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유아영 검사는 오늘도 서류 속에 파묻혀 서류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대한민국에 범죄가 이렇게 많이 발생했었나?
대한민국 검사가 자기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수천 명이 될 텐데 그 많은 검사에게 사건 조사서가 이렇게 매일 쌓인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먹고 살기 힘든 IMF 시기라 더한 건가? 언제쯤 범죄 없는 세상이 되려나? 꿈같은 이야기겠지.
연필을 들고 다시 서류를 보려는데 김도형 수사관이 다가왔다.
“검사님!”
“네.”
“알아보라는 거 알아보았는데 물건입니다. 사망자가 진짜 천재 과학자가 맞습니다. 더구나 그 과학자가 진성 그룹 장남이었습니다.”
“진짜요?”
“네. 조사하면서 제가 놀랄 정도였습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천재 물리학자인 이휘소 박사님 버금가는 천재라고 합니다. 주변 인물들이 전부 진 박사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살아 있었다면 크게 될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듣는 저도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이름이 벌써 알려졌을 텐데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뭔가요?”
“진성 그룹에서 언론을 막았던 것 같습니다. 알아보니 고 진규촌 회장님께서 장남이 그룹을 이어받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천재 과학자로 세상에 알려지면 영원히 진성 그룹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이해가 가네요. 근데 이것도 우연인가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천재 박사님 두 분이 전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다뇨?”
“그러고 보니 그렇습니다. 우연인지 음모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연치고는 참 이상합니다. 또 그때 교통사고 조사를 안기부에서도 진행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정부 지원을 받아 연구했고 연구자료가 사라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유아영이 알 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었다.
“김 수사관님! 이제 흥미가 마구 생기지 않나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리는 하지 말라고 하는데 가슴은 하라고 합니다. 제가 왜 이러는 겁니까?”
“모를 때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아요. 김 수사관님은 아직도 가슴이 뜨거운가 보네요.”
“그리고 검사님! 오션 아시죠?”
“그럼요. 제가 즐겨 사용하는 사이트인데요. 근데 오션은 왜요?”
“그 오션을 누가 개발한 줄 아십니까? 바로 진상규 박사님 아들인 진민재입니다. 역시 아빠가 천재라서 그런지 아들도 천재입니다.”
“정말이에요?”
“네. 저도 놀랐습니다.”
“저는 오션이 미국 기업이라고 알고 있었거든요.”
“미국으로 유학 간 진민재가 2년 전인 96년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오션을 설립했다고 합니다.”
“그런 인재가 미국으로 가다니 아쉽네요. 한국에 있었다면 어려운 시기에 많은 도움이 됐을 텐데요.”
“진민재가 재외동포 비자인 F4를 받고 올해 한국에 입국하여 현재까지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먼저 진민재를 만나 볼까 합니다. 그런 후에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잘됐네요.”
“아마 진민재를 만나 보면 뭔가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네요. 수고 좀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 * *
신상철과 강성중이 게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며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신상철이 전혀 아닌 것 같았다.
나에게는 편하게 대하지만 강성중까지 편하게 대하는 것을 보며 신상철이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발전했고 한 번에 변하지는 않겠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변하다 보면 나중에는 몰라보게 변해 있을 것이다.
그래! 잘하고 있어. 얼마나 보기 좋아.
그나저나 강성중이 옆에 붙어서 조언을 많이 해 주는데 보너스라도 줘야겠다.
문이 열리고 20대 초중반의 여자가 들어오자 강성중이 얼른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 사장님 뵈러 왔는데요.”
아! 오늘 웹디자이너 면접 온다고 했는데 저 여자인가 보다. 손을 들었다.
“여기예요.”
여자가 다가와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면접 보기로 한 강민희예요.”
“안녕하세요? 앉으세요.”
“네.”
강민희가 앉는 것을 보고 성중이에게 소리쳤다.
“성중아! 여기 차 좀.”
큰소리도 대답하였다.
“네.”
저놈은 여자만 오면 신이 난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지 않았어요?”
“아니에요.”
“혹시 이력서 가져오셨어요?”
“네.”
가방에서 이력서를 꺼내 주었다.
내가 이력서를 보는 동안 강민희는 성중이가 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상을 졸업하고 1년 정도 회사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웹디자인 학원에 다녔고 웹디자인 일을 시작하였다.
“웹디자인 일은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지는 않았네요?”
“네. 주로 프리랜서로 일했어요. 회사에 일이 계속 꾸준히 있는 것이 아니라서요.”
하긴 일반 회사에서는 웹디자이너가 계속 필요하지는 않지. 웹사이트를 개발하는 회사라면 모를까?
“어떻게 하다가 웹디자인 일을 하게 된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나름의 소질도 있었지만, 대학갈 집안 형편이 안되어 여상을 갔고 회사에 다니다가 우연히 웹디자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회사를 그만두고 학원을 다니며 배웠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학원을 갈 정도면 모험이었겠네요.”
“모험일 수도 있겠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더 늦기 전에 제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웹디자이너는 꼭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결심하는 데 큰 역할도 했고요.”
“웹디자이너 일이 재미있어요?”
“네. 아주 재미있어요. 제가 디자인한 그림들이 웹사이트상에 있는 것을 보면 아주 기분이 좋고 즐거워요.”
말하는 표정을 보니 진짜로 즐거운가 보네. 일은 즐기면서 하는 게 가장 좋지.
“기존에 디자인했던 것을 볼 수가 있을까요?”
“네. 포트폴리오 가져왔어요.”
가져온 포트폴리오를 나에게 건넸다.
“여기 있어요.”
받아서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보았다.
내가 미술 쪽에 보는 눈이 없지만 보기에 괜찮았다. 대단한 명작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웹디자인은 보기에 좋으면 된다.
