데 용건 다 끝났으면…….”
“알았어요. 다음에 봐요.”
“네. 안녕히 가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유아영을 보면서 통화를 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작은 중소기업을 인수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전화로 말씀드리기보다는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그러실래요? 여기가 어디냐면…….”
커피숍 주소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자 강성중이 다가왔다.
“사장님! 방금 오신 손님 누구예요? 무척 예쁜데요. 딱 제 스타일이더라고요.”
“너 아까 인사할 때 못 들었냐? 검사야. 검사한테 치근덕댔다가는 골로 간다. 대한민국 검사가 얼마나 무서운데.”
“저 미모에 검사한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진짜 검사 맞아.”
“근데 왜 사장님을 찾아온 거예요?”
“그럴 일이 있어. 가서 일이나 해.”
문이 열리고 박도진이 들어왔다. 오늘 날 잡았나? 연속 3연타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 앉으세요.”
“네.”
박도진이 의자에 앉았다.
“성중아 커피.”
“네.”
나도 자리에 앉았다.
“급히 보고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진성 그룹에서 진성 건설을 성진 건설에 매각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전 생에서 IMF로 그룹 경영이 어려워지자 7개의 계열사 중 5곳을 매각하고 2곳이 청산되었다.
그나마 알짜 기업인 리조트 사업만은 2004년까지 어렵게 끌고 갔지만 결국 부도가 나 매각 절차를 겪게 되어 할아버지가 일궈 낸 진성 그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시작되는가 보네. 그 첫 주자가 진성 건설이고.
할아버지가 경영할 때는 진성 건설이 알짜 기업이었는데 작은아버지가 맡고부터는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확실한 거예요?”
“거의 확실합니다. 어제 진성 건설 사장이 성진 건설 관계자와 만났습니다.”
“어제 만났다는 것은 그전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다는 말이네요. 그건 몰랐나요?”
고개를 숙였다.
“미리 알지 못해 죄송합니다. 비밀리에 계속 인수할 곳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진성 건설에 6월에 돌아오는 어음이 140억 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7, 8월에 돌아오는 어음은 금액이 적어 문제가 없지만, 9월에 돌아오는 어음이 100억 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6월 어음은 어떻게 해서든지 일단 막고 매각하려는 것입니다. 부도 난 후에 매각하는 것보다는 부도를 막고 매각하는 게 훨씬 유리할 겁니다.”
“매각 협상이 구체적으로 진행된 건가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만간에 구체적인 협상이 진행될 것 같습니다.”
매각하면 다시 내가 인수하기가 힘든데. 내가 지금 인수할 여력이 된다면 인수하겠지만 지금은 인수할 자금이 없었다.
2000년이 되어야 노카아 주식을 매도하여 2조 원이 넘는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데. 일단은 매각을 막아야 한다.
“성진 건설이 진성 건설을 인수할 만한 능력이 되나요?”
“네. 충분합니다. 요즘 건설 회사들이 부도나고 힘든 상황이지만 성진 건설은 오래전부터 시공 능력을 인정받아 대기업 건설사로부터 하청을 많이 받아 성장한 회사로 몇 년 전부터는 대기업 하청을 받지 않고 주로 관급 공사를 진행하여 이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현재 도급 순위 44위로 1군 건설사 반열에 올라 있고 시공 능력 또한 30위 정도 합니다. 한때 진성 건설과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진성 건설을 인수하려는 것 같습니다.”
한때 라이벌 관계였다면 진성 건설도 상진 건설처럼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현재 위치는 정반대가 되었다.
작은아버지는 뭐 하는 거야. 기업을 성장시키고 키우기보다는 망하게 하려고 그 자리에 오른 건가?
능력이 없다면 당장 내려와야지. 답답하였다.
“매각을 막을 수는 없나요?”
“진성 건설은 무조건 매각하려고 할 것이기에 성진 건설에서 마음을 돌려야 하는데 쉽지가 않을 겁니다. 다만 성진 건설이 부담을 느낄 정도의 압력이 있다면 인수를 포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정부나 정치권의 힘을 말하는 거예요?”
“현재로서는 그게 가장 강력한 압박일 겁니다.”
내가 정부나 정치권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아! 있다. 대통령 한번 만나 봤으니 알기는 하지만 대통령에게 이런 일을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가 그럴만한 힘은 없거든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더 큰 건설 회사를 통해 압박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현도 건설이 떠올랐다.
장 회장에게 부탁하면 이건 될 것 같은데. 오션팟 하드 디스크 부탁도 해야 하는데 왜 자꾸 장 회장에게 부탁할 일이 생기냐?
이러다가 진짜 북한에 따라가야 하나? 가기 싫은데.
“현도 건설이라면 가능할까요?”
“현도 건설을 움직일 수 있다면 무조건 가능합니다. 성진 건설이 현도 건설을 무시하고 인수하지는 못할 겁니다.”
“알았어요. 그건 제가 해 볼게요. 그럼 성진 건설과 매각 협상이 불발되면 진성 건설에서는 어떻게 나올까요?”
“계속 매각 대상을 찾을 겁니다. 하지만 요즘 건설 회사들 전부 사정이 좋지 않기에 진성 건설을 인수할 만한 기업은 더 찾기가 힘들 겁니다.”
“매각할 기업을 찾지 못하면 그다음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요?”
“제 생각으로는 9월까지 매각할 기업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는 어음 100억 원을 막지 못해 부도가 날 겁니다. 그럼 진성 건설은 화의 신청이나 법정 관리를 신청할 겁니다.”
