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자 차가운 공기가 사라지고 훈기가 돌았다.
테이블이 몇 개 안 되는 작고 아담한 커피숍이었고 주문대에 40대 중반쯤의 아줌마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커피를 한 잔 주문하여 창가 쪽에 앉아 한 모금 마셨다.
따듯한 커피가 식도를 타고 들어오자 얼어붙었던 내 몸이 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창밖에는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며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저들은 어디를 바쁘게 가고 있을까? 다들 갈 곳이 있나? 나만 없는 건가?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당장 할 일은 오션 한국 지사 설립과 일본 지사 설립이었다.
한국 법인 설립도 해야 하고 사무실도 얻어야 하고 직원도 모집해야 하고 나 혼자 할 생각을 하니 아찔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굳이 내가 다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오션 한국 법인 사장 먼저 채용하고 사장 보고 다 하라고 하면 되는 거잖아.
나야 진행 상황 보고만 받으면 되는 거고.
사장은 어떻게 채용하지? 보통 외국 기업들은 헤드헌팅 업체를 통해 채용한다. 나도 그래야겠네.
내일 헤드헌팅 업체에 가야겠다. 일본도 이런 식으로 하면 될 것 같았다.
한국 법인 사무실을 구한다고 해도 내가 사무실에 나가지는 않을 거다. 사장도 직원들도 내가 있으면 불편할 테고 나도 불편하였다.
미국에서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사무실에 거의 가지 않았으니까.
또 내가 사무실에 있으면 작은 집 식구들이나 고모가 찾아올 수도 있었다. 난 작은 집 식구들과 고모 식구들을 다시는 보고 싶지도 마주치기도 싫었다.
할아버지 장례식을 끝으로 이제 서로 남이고 볼일도 없으니까.
나의 우군이자 귀엽고 예쁜 동생인 서영이 빼고는.
작은아버지나 작은 엄마, 고모도 언론을 통해 이제는 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거다.
한국에 오션을 서비스하면서 한국 언론에도 내가 오션의 개발자이며 나스닥에 상장한 기사가 나왔으니까.
내가 미국에서 재벌이 되었기에 IMF로 회사가 어려워지면 분명 나를 찾을 것이다.
물론 내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찾아오지 않겠지만 서영이를 만나게 되면 서영이는 거짓말을 할 줄 몰라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서영이에게 거짓말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서영이까지 만나지 않고 싶지는 않았다.
사무실에 가지 않으면 갈 곳이 없어지는데. 집에서만 있기에도 뭐하고? 따로 사무실을 얻어도 사무실에 나 혼자라 별로였다.
앞으로 내가 개발할 프로그램들을 생각해 보았다.
일단 스마트폰 OS를 개발했지만, 기본적인 것만 개발했기에 업데이트도 해야 하고 또 스마트폰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앱이 필요하다.
스마트폰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소비자에게 강하게 어필하여야만 하는데 그게 바로 앱이다. 그래서 망고가 성공한 이유였다.
노카아가 스마트폰을 먼저 개발하고서도 실패한 이유가 앱에 있었다. 앱을 소홀히 했기에 앱이 없다면 굳이 스마트폰을 사용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수많은 앱을 내가 다 개발할 수는 없고 오션 본사에서 필요한 앱을 개발하고 또 여러 IT 업체에서 개발하여 등록하면 되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앱은 내가 개발할 생각이었다.
그중의 하나가 코코아 톡이었다.
이전 생에서 미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앱이 있었지만 내가 둘 다 사용한 결과 코코아 톡이 기능도 많고 제일 뛰어나면서 좋았다.
이번 생애서는 코코아 톡을 전 세계에 뿌릴 생각이었다.
또 너튜브나 티톡, 인스타를 내가 개발하여 선점할 생각이었다.
그 밖에 페이스 등 여러 가지가 있기는 하지만 전부 선점하기에는 너무 양심에 걸려 이 정도만 할 생각이었다.
이것만 해도 굉장한 거니까.
스마트폰 OS 업데이트, 코코아 톡, 너튜브, 티톡, 인스타를 개발하려면 개발 장소가 필요한데 집에서 하기는 싫었다.
집은 쉬는 공간인데 미국에서 집에서만 일하다 보니 집이 집이 아니고 일터 같아서 싫었다.
문뜩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노트북을 가지고 커피숍에서 일했던 기억이. 고개를 돌려 커피숍 안을 둘러보았다.
작고 아담하고 손님이 나밖에 없는 것이 한가했다.
이런 커피숍 하나 차려서 일하면 되겠네.
