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요로마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를 생각할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 젊은 나이에 물소처럼 거침없이 나가는 자네의 행보가 부럽기도 해.
물론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가능한 거겠지. 회사는 잘 되고?”
“아직 창립한 지가 얼마 안 되어 아직은 적자예요. 조금씩 광고가 늘어나서 적자 폭을 줄이고는 있어요.”
“처음부터 흑자 내기가 쉽지 않지. 더구나 인터넷 회사는 더욱 그래. 시간이 지나면 해결해 줄 거야.
오션은 내가 봐도 대단한 프로그램이라 분명 성공할 거야. 핀란드에서 오션의 점유율이 90%가 넘어. 한마디로 독식이지.
옆 나라 스웨덴, 노르웨이에서도 점유율이 80%나 된다고 하고. 기존 토종 포털 사이트는 상대조차 안 돼.
이 정도면 대성공이지. 분명 오션은 크게 성공할 거야.”
핀란드에서 점유율이 이렇게 높은 것은 오션이 핀란드에서 제일 처음 시작되었고 헬싱키 대학생이 만들었다는 것이 언론에 알려져서 그렇다.
내가 핀란드에 있을 때도 오션이 핀란드 소유인 줄 아는 국민들이 많았다.
근데 핀란드 소유가 아니라 미국 소유인데. 이렇게 핀란드 국민들이 사랑해 주는데 괜히 미안했다.
“감사합니다.”
“학교생활은 어때?”
“괜찮아요.”
“학교 다니느라 사업하느라 바쁘겠어.”
“그렇지는 않아요. CEO를 영입했거든요. 잘해요.”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나 보네.”
웃으며 농담을 하였다.
요즘 여유가 있나 보네. 하지 않던 농담도 하고. 보기 좋았다.
“맞아요. 사장님은 노카아를 구원하시고 오션 CEO는 오션을 성장시키고요. 그래서 말인데 요즘 노카아는 어때요?”
“계속 나아지고 있어. 세계 시장에서도 노카아 핸드폰이 주목받기 시작했거든.”
“다행이네요.”
“이제 시작이야. 내년에 신제품 커뮤니케이터 9000 시리즈를 연속으로 출시할 예정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한번 볼래?”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일어나서 책상에서 뭔가를 가져와 나에게 건넸다.
“한번 봐.”
“네.”
“저한테 이걸 보여줘도 되나요?”
“자넨 노카아 대주주인데 볼 자격이 충분하지.”
자료를 받아 보았다.
세 종류의 핸드폰이었는데 두 개는 바 형태의 핸드폰이고 하나는 PDA폰이었다.
내 눈에는 하나같이 촌스러웠지만 지금 시대에는 최고의 디자인일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돌출된 안테나가 눈에 옥의 티였다.
안테나가 없는 핸드폰이 언제 나오더라? 2000년대에 나오나?
“이건 PDA폰인가요?”
“그럴 수도 있지. GEOS이라는 OS를 탑재한 핸드폰이야.
AMD 프로세서와 8MB 메모리를 장착했고 팩스와 이메일, 메시지가 가능해. 우리가 주력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반응이 어떨지 모르겠어.
자네가 보기에는 어때?”
터치스크린 기능이 없지만, 초기 형태의 스마트 폰이라고 볼 수 있었다. 넓은 화면도 보기 좋았다.
내 기억으로는 크게 인기를 끄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선방했던 거로 알고 있었다.
“큰 기대만 하지 않는다면 괜찮아요. 이렇게 조금씩 세계 시장에 노카아를 알리고 영역을 넓혀 나가는 거죠.”
“나쁘지는 않다는 거야?”
“네. 어느 정도 매출은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흥행하면 좋겠지만 그 정도면 나쁘지는 않지.”
“그렇죠.”
손을 들어 시계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조금 있으면 퇴근인데 맥주 한잔해야지.”
“좋아요.”
