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드디어 내일 미국으로 떠난다.
그동안 핀란드를 떠날 때가 되어 하나하나 정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졸업식도 무사히 끝냈고 마지막으로 교수님들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작은 선물까지 드렸다.
무척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흡족하였다. 고마우신 분들이고 진짜 참 스승님 같으신 분들이었다.
또 핀란드에 와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도 만나 작별 인사를 하고 작은 선물도 주었다. 내가 운이 좋은지 다들 좋은 분들을 만났다.
어제는 요로마 울리라를 만났고 오늘 저녁에는 아이노를 만나기로 하였다.
이전 생과 이번 생 통틀어서 내가 본 여성 중 가장 예쁜 아이노. 같이 웹 디자인할 때가 행복하고 좋았는데.
나도 남자라 예쁜 아이노를 볼 때마다 흔들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힘들 때 내 곁에 있어 주었고 위로해주던 이전 생의 부인을 배신할 수가 없었다. 이번 생에서도 그녀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다른 예쁜 여자랑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내 선택은 그녀였다.
물론 결혼은 그녀랑 하고 연애는 다른 여자랑 할 수도 있겠지만 왠지 시작부터 선을 긋고 하는 연애라 상대 여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거리를 두었다.
핀란드에서 와서 나쁜 추억은 거의 없고 아름다운 추억만 간직한 채 떠나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었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싱키에서 비싼 레스토랑이라서 그런지 분위기도 좋았고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웠다.
사랑 고백하는 것은 아니지만 떠나기 전에 아이노와 마지막 추억을 남기기에는 좋은 장소 같았다.
저 앞에 아이노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태 그 자체가 여신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아이노에게 벌써 다가갔을 텐데.
“진! 일찍 왔네?”
“난 백수잖아. 앉아.”
아이노가 앉았다.
“내일 떠난다고?”
“응.”
“근데 오늘 연락해? 미리 알려주었어야지. 전화 받고 얼마나 황당했는데.”
“졸업하면 간다고 했잖아?”
“그게 내일일 거라고 생각을 했겠어? 오늘 내가 시간이 없었으면 못 보고 떠나는 거잖아.”
“봤잖아? 그럼 됐지. 회사 생활은 어때?”
“내가 몰랐던 것도 많이 배우고 재미있어.”
아이노는 한 달 전에 규모가 있는 웹디자인 회사에 취직하여 다니고 있었다.
“다행이네. 열심히 배워. 내가 정식으로 회사 설립하면 스카우트할 테니까.”
“언제?”
“글쎄? 늦어도 2~3년 안에 할 거야. 연봉 많이 주고 싶으니까 그에 걸맞게 실력 많이 쌓고.”
생긋 웃었다. 진짜 예쁘네.
“알았어. 배고프다. 주문부터 하자.”
“그래.”
식사를 맛있게 하고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진! 오늘 즐거웠어. 고마워.”
“나도 즐거웠어.”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선물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깜짝 놀랐다.
“뭐 선물이라고? 난 준비 못 했는데.”
“선물은 주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거야. 아이노가 기뻐하는 모습만으로도 난 큰 선물을 받는 거야. 열어봐.”
“진 고마워.”
작은 상자를 열자 그곳에 예쁜 브로치가 있었다.
아이노에게 무엇을 선물할지 한참 고민했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반지나 목걸이도 생각했지만, 부담 가질 수도 있고 선물에 의미를 둘까 봐 고민 끝에 별다른 의미가 없는 브로치로 결정하였다.
“와! 예뻐. 정말 고마워.”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럼 갈게. 안녕.”
뒤를 돌아가려는데 아이노가 날 불렀다.
“진!”
“응.”
“한 번만 안아봐도 돼?”
사람 가슴 떨리게 시리.
대답도 하기 전에 아이노가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
핀란드에서는 이민국에 사람이 없어 한산했는데 이곳은 무슨 시장통같이 사람들이 북적거려 비자 수속받는 데 한참 걸렸다.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들도 많았고 입국 수속대에서 통과 못 한 사람들도 이민국으로 보내어 심사를 까다롭게 하여 대기 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막상 내 차례가 오자 유창한 영어 실력에 스탠퍼드 대학원 유학이라 그런지 난 금세 끝났다.
