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전화를 끊었다.
신상철뿐만 아니라 동기나 후배 중에 능력이 뛰어난 인재들도 많이 있는데 문제는 현재 대부분이 졸업하여 군대 갔거나 재학 중에 입대한 친구들은 제대 후 재학 중이라 바로 데려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좀 더 기다려야겠네.
오늘은 왠지 일하기가 싫어 컴퓨터 전원도 켜지 않았다.
커피 빨대를 쪽쪽 빨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3월 봄이라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계절에 맞게 변화가 있었지만, 삶에 지친 표정들은 변하지 않았다.
언제쯤 사람들 마음속에도 봄이 올까?
“미나야!”
앉아서 책을 보던 미나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마치 도둑질하다가 걸린 것처럼.
“네. 사장님!”
“왜 놀라?”
“갑자기 부르니까 그러죠. 왜요?”
“뭐 재미난 거 없을까?”
“갑자기 왜요?”
“마음이 뒤숭숭해서.”
“제가 오늘 도서관에서 책 빌려 온 거 있는데 그거 드릴까요? 마음이 뒤숭숭할 때는 독서만큼 좋은 게 없어요.”
“그러면 줘 봐.”
“네.”
정미나가 책 한 권을 건넸다.
책을 받아 보니 제목이 ‘살다 보면’이었다. 교양서적이라 재미없을 텐데. 바로 거절하면 그러니까 펼쳐서 보기 시작하였다.
역시나 첫 문장부터 따분한 글이었다.
* * *
한메일닷 이재영과 이택건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던 이재영이 잔을 내려놓고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택건아!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우리가 투자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그럴 거면 독일 바텔스만보다는 오션에서 받는 것이 더 좋지 않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문제는 지분을 40% 요구하니까 그게 문제지. 나도 오션에서 받는 게 더 좋아. 우리 한메일닷에도 유리하니까.”
“진민재가 진짜로 40%를 받으려고 하는 건 아닐 거예요. 원래 협상할 때는 처음에는 높게 부르고 협상 과정에서 점점 내려가며 접점을 찾는 거잖아요. 장사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처음에 좀 높게 부르고 흥정해서 깎아 주고 그러니 우리도 협상하다 보면 더 내려가지 않을까요?”
“나도 같은 생각인데 처음부터 40%를 불렀으니 내려가도 우리에게는 부담이라는 거야. 얼마까지 내릴 수가 있을까? 35%? 30%?”
“30%는 어때요?”
“사실 30%도 부담되는 건 사실인데. 진민재가 30%에 만족할지는 모르겠어.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이상을 원하는 것 같거든.”
“근데 선배! 다르게 생각해 보면 오션에서 한메일닷 지분을 많이 가져갈수록 우린 든든한 보험을 드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만큼 지분이 많기에 한메일닷이 무너지거나 성장이 더딘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즉, 우리가 오션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요. 그걸 생각하면 35%도 괜찮지 않을까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네 말을 들으니 그런 면도 있기는 하네. 다른 투자사라면 우리에게 도움을 그다지 주지 못하겠지만 오션이라면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요. 앞으로 우리는 후발주자로부터 거센 도전을 계속 받을 거예요. 또띠앙이 가장 좋은 예잖아요. 우리가 그들보다 자금력에서 밀리기에 따라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도 있어요. 그렇기에 우리는 오션의 도움이 절실해요. 지금 이메일 무료 서비스로 인해 자금 부족으로 우린 무조건 투자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어차피 투자받는 건데 지분 더 주고 든든하고 안전한 울타리로 들어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아요. 모험해서 크게 먹기보다는 안전하게 적게 먹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저는 진민재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해요. 일단은 30%를 우리의 마지막 노선으로 하고 상황 봐서 최대 35%까지는 받아들이는 거로 해요.”
“그게 최선일까?”
“지금 상황에서는 우린 선택지가 별로 없어요. 오션을 배제하고 독일 바텔스만에서 투자를 받아도 오션 엔진을 사용하지 못하면 다른 사이트에 밀릴 수도 있어요. 그럼 이도 저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는 거죠.”
이재영은 고민이었다.
이택건 말처럼 괜히 욕심부리다가 회사가 망하면 모든 것을 날리게 된다. 그렇다고 진민재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어느 정도 적당한 요구여야지 들어주겠는데 지분 40%라니? 그건 한메일닷을 가지겠다는 말과 같았다.
물론 이택건과 자신의 지분을 합치며 60%라 경영권을 유지하는 데 문제는 없지만, 따로 분리하면 오션이 최대 주주가 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진민재의 요구가 이해는 된다.
오션 엔진을 한메일닷에서 사용하게 된다면 한메일닷이 오션의 강력한 경쟁자가 된다는 것이기에 지분이라도 40%를 확보하려는 의도이다.
머리가 아팠다.
“알았어. 일단은 진민재를 만나 협상해 보자.”
자신의 말에 좋아하는 이택건을 바라보며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근데 선배! 진민재가 프로그래머지만 사업에도 재능이 있지 않아요? 오션 엔진을 사용하겠다는 우리의 제안에 역으로 투자 제안을 하니까요. 저는 진민재가 투자 제안을 할 때 무척 놀랐다니까요. 그럴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 했어요.”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진민재 입에서 사용료를 더 많이 받겠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역시 천재는 다른가 싶었다.