“알았어. 오늘은 자네 핑계 대고 좀 일찍 퇴근해야겠어. 신제품 개발 때문에 요즘 매일 야근했거든.”
***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갈증이 심하게 나서 물을 벌컥 마셨다.
간단히 맥주 한잔하자고 해서 맥줏집에서 가서 한잔 마셨는데 갑자기 발동이 걸렸는지 한잔 더 하자고 하여 한국 소주와 같은 핀란드 국민 술 꼬쓰껜 꼬르바를 여러 병 마셨다.
도수가 35도 정도 되어 소주보다 더 독하였다.
난 술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마셔야 기분이 좋은데 과음하면 다음 날이 괴롭다.
요로마 울리라가 그렇게 술을 잘 마시는 줄 몰랐다. 난 해롱거리는데 멀쩡하여 내 숙소까지 날 데려다주고 갔다.
다시는 같이 마시지 말아야지.
욕실로 가서 차가운 물줄기를 맞자 그제야 술이 깨는 것 같았다.
아침에 매키넨 교수에게 연락해 오후에 만나 커피 한잔하고 지금은 아이노가 다니는 회사 앞에 와 있었다.
기다리며 캔 음료를 마시는데 아이노가 동료 직원과 이야기를 하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예쁘네.’
동료와 헤어지면 부르려고 뒤를 따라가는데 계속 같이 걸어가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불렀다.
“아이노!”
내가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다가 나를 발견하고서는 눈이 커지더니 가만히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동료 또한 아이노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잘 지냈어?”
갑자기 아이노가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두 번째 포옹이었다.
잠시 내 품에 가만히 있다가 떨어지며 새침하게 말하였다.
“뭐야? 언제 왔어?”
“어제 왔어.”
“왔으면 바로 연락을 해야지. 사람 놀라게 하는 게 어디 있어?”
“서프라이즈 선물인데 별로야?”
“당연히 별로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어떻게 왔어?”
“방학이라 잠시 왔어.”
동료가 우리에게 다가와 아이노에게 물었다.
“누구야?”
“내가 말한 진이야.”
동료가 환하게 미소지으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이노가 하도 이야기를 많이 해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했었는데 실제로 보니 더 잘생겼네요.”
“안녕하세요?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동료가 우리 눈치를 보며 알 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아이노! 나 먼저 갈 테니까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
“알았어. 잘 가.”
“내일 보자.”
동료가 가는 것을 보고 내가 물었다.
“저녁 먹으러 갈까? 점심을 대충 먹었더니 배고프네.”
“알았어.”
“어디로 갈까?”
“내가 아는 곳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
“그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설립한 회사는 어때?”
“이제 초반이라 아직 모르지만 나쁘지는 않아.”
“다행이다. 알아? 핀란드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오션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는 거?”
“알아. 새로 오픈한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에서도 점점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고 들었어.”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피식 웃는 아이노였다.
“아파트에서 오션 디자인할 때가 생각나. 그때는 오션이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 전혀 몰랐거든.
나야 아르바이트비 많이 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일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는 게 영광스럽기까지 해.
회사에서도 일할 때 거래처 사람들에게 내가 오션 디자인했다고 하면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
오션 덕분에 일을 편하게 하기도 해.”
“나도 그때가 생각나네. 즐거웠던 시절인데 다시는 그때가 오지 않겠지. 하지만 다시 그때랑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어.
내가 저번에 제안한 거 생각해 봤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응. 진한테 스카우트 제안받고 고민을 많이 했어.
그래서 엄마한테 말을 했더니만 엄마는 핀란드에서 살고 싶지 미국에서 살고 싶지가 않다고 하네.
엄마 친구들도 친척들도 여기에 다 있는데 아는 사람 없는 미국으로 가기가 두려운 가 봐. 그렇다고 엄마를 두고 나 혼자 떠날 수는 없어.
엄마가 혼자서 고생하며 나를 키우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봐왔기에 난 엄마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 미안해.”