“화의 신청이나 법정 관리가 뭔가요?”
“쉽게 설명하면 두 개 다 파산할 기업의 회생을 도와주는 제도입니다. 차이점이라면 화의는 기존 경영진이 계속 경영하는 것이고, 법정 관리는 법원에서 지정한 자가 경영하는 겁니다.”
내가 다시 진성 건설을 인수하려면 진성 건설이 법정 관리를 받는 것이 더 유리할 것 같았다.
“화의 신청하면 많이 받아 주나요?”
“그건 아닙니다. 많은 기업들이 파산을 피하려고 화의 신청을 많이들 했지만 대부분 기각되었습니다. 법정 관리가 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진성 어페럴은 상황이 어떤가요?”
“진성 어페럴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매각 기업을 찾고 있기는 하지만 의류 시장도 침체기라 인수할 만한 기업이 없습니다. 아마도 8, 9월쯤에 화의나 법정 관리를 신청할 가능성이 큽니다.”
“알았어요. 그리고 임원들 비리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현재 조사가 끝난 자는 두 명입니다. 한 명은 진성 건설 전무 윤동수이고, 한 명은 진성 어페렐 상무 신철민입니다.”
말을 끝내고 서류 봉투를 건넸다.
“여기에 그자들이 저지른 비리가 적혀 있습니다. ”
봉투를 받아 자료를 꺼내 보았다.
읽으면서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곡간을 야금야금 빼먹는 인간들이 있는데도 작은아버지는 모르고 있다니?
하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을 텐데 윗물이 시궁창이니 어쩔 수 없지. 날짜를 보니 할아버지 때는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다.
이래서 오너가 중요한 건데.
괘씸하지만 이자들을 내가 당분간 이용해야겠다.
“알았어요. 수고하셨고 보고할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네.”
제일 먼저 진성 건설 매각부터 막아야겠네.
핸드폰을 들었다.
(현도 그룹 회장 비서실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진민재라고 하는데 회장님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회장님은 지금 회의 중이라 메모 남겨 드릴게요.)
나에게 인사하는 것을 보니 비서실 그 비서인가 보네. 목소리도 비슷한 거 같으니.
“알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산삼차 주었다고 혼나지 않았어요?”
(제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회장님만 드시는 차인 줄은 몰랐어요. 선배한테 한소리만 들었어요.)
“이제 저는 산삼차 못 마시겠네요.”
(대신 다른 차 드릴게요.)
“알았어요. 메모 남겨주세요.”
(네.)
전화를 끊었다.
산삼 차가 얼마나 비싸길래? 맛은 별로지만 원래 쓴 것이 몸에는 더 좋은 거잖아. 커피숍에서 산삼 차를 한번 팔아 볼까?
산삼차는 어디서 사야 하나?
한 시간 정도 지나자 핸드폰이 울렸다.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세요? 한도 그룹 회장 비서실입니다. 회장님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네.”
음악 소리가 잠시 울리다가 장 회장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회장님! 진민재입니다.”
(오 그래! 전화했었다며?)
“네. 찾아가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무슨 부탁인데?)
“직접 말씀드릴게요.”
(내일 와.)
내일 오전에는 HQ 컨설턴트 장기호 팀장을 만나기로 했는데.
“오후에 가도 될까요?”
(오전에 오지. 같이 점심이나 먹게.)
“제가 오전에는 선약이 있어서요.”
(그렇게 해.)
“내일 뵙겠습니다.”
* * *
진민재를 만나고 동부지검으로 돌아온 유아영은 김도형 수사관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결국은 두 사람을 전부 만났지만 얻은 것이 없다는 말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알았어요. 수고하셨어요.”
유아영은 어떻게 할지 고민이었다.
뭐라도 있어야 그걸 단서로 해서 계속 수사해 나가겠는데, 가로막히고 아무것도 없으니 맨땅에 헤딩하는 꼴이라 더 조사할 것도 나갈 것도 없었다.
진민재를 만나서도 얻은 것은 없었다. 다만 우편을 보낸 자가 진민재 같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진민재는 자신을 어떻게 알고 우편을 보낸 건가?
꼭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진민재 자료를 보았지만 자신하고는 접점이 하나도 없었다. 착각인가?
근데 진민재는 왜 쉽게 포기하는 거지? 자신이 포기한다고 하면 더 조사하라고 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여기서 이대로 포기하기는 싫은데.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오전에 커피숍으로 찾아온 HQ 컨설턴트 장기호 팀장을 만나 디지털 카스트 인수 작업을 의뢰하였고 점심을 일찍 먹고 현도 그룹으로 향하였다.
비서실 안으로 들어가자 그 비서가 환하게 웃으며 일어나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
“안녕하세요? 몇 번 보고 전화 통화도 했는데 이름도 모르네요.”
“저는 이아름이에요.”
“이름이 얼굴만큼 예쁘네요.”
“고마워요.”
우리 둘의 대화를 듣던 고참으로 보이는 비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며 나에게 말하였다.
“회장님 기다리십니다. 들어가십시오.”
“네.”
안으로 들어가자 장 회장이 오늘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앉아.”
“네.”
소파에 앉아 장 회장을 살펴보는데 왠지 기분이 언짢은 것 같았다.
“안 좋은 일이 있으세요?”
“아니야. 방북 준비하는데 신경 쓸 일들이 많아서 그래. 무슨 부탁할 게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