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전 생에서도 손정우 회장이 김도중 대통령을 만났나? 그때 난 미국에 있어서 잘 알지 못하였다.
가만! 이맘때 MSS 볼 게이트도 한국에 가서 김도중 대통령을 만났다는 말은 들은 것 같은데.
설마 김도중 당선인이 둘을 다 만난 건가?
“초대받으신 게 손 회장님 혼자이신가요?”
“원래는 저 혼자 초대받았지만 제가 다시 건의하여 미국 MSS 볼 게이트도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볼 게이트하고는 저랑 친구입니다.”
아! 그랬구나.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서로 친한 친구 관계인 것은 몰랐다.
그러면 둘이 한국에 오면 손 회장은 나를 만나려고 할 텐데 그럼 나도 볼 게이트를 만나게 되는 건가?
인수 제안을 거절했다고 나에게 억하심정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 이미 다 지난 일인데.
“혹시 회장님이 저를 만난 것을 볼 게이트도 아시나요?”
“네. 압니다. 제가 작년에 미국 갔을 때 고문님을 만나 보고 미국을 떠나기 전에 볼 게이트도 만났습니다. 고문님이 일본에 오셔서 저하고 만난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 하지 않았습니까?”
알 듯 모를 듯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MSS에서 오션 인수 제안을 했고 거절했다는 말을 작년에 들었습니다. 뭐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한국에 가면 고문님을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말은 했습니다. 시간이 괜찮다면 셋이서 한번 만났으면 합니다.”
난 별로 만나고 싶지는 않은데 손 회장인 중간에 껴 있어 거절하기가 애매하네. 까짓거 만나지. 못 만날 것도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그 친구가 좋아할 겁니다.”
“저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실리콘 밸리의 악동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인성이 나쁜 친구는 아닙니다. 만나 보시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저도 좋지요. 근데 대통령 당선인을 만나 무슨 건의를 하시려는 겁니까?”
“두 가지입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IT 산업은 앞으로 계속 발전할 것이고 끊임없이 진화해 나갈 겁니다. 그렇기에 21세기는 IT가 산업이 중심으로 자리 잡을 겁니다. 미리 준비하는 자만이 성공하는 법입니다. 첫 번째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위해 국가의 꿈나무인 청소년들에게 컴퓨터를 더욱 친숙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대학 입시에 컴퓨터 과목을 필수로 지정해야 한다고 건의할 생각입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조기에 구축하고 가입자들에게 3년간 고속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건의할 생각입니다.”
오션을 한국에 서비스하기 위해 에릭이 한국의 인터넷망 상황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은 이미 1995년 3월에 초고속 정보통신기반 구축 종합 계획을 확정 발표를 하였고 진행을 하고 있지만, 진행 속도는 느렸다.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조기에 구축이야 가능할 수는 있어도 무료 지원이나 컴퓨터 필수 과목은 현실성이 없었다.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초고속 인터넷망이 필요하기는 하죠.”
“그렇습니다. 현재 초고속 인터넷망은 미국이 1위이고 2위가 일본입니다. 한국도 대세 흐름에 따라야 할 겁니다.”
“그렇죠.”
손 회장과 헤어진 후 바로 민박집으로 왔다.
고정욱은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습니까?”
“그러시죠.”
소파에 앉았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셨네요.”
“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말씀하세요.”
“제가 일본에 온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아뇨. 모르겠습니다. 휴가 온 겁니까?”
“아닙니다. 일본에서 오션을 작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점유율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유료 광고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 법인을 설립하려고 왔습니다.”
“당연합니다. 유료 서비스를 하려면 현지 법인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오션 일본 법인의 CEO가 되시겠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놀라며 되물었다.
“네? 저 말입니까?”
“네. 제가 보기에 충분한 자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2년 동안 공백기가 있기도 하고 그런 중요한 자리를 맡기에는 부족합니다.”
“공백기를 가졌으니 이제는 슬슬 일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직 한창인 나이입니다. 능력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좀 당황스럽습니다. 생각 좀 하고 결정하면 안 되겠습니까?”
“당연히 됩니다. 이틀 드리겠습니다.”
“너무 짧습니다. 좀 더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오래 생각한다고 반드시 현명한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하시면 이틀이면 충분할 겁니다. 또 저도 빨리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시간을 많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방으로 올라왔다.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지만 OK 하면 좋은 거고 NO 하면 일본인 3명 중의 한 명을 선택하면 된다.
이영심 여사는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다가 남편과 민박하는 젊은 청년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얼핏 들었다.
젊은 청년이 이 층으로 올라가자 하던 일을 멈추고 남편에게로 갔다.
“무슨 말이야?”
“뭐가?”
“청년이 한 말?”
“들었어?”
“대충.”
“나보고 오션 일본 지사의 사장이 되라고 하네.”
“근데 뭘 고민해? 당장 한다고 말하지. 당신이 며칠 전에 그랬잖아. 오션이 앞으로 꽤 유망하다고. 기회가 왔으면 무조건 잡아야지. 언제까지 놀 거야?”
“그거야…….”
말을 하다가 멈추자 이영심 여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나 이제 건강해. 나 때문에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나 간호하는 모습을 보는 내 심정은 어땠을 것 같아? 당장이라도 나가서 일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내 몸이 안 좋다 보니 목까지 올라왔다가 삼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나 이제 괜찮아. 그러니까 당신도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일해. 남자가 집에만 있으니까 무기력하게 보여. 당신도 일하고 싶어 하잖아?”