법인을 설립하고 얼마 안 있어 아이노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했었고 오늘 긍정적인 대답을 듣기를 원했는데 역시나 엄마 때문에 힘들다는 대답을 들었다.
난 엄마에 대한 정이 특별히 없기에 엄마의 존재가 자신의 앞날보다 의미가 있고 큰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노에게 들었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엄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이 이해되기도 하였다.
아이노에게는 엄마가 전부이고 엄마 또한 아이노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존재이며 살아가는 원동력이기에 너무 내 입장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나?
“아쉽기는 하지만 아이노의 의견을 존중해줄게. 그렇다고 이대로 제안을 거두는 것은 아니야.
언제든지 상황이 바뀌면 말해. 언제까지 제안은 유효하니까.”
“알았어. 고마워.”
“그러면 내가 핀란드에다가 오션 법인을 세우면 올 수는 있는 거지?”
“불러주면 당연히 가지.”
“알았어.”
와인 잔을 들었다.
“우리 건배 한번 할까?”
“뭐로?”
“뭐가 좋을까? 우리의 젊음을 위해서도 좋고 우리의 성공을 위해서도 좋고 또 뭐가 있을까?”
“우리의 성공을 위해서로 하자.”
“알았어.”
아이노가 잔을 들어서 내 잔에 살짝 부딪혔다.
“우리의 성공을 위하여.”
“우리의 성공을 위하여.”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아이노는 어떤 성공을 하기를 원하는데?”
“직장인이 원하는 성공이 뭐가 있겠어? 자기 회사 설립하는 거겠지. 난 디자인 회사를 설립하는 게 꿈이거든.”
“그 꿈 꼭 이루기를 진심으로 바랄게.”
“고마워.”
처음 계획한 것보다 며칠 더 머물면서 매일 저녁에 아이노와 함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주말에는 유명 관광지에 놀러 가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미국과 핀란드 양쪽에서 생활을 해보았지만, 이상하게도 핀란드가 더 정이 가고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핀란드에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다 좋아서 그런가?
떠날 시간이 되어 아쉽게 아이노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바로 마크의 별장이 있는 플로리다로 향했고 며칠 동안 신나게 놀았다.
집으로 돌아와 스마트 폰 OS 개발을 하다 보니 어느새 새 학기가 시작되어 학교로 향했다.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마크가 다가왔다.
“진! 얼굴이 좋아졌는데.”
얼굴이 좋아진 게 아니라 집에서 운동도 하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프로그래밍만 하고 먹기만 했더니 살이 조금 올랐다.
내가 원래 살이 잘 안 찌는 타입인데. 이제 개강도 했고 움직이다 보면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겠지.
“너무 편하게 지냈나 봐. 살이 좀 쪘어.”
“내가 보기에는 지금이 더 좋아 보여. 전에는 키에 비해 좀 마른 편이라 균형이 맞지 않는 것 같았거든.
차라리 운동해서 근육을 단련해 봐. 그럼 보기 좋을 것 같은데.”
마크네 별장에 갔을 때 해변에서 자주 놀았는데 몸이 좋은 남자들이 많이 봐서 부러웠는데 나도 한번 헬스클럽에 나가볼까?
배에 왕자 한번 새겨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알았어. 너도 같이 헬스클럽 다닐래?”
“난 집에서 하고 있어.”
이놈은 부자라 지하에 여러 운동기구가 갖추어있었다.
“할 수 없지. 나 혼자 다녀야겠네.”
그때 눈에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세르게이 브릭이었다.
내가 뚫어지게 바라보자 마크가 입을 열었다.
“이번 학기에 복학했다고 하더라. 아는 사이야?”
“직접 아는 것은 아니고 누구한테 들어서. 잠시만.”
앉아 있는 세르게이 브릭 옆으로 갔다.
“안녕!”
내 인사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안녕.”
이렇게 세르게이 브릭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