게임 쪽 디자인을 할 것이기에 신상철도 보면 좋을 것 같았다.
“상철아 너도 한번 봐.”
“내가 보면 아나? 그냥 네가 결정해.”
아이고. 저놈을 쥐어박을 수도 없고.
“성중아 네가 한번 봐.”
“네.”
강성중이 다가와 포트폴리오를 보았다.
“괜찮은데요. 저는 마음에 들어요. 근데 이것보다 게임 캐릭터에 맞게 그리는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하긴 그랬다.
“강민희 씨가 합격하면 주로 게임과 관련된 디자인을 할 거예요. 혹시 말로 게임 캐릭터 설명해 주면 지금 바로 그릴 수 있나요?”
“네. 가능해요.”
“성중아! 네가 캐릭터 하나만 설명해 드려.”
“네.”
강성중이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고 설명을 다 들은 강민희가 연필로 종이에 캐릭터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보고 있자니 신기하였다.
쓱쓱 연필이 지나간 자리에 그림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난 그림 소질이 없어서 아무리 신경 써서 그려도 그림이 아닌 낙서가 되는데.
캐릭터가 완성되었는데 보기에도 그럴듯하였다. 강성중도 그렇게 느꼈는지 감탄을 하였다.
“제가 보기에 캐릭터하고 딱 맞아요. 한번 설명을 듣고 바로 그리시다니 대단하시네요.”
강성중 말에 관심이 가는지 신상철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런다고 보이냐?
종이를 들어 신상철에게 건넸다.
“봐 봐.”
종이를 받아 보는 신상철 얼굴에 놀라운 빛이 서려 있었다. 자기도 마음에 드나 보네.
“어때?”
“괜찮아.”
더는 볼 것이 없었다. 할 일도 많은데 시간 끌면 뭐해?
“내일부터 출근하시죠.”
강민희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일은 양재동 사무실에서 주로 하겠지만 여기에 들러서 설명 듣고 작업은 따로 해야 해서 번거로울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그럼 내일 양재동 사무실로 출근하세요.”
“알겠어요.”
강민희가 가자 강성중이 물었다.
“사장님! 양재동에서 여길 왔다 갔다 하면 시간이 아깝지 않으세요? 그냥 여기서 작업하는 게 좋지 않아요?”
나도 그 생각을 하긴 했는데 장비가 컴퓨터만 있는 게 아니고 커피숍이 큰 것도 아니라서 강민희까지 여기서 일하면 포화상태다.
그리고 웹디자인은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설명은 여기에 와서 듣고 일은 사무실에서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너 딴마음이 있는 것 같다.”
“절대 아닙니다.”
“미나가 이 사실을 알면 좋아하지 않을 텐데.”
“없던 일로 해 주십시오.”
이주희에게 웹디자이너 채용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 핸드폰을 드는데 벨이 울렸다.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염중섭입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조금 전에 동부지검 김도형 수사관이라는 사람한테 고문님을 찾는 전화가 왔습니다.)
드디어 유아영이 내가 던진 미끼를 물었네.
유아영이라면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왜냐하면, 예전에 유아영이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책을 읽고 되게 광분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천재 과학자의 의문의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그냥 넘기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는데 내 예상이 적중하였다.
아영아! 미안해.
“연락처 받았나요?”
(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인데 검찰에서 전화가 오는 겁니까?)
“별일 아니에요. 아빠와 관계된 일이에요.”
(저는 검찰에서 고문님을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고 해서 죄송합니다.)
염중섭도 나에 관해 이야기해 주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괜찮아요.”
(전화번호가 234-XXXX입니다.)
“알았어요.”
다시 핸드폰을 들어 이주희하고 통화하고 끊었다.
검찰하고는 언제 만날까? 빨리 만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러려면 현도 그룹 장주용 회장을 먼저 만나서 아빠가 뭘 연구 개발하고 있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그래 일단 전화해 보자.
현도 그룹 연락처를 확인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현도 그룹 회장 비서실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진민재라고 하는데 회장님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지금 회장님이 안 계십니다. 연락처를 남겨 주시면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나 바꿔 줄 수는 없을 테니 있어도 없다고 하겠지. 근데 오션의 진민재라고 해야 하나? 진상규 박사의 아들이라고 해야 하나?
아빠에 관해 물어보려면 아들이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진상규 박사의 아들 진민재라고 꼭 전해 주십시오. 제 연락처는 011-XXX-XXXX입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장 회장에게 연락이 오려나? 안 오면 어떡하지? 직접 찾아가야 하나? 일단 기다려 보자.
* * *
아침에 출근한 현도 그룹 장주용 회장은 바로 6월에 있을 소 떼 방북 관련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이번 소 떼 방북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젊었을 때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도망 나왔던 것에 대한 속죄 의미였고 두 번째는 현도 그룹이 살길을 도모하기 위한 돌파구였다.
92년 초 통일 국민당을 창당하면서 대선에 도전하여 김용삼과 맞섰다가 처참히 패한 후 전 정권 내내 정부의 심한 압박을 받았다.
승자의 너그러운 아량도 없이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듯 현도 그룹에 대한 경영 압박을 내내 견뎌야 했었다.
오죽하면 시중 은행권의 대출이 안 되어 씨티은행에서만 대출을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으로 숨죽이듯이 지냈다.
그러다 정권이 바뀌면서 다시 경영 일선에 나섰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의 압박으로 인해 현도 그룹이 많이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부의 압박으로 인해 대출을 받지 못하다 보니 다른 대기업보다 부실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여도 지금은 IMF 위기라 위기는 위기였다. 그 돌파구로 새 정부의 햇볕 정책에 선발 주자로 나서서 기회로 삼으려는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