내가 커피숍 차려서 돈을 벌 것도 아니니까 여기처럼 한가하고 작은 커피숍이면 되고 운영은 알바 채용해서 하면 되니까.
그럼 내가 집 말고 갈 곳이 생기고 일하다 쉴 때 창밖을 내다보면서 쉬어도 되고.
내가 주인이니까 커피나 차도 마시고 싶으면 마음대로 마시고 하루 종일 컴퓨터 해도 뭐라 할 사람도 없으니까 좋네.
다음 날 아침 집을 나와 집 근처 번화가에 있는 부동산 중개소로 들어갔다.
50대 초반의 남자가 신문을 보다가 얼른 일어나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리로 앉으십시오.”
과한 친절에 부담감을 느꼈다. 집 소개해 준 부동산으로 갈 걸 그랬나?
“집 알아보시러 오셨습니까?”
“집은 아니고 커피숍 할 상가를 알아보러 왔습니다.”
“젊은 분이 창업하시려는군요. 신규로 하실 겁니까? 아니면 기존 매장을 인수하실 겁니까?”
신규로 하면 새로 전부 세팅해야 해서 일만 생긴다.
“이왕이면 기존에 운영하던 커피숍을 인수했으면 해요.”
“그럼 원하는 매장 크기나 조건이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작고 아담하고 한가한 그런 커피숍이었으면 해요.”
내 대답을 들은 남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 보통 사업하면 잘되는 곳을 원하는데 한가한 곳을 원한다고 하자 날 미친놈 또는 장난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곳이 권리금도 없고 월세도 싸잖아요. 제가 다시 일으킬 자신이 있어서 그래요.”
그제야 표정이 밝게 살아났다.
“젊은 분이 자신감이 넘치시니 보기 좋습니다. 마침 그런 곳이 여러 곳 나와 있는데 보러 가시겠습니까?”
“그런 곳이 많나요?”
“IMF 시기 아닙니까? 요즘 장사가 안 되어 다들 힘들어합니다. 그러니 가게를 내놓는 곳이 많은데 거래는 거의 안 되고 있습니다.”
“그렇겠죠. 보러 가죠.”
“그럽시다.”
중개인과 여러 커피숍을 둘러보고 다음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봤던 곳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다. 사장이 30대 초반의 여성이라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았다.
특히 매장이 작아 테이블을 늘리려고 창 쪽에 쭉 테이블을 설치해 놓은 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저쪽 자리를 내 전용으로 정하고 일하면 되겠다. 결정했다.
“여기로 할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여기가 다른 곳보다 좀 외진 곳이지만 잘 꾸며져 있고 여러 조건들이 좋기는 합니다.”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다른 곳보다는 좀 한가하겠지만 나로서는 제일 좋은 조건이었다.
여사장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저기! 매출이나 다른 것은 궁금하지 않으세요?”
딱 보니 손님이 하나도 없는 것이 매출도 적을 것 같은데 그거 알려 줘서 내가 계약 안 하면 어떻게 하려고?
양심적인가? 나야 매출은 상관없고 월세도 싼 편이라 괜찮았다.
“권리금 없고 보증금 얼마이고 월세가 얼마인지 알면 됐죠. 아! 그리고 여기 있는 커피머신, 테이블 등 집기 같은 것을 전부 다 넘기시는 건가요?”
“원하시면 그렇게 할게요. 대신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셔야 해요.”
“그거야 당연하죠. 계약하시죠.”
바로 부동산으로 가서 건물주를 불러 계약을 하였다.
커피숍은 2월 1일부터 인수하기로 하였다.
계약을 끝내고 바로 강남에 있는 헤드헌팅 업체로 향하였다.
제일 큰 헤드헌팅 회사라 그런가? 사무실 입구부터 고급스러웠다. 헤드헌팅 회사가 돈을 많이 버나?
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입구와는 다르게 직원은 많지 않았다.
앞쪽에 있는 여직원이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오전에 전화 드렸는데 오션에서 왔습니다.”
“아, 그래요. 이쪽으로 오세요.”
“네.”
여직원을 따라 어느 작은 회의실 같은 곳에 들어왔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차 드릴까요?”
“네. 고맙습니다.”
잠시 기다리자 꽤 미녀인 20대 후반의 커리우먼 여성이 차를 들고 들어와 내 앞에 조심스레 차를 내려놓고 건너편에 앉았다.
명함을 나에게 건넸다.
“안녕하세요? HQ 컨설턴트 정하나 실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진민재입니다.”