샌프란시스코 공항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전 생에서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많이 이용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하였다.
캐리어를 끌고 택시 승차장으로 가자 그곳도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미국은 택시 기사가 흑인들과 인도인들이 아주 많았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흑인들은 왠지 꺼려졌다.
인종 차별이 아니라 흑인들은 진짜~ 할 말은 많지만 관두자.
이왕이면 흑인보다는 인도 사람이 걸리면 좋겠는데 그것도 운이지.
앞 택시가 떠나고 내 앞으로 택시가 와서 정차하였다. 아! 꽝이다. 흑인이다.
숙소 주소가 적힌 종이를 기사에게 건넸다.
공항에서 학교까지는 대략 30Km이고 숙소는 기숙사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혼자서 편하게 사용하려고 학교 근처 원베드룸 아파트를 임대하였다.
그 아파트는 이전 생에서 살았던 아파트라 잘 알았다. 좀 비싸기는 하지만 깨끗하고 지내기에 편했다.
학비도 무료인데.
스탠퍼드 대학원 지원서를 제출할 때 헬싱키 대학을 3년 만에 졸업하고 오션의 개발자라는 것을 기재했더니만 일반적으로 합격 통지서를 우편으로만 보내는데 전화로 합격을 먼저 알려주었다.
장학금까지 지급하겠다고 하였는데 장학금이 학비보다 더 많았다. 아마도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배려해 준 거였다.
보통은 대학이나 대학원을 지원할 때 한 학교만을 지원하지 않고 여러 대학을 지원하여 합격한 대학교를 골라 입학을 한다.
미국은 명문대학교가 많다.
그 대학들끼리도 알게 모르게 경쟁하는데 대학을 조기 졸업한 수재이고 요즘 미국에서 떠오르는 오션의 개발자라고 하니 무조건 잡는 것이 학교로는 이득이었다.
나를 다른 학교로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난 다른 학교에는 지원서를 제출하지 않았는데 덕분에 비싼 학비를 내지 않게 되어 돈이 굳었다.
결과적으로 대학교, 대학원 다 공짜로 다니는 거네. 공짜 좋아하면 머리 벗어진다고 하는데.
타자마자 흑인 기사가 계속 질문을 하였다. 참 말이 많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하자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대답해주면 가는 내내 기사의 수다에 시달려야 한다.
아파트에 도착하여 관리 사무실에 가서 열쇠를 받고 집에 들어왔다.
집안을 둘러보았다. 한동안은 필요한 거 사러 다녀야겠네. 제일 먼저 컴퓨터부터 사야지.
다음 날 아침 제일 먼저 전화선을 신청하고 컴퓨터매장으로 갔다.
전시된 모니터에 WIN 95가 떠 있는 것을 보자 반가웠다. 3.1은 진짜 사용하기 불편했는데.
사양 괜찮은 거로 주문하고 가려다가 매장 한쪽에 핸드폰매장이 있는 것이 보여 그 앞으로 갔다.
호출기하고 핸드폰을 같이 취급하는 곳이네.
호출기 모델은 많았지만, 핸드폰 모델은 몇 개 되지 않았다. 둘러 보고 있자 직원이 다가왔다.
“호출기 보러 오셨습니까?”
“아뇨. 핸드폰 보려고요. 요즘 핸드폰은 어떤 모델이 잘 나가나요?”
“핸드폰 하면 모토로라가 아니겠습니까? 여기 이 모델은.......”
설명하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고 노카아 새 모델인 2110을 가리키었다.
“이게 모토로라보다 디자인도 좋은데요. 이 모델이 디지털 방식으로 나온 거죠?”
“네. 맞습니다. 노카아에서 신경 써서 만든 신제품입니다.
사용하신 분들 말로는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고 고장도 나지 않을 만큼 핸드폰이 튼튼하다고 합니다.”
“많이 나가나요?”
“이 모델은 주로 젊은 층에서 구매를 많이 합니다.
