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집에서 느지막하게 나와 커피숍에 도착하니 황정화 사장이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어깨가 푹 처져 있는 것이 보기에 안쓰러웠다.
온다는 연락이 없었는데. 마음의 결정을 했나?
“황 사장님!”
내가 부르는 소리에 얼른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안녕하세요? 연락도 없이 어떻게 오셨어요?”
“미리 연락 드려야 했는데 마음이 급하다 보니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니에요. 앉으세요.”
“네.”
자리에 앉자 강성중이 내 커피를 갖다 주었다.
“고마워.”
한 모금 마시고는 황 사장을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오신 것을 보니 마음의 결정을 하신 것 같은데 어떤 길을 가시기로 한 겁니까?”
“지난번에 말씀하신 제안 지키실 수 있는 겁니까?”
“그럼요.”
“알겠습니다. 디지털 카스트를 오션에 매각하겠습니다.”
됐다. 생각보다 일찍 인수하게 되었지만, 드디어 한 걸음 내딛게 되었다. 아이팟을 시작으로 스마트 폰까지 쭉 나가야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현재 디지털 카스트의 상황을 아시면서도 인수하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저는 MP3 플레이어의 잠재력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전에도 투자한 것이고요. 지금은 고전을 겪고 있지만, 저는 시간을 가지고 처음부터 전면적으로 다시 시작하여 MP3 플레이어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생각입니다. 아마도 지금의 MP3 플레이어와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할 겁니다.”
“진 사장님은 천재라 그런지 저와는 생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 MP3 플레이어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는지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지켜보십시오. 황 사장님이 개발한 MP3 플레이어가 어떤 모습으로 세계 시장을 향해 훨훨 날아가는지를요.”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됩니다.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수 대금은 조만간에 실사를 통해 결정할 거예요. 그러니 자료를 요구하면 성실히 주시고 실사를 통해 인수 대금이 결정 나면 그 후 나머지 50%의 특허권을 제가 특별히 생각해서 책정할 거예요.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할 거니까 큰 이견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요구하시는 자료 드리고 지금처럼 하고 있으면 되는 겁니까?”
“네. 나중에 계약하더라도 지금과는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기존대로 운영하면서 따로 프로젝트를 준비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황정화 사장이 갔다.
이제 디지털 카스트를 인수하면 아이팟을 개발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할 게 많네.
먼저 아이팟과 비슷하게 디자인도 해야 하고 아이팟용 1.8인치 소형 하드 디스크를 제조할 회사도 알아봐야 하고.
망고사가 아이팟을 처음 출시할 때 MP3 플레이어는 전부 내장 메모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망고사는 다른 회사가 사용하지 않는 하드 디스크를 사용한 이유가 내장 메모리는 용량에 비교해 가격이 고가였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게 신의 한 수가 되어 성공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른 MP3 플레이어보다 더 많은 곡 1,000, 2,000곡까지 저장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대학생들이 아이팟을 MP3 플레이어보다는 휴대용 저장장치로 사용한 것도 한 요인이었다.
이 당시 5G, 10G인 대용량의 휴대용 USB가 없었기에 자료를 보관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번에도 아이팟을 출시하면 똑같은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하드 디스크는 장 회장 도움을 받아 현도 전자랑 하면 된다. 현도 전자가 하드 디스크 제조 업체인 맥스터를 인수하여 현재 자회사로 되어 있었다.
다만 2000년대 초에 현도 전자가 해체되면서 미국 사모펀드에 매각되기는 하지만 그전까지는 사용할 수 있으니까.
아니면 하드 디스크 부분만 우리가 인수해도 된다.
또 아이팟용 OS도 개발해야 하네. 이건 단순하여 넉넉잡고 4~5개월이면 충분하다.
디자인은 누구한테 맡겨야 하나? 아이노한테 맡길까? 아이노는 웹디자이너인데 상관은 없으려나?
먼저 인수부터 마무리 지어야겠지. 미국이라면 에릭한테 맡기면 되는데 한국이라 내가 다 해야 하네.
염중섭 대표에게 하라고 할 수도 없고. 내가 인수 관련 일을 모르니까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핸드폰을 들었다.
(정하나 실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세요? 고문님! 오늘은 반가운 전화가 왔네요.)
“제 전화가 반가운가요?”
(그럼요. 매일 전화하셔도 반갑게 받을 거예요.)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거야? 영업용 말이야? 정 실장이 나이만 어렸어도 좋았을 텐데.
“마침 제가 일 하나 의뢰하려고 했는데 진짜 반가운 전화겠네요.”
(그런가 보네요. 인재가 필요하신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기업 컨설턴트도 하신다고 해서 혹시 인수 관련된 일도 하시나요?”
(그럼요. 기업에 관련된 일은 전부 다 한다고 보시면 돼요. 기업 인수하시려고요?)
“네.”
(와! 오션이 나날이 발전하나 보네요. 이제는 기업까지 인수하시고요.)
“그 정도는 아니고요. 작은 중소기업 하나 인수하는 거예요.”
(인수 관련 일은 제가 담당이 아니라서 잠시 후에 담당자한테 전화하라고 할게요.)
“알았어요. 부탁할게요.”
전화를 끊자 신상철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다른 회사 인수하는 거야?”
“응.”
“게임 회사야?”
“아니야. 인터넷하고는 상관없는 제조 업체야.”
“그래? 알았어.”
게임 회사가 아니라고 하니 관심이 없다는 듯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는 신상철이었다. 정말 단순하네.
다이어리를 펼치고 아이팟을 제조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아이팟으로 부르지 말고 오션팟으로 불러야겠다. 나중에 개발하는 스마트폰도 오션 폰으로 불러야지.