“아침에 연락 받고 놀랐어요. 오션의 개발자께서 직접 연락해서 방문하신다고 해서요. 기사에 난 사진을 보기 했지만, 실물이 훨씬 더 잘생겼네요. 젊은 나이에 오션을 개발하시고 미국에서 성공도 하시고 부럽네요.”
국내 언론에서는 사진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미국 기사를 보았나?
“실장님도 상당한 미녀이신데요. 남자들에게 인기 많겠어요.”
“호호호,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제가 올해 30인데 아직 결혼도 못 하고 있어요. 집에서 시집가라고 얼마나 성화인지 집에 들어가기 싫을 정도예요. 특히 명절 때면 친척 어르신들까지 가세해서 전 명절이 싫어요.”
저건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다. 독신주의자가 아니면 분명 눈이 높아 웬만한 남자들은 눈에 들지 않는 것일 테고.
“인연이 어딘가에는 있을 거예요.”
“너무 늦지 않게 만났으면 해요. 나이 먹어 만나면 생각하기도 싫어요.”
“한창일 때 만나야지 아름다운 추억도 많이 만들 수 있겠죠.”
“맞아요. 어쩌면 지금도 늦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어쩔 수 없죠. 제 운명인가 보죠. 이제 사담은 그만하고 일 이야기를 할까요?”
“좋아요.”
“오션 한국 법인 사장을 원하신다고요?”
“네. 맞아요.”
“사장뿐만 아니라 임원급은 원하지 않으신가요?”
초창기라 임원이 필요하지 않고 나중에 필요하면 사장이 알아서 데리고 오던가, 직원에서 승진시키면 된다.
“이제 시작하는 거라 그건 나중에 필요하면 의뢰할게요.”
“좋아요. 일의 프로세스를 간단히 설명해 드리자면 원하시는 구체적인 조건들을 말씀해 주시면 우리가 확보한 데이터베이스에서 조건에 맞는 분을 2~3명을 복수 추천해 드릴 겁니다. 그중에 선택하셔도 되고 만약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추천해 드릴 겁니다.”
“자료만 보고 결정하는 건가요? 만나 볼 수는 있는 건가요?”
“당연히 만나 보고 결정해야죠. 연락처는 알려 드릴 수는 없고 우리를 통하면 약속 잡아 드릴 거예요.”
“그렇군요.”
“이제 원하시는 조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조건이라? 딱히 특별한 조건은 없는데.
“제일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회사를 책임감 있게 잘 경영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해요.”
“그건 기본이죠. 그다음은요?”
“컴퓨터나 IT에 대한 이해도가 높거나 그쪽 분야를 전공하신 분이 좋을 것 같아요.”
“그것도 기본이고요.”
“그리고 영어를 할 줄 아는 분이었으면 해요. 저는 상관없지만, 미국 본사와 소통을 해야 하니까요.”
“그것도 외국 기업에는 기본이에요. 혹시 원하는 나잇대나 성향 같은 것은 없나요? 경력은 꼭 CEO여야만 하는지? 또 IT 기업에서 근무한 경험이 필요한지도요.”
“나이는 4~50대면 되고요. 또…….”
한동안 조건에 관한 이야기와 수수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았어요. 원하시는 인재를 찾아 이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네. 자료는 언제쯤 받아 볼 수가 있을까요?”
“최소 15일에서 30일 사이가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런데 언제 한국에 오신 건가요?”
“1월 4일에 왔어요. 제가 한국에 온 것은 비밀로 해주세요.”
“당연하죠. 우리는 고객의 비밀을 철저히 지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 * *
커피숍 때문에 먼저 일본부터 법인을 세워야 할 것 같아 헤드헌팅 회사에서 나오자마자 핸드폰을 들었다.
지갑에서 소프트뱅코 손정우 회장 명함을 꺼내 보다가 직통 번호를 눌렀다.
일본에서도 헤드헌팅 업체를 이용할 거지만 내가 일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손정우 회장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일본어였지만 손 마시요시는 알아들었다. 영어로 말하였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오션의 진민재입니다.”
내가 전화할 줄 몰랐는지 꽤 놀라는 목소리였다.
(오! 진 고문님! 안녕하십니까? 어쩐 일로 전화까지 주시고.)
“부탁할 것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누구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 주어야죠. 무슨 부탁입니까?)
“사실은 제가 일본에 오션 법인을 설립하려고 하는데…….”
상황 설명을 하였다.
(그 정도는 부탁도 아닙니다. 그럼 언제 일본에 오십니까?)
“2~3일 안으로 갈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날짜가 정확히 결정되면 다시 연락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서로서로 도움 주고받는 거지. 다음에는 내가 도움을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