“괜찮겠어?”
“내가 요즘 당신 보고 도와달라고 한 적 있어? 애들도 있으니까 괜찮아. 청년이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가서 하겠다고 해.”
“이틀 시간을 주어서 괜찮아. 조금 전에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바로 가서 하겠다고 하면 내가 뭐가 돼?”
“언제 말할 건데?”
“내일 저녁에 말할게.”
“딴마음 먹지 마. 무조건 한다고 해. 알았지?”
“알았어.”
* * *
진성 그룹 회장 진동훈은 보고서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다음 달 진성 건설 어음이 얼마라고?”
진동훈이 짜증스럽게 묻자 앞에 서 있던 진성 건설 사장 장호식이 긴장한 채 얼른 대답하였다.
“다음 달 돌아오는 어음은 70억 원입니다. 다음 달은 계열사의 자금 지원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월부터 5월까지 돌아오는 어음들은 금액이 적어 그나마 괜찮은데 문제는 6월입니다. 무려 140억 원이나 됩니다.”
“막을 방법은 있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으나 지금 시중에 돈줄이 전부 메말라 있는 상황이라 힘든 상황입니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거야? 뭐라도 해야지. 지난주에 동신 건설이 최종 부도났어. 우리도 그 꼴 당하고 싶어?”
“지금 회사채를 발행해도 사 주는 투자사들도 없고 있다 해도 이자가 너무 높아 감당하기도 힘듭니다. 은행권 대출도 거의 막혔다고 보면 됩니다. 있다면 사정이 나은 계열사의 지원을 받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사정이 나은 계열사가 지금 어디 있다고? 다들 힘들어. 다음 달 어음도 겨우 지원받는 건데. 구조조정은 어떻게 되고 있어?”
“다음 달부터 급여가 높은 부장급부터 차장, 과장급까지 반 정도를 구조 조정할 계획입니다. 계약이 끝나는 임원들도 재계약을 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회사가 부도나게 생겼는데 반 정도 가지고 되겠어? 3분의 2 정도로 하고 그 밑의 직원들도 줄일 수 있으면 최대한으로 줄여.”
“그럼 업무 자체가 힘들어지게 됩니다.”
“지금은 최대 위기야. 당장 회사가 쓰러지게 생겼는데 업무가 중요해? 어차피 앞으로 발주 받는 것도 줄어드는데 당분간은 힘들더라도 남은 인원으로 해야지. 그렇다고 건설 노동자를 줄일 수는 없잖아. 지금은 뼈를 깎는 고통을 전부 감수해야 할 때야. 나중에 위기를 벗어나면 그때 다시 채용하면 되니까. 알았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회사 운영비도 절감할 방법을 찾아. 또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은행권 대출을 좀 알아보고.”
“알겠습니다.”
귀찮다는 듯 나가라는 듯 손짓을 하였다.
그걸 본 진성 건설 사장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
머리가 질끈 아파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왜?”
(진성 어페럴 박민수 사장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돈 달라는 전화일 것이다.
작년 하반기부터 진성 건설과 진성 어페럴의 자금 유동성 문제가 불거져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힘든 시기가 한 번도 없었다.
망할 놈의 IMF. 이놈의 IMF로 인해 멀쩡한 기업들까지 몸을 사리는 바람에 가뜩이나 어려운데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지는 악순환이 되고 있었다.
“나중에 전화한다고 해. 그리고 전미정 감사 연결해 줘.”
(알겠습니다.)
자신이 그룹 회장이 되고서 와이프는 그룹 감사가 되어 일하고 있었다. 부인과 자금 문제를 상의해야 할 것 같았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전화를 받았다.
(나야, 왜?)
“지금 바빠? 가도 돼?”
(지금 회의 중이거든. 30분 있다가 와.)
“알았어.”
전화를 끊었다.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를 보다가 지금은 일한 기분도 아니어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간 곳에 신문이 보였다.
저 신문은 작년 신문이지만 미국에 가 있는 자신의 조카 기사가 있어서 한쪽에 놔둔 신문이었다.
신문을 들어서 보았다.
‘오션 나스닥 상장, 대박 신화를 기록하다.’라는 제목이 있었다.
형이 천재라 그 아들도 머리를 물려받아 조카도 천재인지 유학 중에 오션이라는 검색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더니 결국은 나스닥에 상장하여 대박을 쳤다.
프로그램 하나로 이렇게 대박을 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기사를 보고 오션에 접속하여 자신도 사용해 봤는데 원하는 단어를 입력하고 검색하는 것이 전부인데 이게 왜 그리 대단하고 가치가 크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MSS처럼 컴퓨터 운영체제라면 이해가 가겠지만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 중의 하나일 뿐이고 검색하는 사이트도 많은데 왜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다.
또한, 한국에서도 현재 오션이 서비스하고 있는데 인기라고 한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카에게 잘해 줄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그랬다면 지금과 같이 사업이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을 텐데.
하지만 이제는 남과 같은 상태이고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작정인지 그놈이 미국 시민권까지 취득하였다.
세상일, 사람 일 앞은 모른다고 하지만 극적인 반전이었다. 누가 그놈이 그렇게 클 줄 알았나?
아버지 장례 때라도 잘해 줄걸. 그나마 남아 있던 정까지 끊어 버렸으니 돌이킬 수는 없었다.
시계를 보자 30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