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잠시 생각하던 염중섭이 입을 열었다.
“듣고 보니 고문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코리아 오션만 보면 한메일닷의 제안을 거부하고 투자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오션 전체를 보면 투자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저의 입장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대표님이 코리아 오션만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저 또한 오션 전체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고요.”
“그럼 투자하시면 지분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제가 생각하는 지분은 최소 30%에서 40%예요. 우리가 오션을 사용하게 해 준다면 그건 한메일닷을 키워 준다는 의미예요. 그럼 최소 지분 30% 이상은 확보해야 해요. 안 그러면 우리가 손해거든요. 지금은 한메일닷도 초창기라 투자금도 많이 들지는 않을 거예요. 한메일닷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션이 필요하기에 투자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커요.”
“제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럼 제가 한메일닷을 만나 투자 제안을 해 보겠습니다.”
“대표님은 오션 사이트 개편 때문에 바쁘잖아요? 그것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한메일닷 투자 건은 제가 맡을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 한가해요.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염중섭이 갔다.
할 일이 생겼네. 어떻게 맨날 앉아서 프로그램만 개발할 수 있겠어? 가끔은 다른 일도 해야지.
또 한메일닷 사람들 만나서 투자 건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그런 인재들하고는 인맥도 맺을 수 있으니 나쁘지는 않지.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하는데 오늘 연락해 볼까?
* * *
이택건은 사무실에 들어오며 컴퓨터를 보고 있는 이재영에게 물었다.
“선배! 오션에서 연락 왔어요?”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려 이택건을 바라보며 웃었다.
“연락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연락이 와? 자기들도 내부적으로 검토해야 하니 시간이 더 걸리겠지. 느긋하게 마음먹어.”
“받아들일까요?”
“글쎄? 내가 오션 입장이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선배는 지금 누구 편이에요?”
“누구 편이 아니라 현실을 말하는 거지. 나도 누구보다 오션에서 우리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해.”
“약소 국가의 설움처럼 약소 사이트인 우리도 서럽네요. 우리 한메일닷도 빨리 성장해서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들었으면 좋겠네요.”
“나도 마찬가지야. 사이트 개편 작업은 언제부터 할 거야?”
“지금 제가 어떻게 개편할지 구상 중이니까 구상이 끝나면 그때 일정 잡을 거예요.”
“알았어.”
그때 사무실 전화가 울리자 이재영이 받았다.
“네. 한메일닷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션의 진민재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재영입니다.”
(귀사에서 제안하신 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데 언제 시간이 되십니까?)
“우리는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오션에서 편한 시간을 말씀해 주시면 맞추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 오후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 이택건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오션에서 전화 온 거예요?”
“응. 우리가 제안한 건으로 보자는데. 다음 주 월요일 오후에 만나기로 했어.”
“선배 연락이 왔다는 것은 우리 제안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거절할 거면 굳이 만날 필요가 없으니까. 희망을 가져도 되겠네.”
“정말 다행이네요. 월요일에 협상도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혹시 오션에서 다른 조건을 내걸지 모르니까 이번 주 주말에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거예요.”
“당연하지. 나도 생각해 볼 테니까 너도 생각해 봐.”
“알았어요. 선배.”
갑자기 이재용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근데 진민재 이름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누구지?”
“네? 진민재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응.”
“진민재가 오션 개발자잖아요.”
“아! 맞다. 진민재가 오션 개발자지.”
말을 하고서는 이재영의 두 눈이 커졌다.
“뭐야? 오션 개발자가 직접 전화한 거야? 대통령 만나고 미국에 안 갔나?”
“그런가 보네요. 코리아 오션 법인 설립하고 아직 안 갔나 보네요.”
“대박이네. 그럼 오션 개발자를 우리가 직접 만나는 거야? 천재라고 하던데 난생처음 말로만 듣던 천재를 직접 만나다니 이게 꿈인가?”
“저도 제안을 떠나서 프로그래머의 우상인 진민재를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선배 저도 만날 때 참석할게요.”
“당연하지.”
* * *
오늘은 HQ 컨설턴트 정하나 실장과 저녁 약속이 있어 강남에 있는 약속 장소에 도착하였다.
고층 빌딩에 레스토랑이 있어서 모르는 사람은 오기도 힘들 것 같았다. 장사하려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하지 않나?
안으로 들어가 예약자 정하나 이름을 대자 직원이 창가 쪽 자리를 안내해 줘 앉았다.
손님이 없을 줄 알았는데 테이블이 반 이상이 차 있었다. 메뉴판 가격을 보니 비싸던데 그래도 많네.
하긴 IMF가 서민들만 힘들지 돈 많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돈 벌 수 있는 기회였지. 은행에 저금만 해도 이자가 20% 가까이 되었으니.
집값도 많이 내려가 줍줍도 가능했고.
창밖을 보니 야경이 보였다.
IMF라고 하지만 야경을 보면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수많은 차가 끊임없이 줄지어 가는 광경을 보다 보니 IMF는 없는 세상인 것 같았다.
“일찍 오셨네요?”
정하나 실장이 생긋 웃으며 내 앞에 앉았다.
나도 일찍 오기는 했지만 정 실장도 10분 일찍 왔다. 보통 여자들은 정각 아니면 좀 늦게 오지 않나?
일로 만난 사이라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실장님도 일찍 오셨네요.”
“전 회사가 이 근처라 퇴근하고 바로 온 거예요. 이 집 스테이크가 아주 맛있어요. 이제 주문할까요?”
“네. 그러죠.”
직원에게 주문하였다.