“그만큼 우리 한메일닷이 가능성이 있다는 거겠지.”
“저는 그것보다는 진민재가 한메일닷을 키워 주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가 오션 검색 엔진을 사용하지 않으면 사실 다른 사이트와 별 차이는 없잖아요. 이메일 무료 서비스로 가입자가 많이 늘었지만 다른 사이트에서 무료 이메일 서비스를 하면 그 장점도 사라지는 거니까요. 물론 우리 한메일닷을 키울 가치가 있으니까 그런 제안을 했겠지만요.”
* * *
오늘도 출근하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박도진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말씀하신 신상철 조사가 끝났습니다.)
아직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벌써요?”
(신분이 확실한 자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또 신상철은 행동반경이 단순하여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자세히는 아니지만, 사장님이 기다리실 것 같아 먼저 조사한 자료를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보시고 부족하다면 다시 더 조사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제가 지금 커피숍으로 가도 됩니까? 30분이면 도착합니다.)
“그러세요.”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하루에 한 통 올까 말까 한데 연이어 전화라니? 오늘 날 잡았나?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한메일닷의 이재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정했나 보네.
“안녕하세요?”
(저번에 고문님이 제안하신 투자에 우리도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그럼 내일 오전 어떠세요?”
(좋습니다.)
“제가 오전에 찾아갈게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자고 하는 것을 보면 내가 제안한 지분 40%는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40%를 받으면 좋지만 무리한 요구라 30% 이상만 받아도 만족하였다. 내일 가 보면 알겠지.
시간 재고 왔는지 정확히 30분 후에 박도진이 왔다.
앉자마자 자기 할 일만 하겠다는 듯 무뚝뚝하게 서류 봉투를 나에게 건넸다.
사람이 만나면 안부 인사라도 나누고 사담이라도 조금 나누다가 용건으로 들어가야지. 그래도 쓸데없이 말이 많은 것보다는 좋았다.
“여기 있습니다.”
봉투를 받아 자료를 꺼내보았다.
신상철은 대학 졸업 후 방위를 마치고 다우 정보통신 회사에 취업하여 다니고 있었다.
부서는 게임 개발 파트였고 집은 봉천동 그대로였다.
회사 생활은 역시나 다른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왕따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성격을 좀 바꾸면 안 되나?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건데.
“회사 동료들하고 전혀 어울리지 못하나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 직원이 회사 동료한테 알아보았는데 회사 내 평판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같이 일하는 팀원들 사이에서도 신상철이 독불장군식으로 일을 하다 보니 불화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실력은 있는지 지금까지는 회사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번 봄철 정기 인사에서 한직으로 발령 날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들어봐도 회사에서 많이 참은 것 같기는 합니다. 왜 그렇게 회사 생활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럴 바에는 혼자 일을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러니까? 왜 그런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신상철이 전공을 컴퓨터로 선택한 거였다.
다른 전공보다는 혼자서 일을 할 수 있는 게 컴퓨터니까. 그래도 실력을 인정받았다니 실력이 있다는 것이네.
그 성격에 실력도 없으면 어디 가지도 못할 테니까.
“게임 개발 파트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게임 개발 파트는 신상철이 원해서 간 것이라고 합니다. 게임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하긴 혼자서 하기에는 게임만 한 것이 없지. 온라인으로 여럿이 해도 결국은 혼자서 게임 할 수 있으니까.
근데 신상철이 게임을 좋아했다는 것은 처음 알았네. 대학 다닐 때는 몰랐는데. 서로 데면데면했으니까 알 수가 없었겠지.
“신상철이 자기가 한직으로 발령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네. 동료들이 전부 아는 것으로 보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 더 회사 다니기가 싫겠네.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을 개발 못 하니까. 신상철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더 잘되었다.
“집안 형편에 대해서는 안 알아봤나 보네요?”
“네. 그렇습니다.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봉천동에 있는 작은 주택에서 사는 것으로 보아 넉넉한 형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원하시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아니에요. 됐어요.”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근데 신상철에게 어떻게 접근하나? 다른 사람 같으면 직접 찾아가서 투자 제안하면 되는데 신상철은 모르는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무조건 피하거나 거부할 텐데.
쉬운 게 하나도 없네.
다음 날 오전 한메일닷으로 향하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오늘도 이택건이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문님!”
“안녕하세요? 사장님 계시죠.”
“물론입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죠.”
“네.”
이택건과 같이 사장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내 인사에 반갑게 화답하는 이재영이었다.
“고문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앉으시죠.”
“네.”
셋이 소파에 앉았다.
이재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다 같은 개발자로 프로그램 개발하는데도 머리 아픈데 협상까지 골치 아프게 줄다리기하지 말고 서로 한발씩 양보했으면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잠시 후에 제가 웃으며 이 방을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제 투자 제안에 답은 무엇입니까?”
“솔직히 지분 40%는 너무 과한 요구입니다. 창립자인 저나 이택건보다 더 많은 지분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두 분이 합치면 60%이지 않습니까? 동업했기 때문에 나누는 거지 정상적이라면 무리한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한메일닷의 상황이 이런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진 고문님께서 한메일닷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특수한 상황은 한메일닷의 입장이지 저의 입장은 아닙니다. 제가 남의 입장까지 생각해 주면서 투자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