“어서 오십시오.”
“진민재 씨를 보러 왔는데요.”
한창 작성하고 있는데 손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와 고개를 들다가 그대로 멈췄다. 유아영이 서 있었다.
여긴 왜 왔지? 아빠 일로? 그건 수사관이 왔다가 갔잖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동부지검 유아영 검사예요.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이리로 앉으시죠.”
“고마워요.”
유아영이 내 앞에 앉았다. 이렇게 마주 보고 앉은 것이 몇 년 만인가? 지난 추억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유아영을 빤히 쳐다보면 추억에 잠기자 민망한지 물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죄송합니다. 제 추억 속에 있는 분하고 너무나 똑같아서 잠시 실례했습니다.”
“그렇게 똑같아요?”
“네. 근데 저에게 물어볼 것이 무엇입니까?”
대답하려고 하는데 강성중이 다가와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하여튼 저놈은 여자들한테는 무척 친절해. 그런데도 여자친구가 없으니 아이러니해. 인물도 빠지는 건 아닌데.
“네. 고마워요.”
유아영은 커피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시자 향긋한 커피 향이 코를 간질거렸다.
자신은 커피를 유달리 좋아해 자주 마시는데 이 커피는 지금까지 마셔본 커피와는 뭔가 달랐다.
프랜차이즈 커피숍은 품질의 균일화 때문에 로스팅과 커피 내리는 방식이 일정하여 맛이 일률적이다.
반면 개인 커피숍은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다 보니 맛이 제각각이라 이런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여기 커피는 다른 곳과 좀 다른 맛이 나네요. 뭐라고 할까? 신 과일 맛이 난다고 할 수 있어요.”
“원두를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것을 사용하거든요. 그래서 다른 커피숍과 맛이 좀 다를 거예요.”
“그렇군요. 에티오피아 원두는 처음 마셔 보네요. 맛이 좀 독특하면서 좋아요.”
이 커피 맛도 사람마다 취향이 다 다르다. 난 입에 맞는데 다른 사람들은 입에 안 맞는지 손님이 없는 이유이다.
손님이 없어서 난 더 좋기는 하지만.
“저는 이 커피 맛에 길들어져 어디 가서 다른 커피를 마시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잊었던 인연이고 끝난 인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주 보고 이야기하다 보니 옛 기억이 떠오르며 옛 감정까지 느끼더니 심장도 기억하는지 마구 뛰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빨리 보내야겠다.
“묻고 싶은 게 뭔가요?”
마시던 커피 컵을 내려놓았다.
“우리 수사관한테 말을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우리가 진상규 박사님 사망에 의문을 품고 조사를 좀 해 봤어요. 유일한 단서인 진상구 박사가 휴게소 공중전화에서 전화한 상대를 찾으려고 했는데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확인하는 데 실패했어요.”
시간이 많이 흘러 자료가 없을 것 같았는데 역시였네. 그럼 다시 원점인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가요?”
“현재로서는 그래요. 우리도 벽을 만난 기분이에요. 그래서 제가 찾아온 거예요. 수사관에게 하지 않았던 말이나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이 또 없을까요?”
“있었으면 다 말했을 거예요. 저도 아빠 사고에 의문을 가지고 있거든요.”
유아영은 처음 진민재를 볼 때부터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은 기분이 들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진민재가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봤지? 잘생겨서 그런가?
순간 법원에서 사라졌던 잘생긴 청년이 떠올랐다. 그때 얼핏 봐서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진민재랑 매우 닮은 것 같았다.
설마? 법원에도 찾아오고 자신에게 우편물을 보낸 게 진민재란 말인가? 자기 아빠의 교통사고에 의문을 갖고 나에게 해결해 달라고?
그럴 개연성이 충분하였다. 그럼 진민재가 만들어 놓은 판에 자기가 꼭두각시가 된 거였어?
“혹시 진민재 씨가 진상규 박사님의 교통사고 조사서를 저한테 보낸 건가요?”
들통난 건가? 유아영이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사실대로 말할 수 없고 유아영에게 거짓말하기도 싫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김도형 수사관이 보여 준 자료 보니까 그건 경찰 수사 자료 같던데 개인이 그걸 구할 수 있을까요?”
대답을 회피하는 것을 보니 맞는 것 같은데.
“그래서 맞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중요한 거 같지는 않아요. 저도 그 자료를 누군가에게 받았거든요.”
“누구한테요?”
나도 박도진한테 받았으니까 사실이기는 하지.
“누군지 말할 수는 없어요. 누가 보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실체를 규명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계속 수사를 하실 건가요? 덮으실 건가요?”
유아영은 100%는 아니지만 90%는 진민재가 보냈다고 확신하였다. 그렇다고 본인이 인정하지 않았는데 왜 보냈냐고 따지거나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분명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우편을 보냈으니 자신이 수사를 그만둔다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였다.
“어쩔 수 없지 않나요? 유일한 단서마저 사라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덮을 수밖에요.”
결국은 여기까지인가? 진작 알았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할 만큼 다 했으니 여기서 포기해야겠지.
나중에 다른 단서가 나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유아영에게 포기하지 말고 더 조사하라고 하기에는 나도 미안하였다.
“충분히 이해해요. 그동안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해 준 거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유아영은 당황하였다. 이게 아닌데? 예상한 반응과는 다르게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우편까지 보낼 정도면 적극적이라는 말인데 이대로 순순히 포기하는 것을 보면 진민재가 보낸 게 아닌가?
그럼 누가 보낸 거지? 아닌데. 진민재가 맞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