젊은 층에서 좋아할 만한 디자인에다가 텍스트까지 발송할 수 있어 인기가 많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텍스트 보내기가 어려워 모토로라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역시나 새로운 기능은 젊은 층에서 먼저 알아보네.
사실 하나의 버튼에 3개의 알파벳을 사용하기에 나이 드신 분들은 텍스트 보내기가 어렵기는 하였다.
“그렇군요. 저도 노카아로 할게요.”
“역시 젊은 분이라 노카아를 선택하시네요. 약정 설명해 드릴 테니 저쪽으로 가시죠.”
“네.”
핸드폰을 개통하고 학교로 향하였다.
스탠퍼드 정문을 보자 감회가 남달랐다. 졸업하고 한 번도 안 왔으니 수십 년 만에 오는 거였다.
회사가 먼 곳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을까? 오고 싶어서 온 대학원도 아니라 타의로 왔으니 애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선택해 온 것이고 익숙함에 왠지 애정이 생겼다.
행정처에 들러 행정 절차를 다 끝마치고 나왔다.
집으로 갈까? 이왕 온 김에 교수님을 만나보고 갈까? 방학 중이라 안 나왔을 수도 있는데. 일단 가보자. 없으면 컴퓨터실이나 가지.
교수실 문을 노크하자 바로 반응이 왔다.
“네.”
계시네. 방학인데도 나오시다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을 보시다가 나를 본 스티브 애스틴 교수가 누군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전하시네. 내가 처음 스티브 애스틴 교수를 봤을 때 하얀 백발에 흰 수염 KFC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았다.
얼핏 보면 진짜 KFC 할아버지라 생각할 만큼 모습이 정말 닮았다.
“누군가? 처음 보는 학생 같은데.”
“안녕하십니까? 저는 핀란드 헬싱키 대학을 졸업하고 다음 학기부터 대학원 강의를 들을 진민재라고 합니다.
학교 등록하러 왔다가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자네가 그 진민재 학생이라고? 반가워. 어서 오게. 매키넨 교수에게 자네 이야기 들었어. 이리와 앉지.”
“네.”
의자에 앉았다.
“매키넨 그 친구가 하도 자랑을 해서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어 고맙네. 자네 천재라며?”
“그 정도는 아닙니다. 매키넨 교수님이 저를 잘 본 것뿐입니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자네가 오션을 개발했다며? 그것도 대학 다니면서. 그 정도면 천재라고 불릴만해. 여기 스탠퍼드 학생들도 오션을 많이 사용해.
나도 그렇고. 사용할 때마다 감탄하곤 했지.
일반인들이라 검색하는 프로그램이 뭐 대단한 거라고 말하겠지만 쉽게 개발할 프로그램이 아닌 것을 내가 잘 알지.”
오션 덕을 많이 보네.
“좋게 보셔서 감사합니다.”
“자네 야호 아나?”
“네. 압니다.”
“그 야호를 우리 대학 전자공학 대학원생들이 개발한 거야. 자네 오션에 밀려 요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나 봐.
내가 봐도 오션과 상대할 정도는 아니야. 컴퓨터 공학이 전자공학에 밀릴 수는 없지.”
교수님이 같은 대학인데도 은근히 과끼리 경쟁심이 있나 보네. 오늘 교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맞습니다.”
“말도 잘 통하네.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알겠습니다.”
“매키넨 그 친구 본지가 꽤 오래인데 잘 지내고 있나?”
“네. 잘 지내고 계시고 스티브 애스틴 교수님 건강을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나 아직은 팔팔해. 앞으로 10년도 더 강의할 수 있어.”
내가 듣기로는 앞으로 5년 후에 은퇴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매키넨 교수님에게 10년 더 현업에 계실 만큼 건강하시다고 전해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스티브 애스틴 교수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궁금해서 그런데 오션 유지 관리하려면 학생 신분으로는 부담이 될 텐데 어떻게 하고 있는 건가?”
“제 개인 재산이 좀 있어서 할만은 합니다.”
“자네를 오늘 처음 봤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고 친근한 마음이 들어. 매키넨 친구의 소개 때문일 수도 있겠지.
초면에 이런 말 하기가 망설여지는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