“와인도 한잔하실래요?”
“아니에요. 운전해야 해요. 고문님은 차 안 가지고 오셨어요?”
아직 차를 못 샀다. 산다고 하면서 차 쓸 일이 없다 보니 자꾸 미루게 되었다.
미국은 차가 없으면 이동하기가 힘들어서 필수지만 한국은 대중교통이 잘되어 있어 차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네.”
“드시고 싶으면 드세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혼자 마시기 그래서 그래요? 같이 마셔 줄게요.”
“저 술 좋아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식사를 맛있게 하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정하나가 약간 들뜬 듯 입을 열었다.
“저 여기 오랜만에 왔더니 기분이 좋네요.”
“오고 싶으면 오면 되지 않아요?”
“혼자 오기도 그렇고 친구랑 오기도 그래요. 이런 곳은 남자 친구랑 와야 하는데 고문님이 남자 친구는 아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연인으로 볼 테니까요.”
눈이 높아서 남자가 없는 거다. 하는 일이 뛰어난 인재들만 관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이 높아진 거겠지.
“또 오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여기 스테이크가 진짜 맛있네요. 미국에서도 이런 맛 찾기가 힘들거든요.”
“갑자기 제가 나이가 6살 정도 더 어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고문님 같은 남자 찾기가 힘들거든요. 제가 30살이라 고문님보다 5살이나 많아 아쉬워요. 5~6년 늦게 태어나지 그랬어요?”
내가 보기에도 정하나 실장은 지성과 미모를 갖춘 보기 드문 커리우먼인 매력적인 여자였다.
만약 나이가 나보다 더 어렸다면 아이노에 이어 내가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게요.”
“고문님 주변에 여자들 많죠?”
없다고 하기에도 그랬다.
“글쎄요? 저도 인연을 찾고 있고 실장님도 인연은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짚신도 짝이 있잖아요.”
“그건 짚신이니까 짝이 있는 거죠. 사람은 짝이 없을 수도 있어요.”
“그렇기는 하네요.”
한동안 잡담을 나누었다.
“고문님은 참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뭐가요?”
“제가 알기로는 고문님은 진성 그룹 전임 진규촌 회장님 손자인데 대학을 국내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핀란드로 유학 가고 그 이후에 미국으로 대학원을 가서 미국 시민권까지 취득했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 보였거든요. 진성 그룹의 지원을 받으면 더 성장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픈 집안사를 모르니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고.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 주변 환경이 개천은 아니었지만, 진성 그룹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고 오직 제힘만으로 홀로서기를 하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여기 오기까지 진성 그룹의 도움을 받은 것은 하나도 없어요. 오직 저의 힘만으로 이룩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보면 볼수록 대단해요. 그러니까 제가 나이가 많다는 게 더 아쉽네요.”
날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화제를 돌려야겠다.
“HQ 컨설턴트에서는 IT 관련 젊은 인재들도 관리하나요?”
“보통 헤드헌팅 회사에서 관리하는 인재들은 40대 이후가 많아요. 그만큼 경력도 있고 검증되었기 때문이죠. 젊은 층인 2~30대는 고문님처럼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관리를 하지 않아요. 하지만 요즘 IT가 떠오르며 수요가 많고 대세다 보니 IT 인력에 한해 젊은 층도 관리하기 시작했어요. 혹시 IT 인력이 필요하신 거예요?”
“그건 아니고요. 갑자기 궁금해서요. 필요하면 의뢰할게요.”
그 이후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 * *
아침에 일어나 물 한 잔 마시고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았다.
좋은 소식보다는 안 좋은 소식들이 더 많아 신문을 덮으려는데 광고란에 눈에 익숙한 것이 보였다.
MP3 플레이어 엠피고 광고였다.
(원하지 않은 곡까지 CD 통째로 구매할 필요가 없다. 이제 원하는 곡만 듣자. 엠피고가 해결해 드립니다.)
이런 문구와 함께 엠피고를 듣는 남녀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드디어 출시를 했네. 자본도 부족하다면서 신문 광고까지 내고 무리했네.
가만 하노버 정보통신 박람회에 갔다 왔을 텐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동안 깜빡하고 있어 연락 한 번도 하지 못했네.
나중에 한번 찾아가야지.
신문을 내려놓고 욕실로 향하였다.
* * *
커피숍에서 개발하다가 오늘 한메일닷에 가야 해서 일찍 점심을 먹고 출발하였다.
자기들이 오겠다고 했지만 오션에서 만나기도 그렇고 여길 알리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직접 가서 사무실도 구경하고 싶었다.
한메일닷 사무실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직원이 몇 명 안 되었다. 하긴 초창기니까 그렇겠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나를 본 한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내 앞으로 달려왔다.
“진민재 개발자입니까?”
“네. 맞아요. 제가 진민재입니다.”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이택건이라고 합니다.”
이자가 한메일닷을 설립한 두 명 중의 하나이구나. 근데 왜 나를 매우 반가워하며 깍듯이 대하지?
오션 사용하게 해달라고 그러는 건가?
“안녕하세요?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의 우상이십니다.”
나보다 몇 살 더 많은 것 같은데 나보고 우상이라니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과찬이십니다. 누구의 우상이 될 정도는 아닙니다.”
“자격이 충분합니다. 개발자들이라면 전부 진민재 개발자처럼 오션 같은 대박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성공하는 것이 꿈일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많은 프로그래머들이 진민재 개발자를 보며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 스스로 다짐하며 오늘도 열심히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말하는 표정을 보니 오션 때문이 아니라 진짜로 진심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