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요새 며칠째 시민권 신청을 위해 여러 가지를 알아보고 다니느라 바빴다.
알아보니 현재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국가가 스웨덴이었고 핀란드도 만만치 않았다.
신기하게도 핀란드의 법인세는 생각보다 낮은 24%였다. 이 정도면 한국과 비슷하고 다른 국가들보다 낮은 편이라 의외였다.
하지만 노동 소득은 세액 구간이 6단계로 나누어지며 최고 세율이 45%였다. 소득이 높을수록 누진세를 적용하여 세율이 높아지는 구조다.
근데 자본 소득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세율이 28%였다.
내가 법인을 설립하여 회사가 성장하여 주식 가치가 상승하여 내 자산이 늘어나면 세율을 28%만 적용한다는 거다.
자본 금액이 수억 달러에서 수십억 달러가 될 수도 있는데 세율을 45% 정하면 누가 사업을 하려고 할까?
금액이 크다 보니 세율을 조금 낮게 책정한 것 같았다. 그럼 다른 국가에 비교해서 절대 많은 편이 아니다.
물론 내가 사장으로 일해 월급 받는 것은 노동 소득이라 고율의 세금을 내야 하지만 자본 소득이 더 중요하기에 그건 충분히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세금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생겨 심각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산 넘어 산이다.
이전 생에서 사무실 직원 중에 핀란드 출신이 있었는데 그 직원은 미국과 핀란드 국적을 가진 이중 국적자였다.
그래서 난 당연히 핀란드가 이중 국적을 허용하는 줄 알고 핀란드 국적을 취득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국적을 취득할 계획이었는데 알아본 결과 지금은 이중 국적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나중에 허용한 거였다. 언제 허용할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추측으로는 200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 같았다.
내가 시민권을 취득하려고 생각했던 이유가 사업을 하기 위해서인데 그것 때문에 핀란드 시민권을 꼭 취득해야 할까? 생각이 많았다.
고민하다가 문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법인을 설립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럼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사업이 당장 급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서 지금 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구골같이 한동안 무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인지도를 높인 후에 유료 서비스로 전환하면 된다.
그럼 지금부터 서비스 시작하는 것이 좋다.
또 대용량 서버를 임대하려면 자금이 필요하기에 내가 가지고 있던 노카아 주식을 조금만 매도하면 해결이 된다.
굳이 은행에서 대출받을 필요도 없었다.
지금 노카아 주식이 2배 올라 1.7 마르카 정도 한다. 올라도 아직 200원 정도이지만.
일단 대학 다닐 동안은 com으로 검색창만 두고 무료로 서비스하면 핀란드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 미국까지 사용할 수 있고 핀란드는 따로 만들어 테스트로 무료 서비스하면 된다.
핀란드에서 서비스하다가 반응이 좋으면 점차 유럽으로 확대하면 되고.
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으로 대학원을 진학하거나 아니면 요로마 울리라랑 상의해서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해도 된다.
대학원은 어디로 가야 하나? 익숙한 스탠퍼드가 좋겠지. 같은 대학원을 두 번이나 가게 되네.
“진!”
나를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이노였다.
현재 검색 엔진 개발은 다 끝났고 디자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아이노는 내가 아르바이트로 고용한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법인을 설립할 수 없기에 직원을 채용할 수 없어 개인적으로 학교 구인 게시판에 아르바이트 구인 광고를 냈었다.
하루 만에 연락이 와서 다음 날 학교에서 아이노를 보자마자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바로 오케이 하였다.
3학년으로 학년은 하나 높지만, 나이는 동갑인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핀란드에서 본 여성 중에 가장 예뻤다.
보는 순간 인간이 아니라 엘프를 보는 것 같았다. 2년 동안 학교 다니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야?
집이 원베드 아파트이지만 거실이 꽤 넓어 집에 임시 사무실을 차렸다. 구골은 집 주차장에서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훌륭하지.
“왜?”
“몇 가지 디자인을 했는데 진이 어떤지 봐줘.”
“프린트해서 줘.”
“알았어.”
작은 식탁으로 가서 앉자 아이노가 프린트한 용지를 가지고 와서 앞에 앉았다.
“여기 있어.”
총 5개의 디자인이었다.
도메인 Koguryo를 그냥 멋없게 사용할 수 없어 제일 먼저 디자인 작업을 하려는 거다.
앞으로 얼굴이 될 거라 디자인 하나하나를 신중히 보았다.
다 보고 내려놓자 아이노가 긴장한 채 있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때?”
“다 좋은데 난 이 디자인이 제일 좋은 것 같아. 다만 글씨체가 검은색으로만 하면 좀 어두운 이미지로 보일 것 같아.
글자에다 색을 입히면 더 산뜻하고 화사하게 보이지 않을까?”
“그거는 어렵지 않아. 이 디자인에다가 몇 가지 색을 입혀볼게. 근데 코쿠려가 무슨 뜻이야? 사전을 찾아봤는데 안 나오던데.”
“고구려는 한국의 고대 국가 이름이야.
KOREA도 따지고 보면 고구려에서 파행된 거야. 원래는 정확한 발음이 Koguryo 이거든.”
“그렇구나. 근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국가이지만 국가 이름을 도메인으로 사용하기에는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국가 기관사이트도 아닌데. 검색하는 사이트 성격에 맞게 도메인 이름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아?”
별로인가? 난 개인적으로 고구려가 좋아서 사용하려는 건데.
“진짜 별로야?”
“솔직히 말하면 이름 짓는 센스가 없다고 해야겠지.”
“그 정도야?”
“모르니까 그렇게 정했겠지. 학교 가서 과 학생들에게 물어봐. 그럼 알 수 있을 거야.”
“아이노는 뭐로 하면 좋은데?”
“수많은 인터넷 정보의 바닷속에서 원하는 정보를 찾아주는 거잖아. 그러니 성격에 맞게 OCEAN 어때?
단순히 SEA(바다)가 아니라 더 넓다는 의미로 OCEAN(대양)이 어울릴 것 같아.”
오션하면 난 제일 먼저 오션뷰가 떠오르는데.
“OCEAN하면 리조트 회사가 떠오르지 않아?”
한심하다는 눈으로 날 보고서는 손가락으로 컴퓨터를 가리키었다.
“저 매킨토시 컴퓨터 어느 회사 거지?”
“망고.”
“그럼 저 회사는 망고 농장이 떠오르겠네?”
할 말이 없었다. 하긴 망고랑 컴퓨터는 전혀 연상되지 않았다.
망고는 나로 인해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전 생에서는 스마트폰으로 엄청 성장했는데.
바꿔야 하나? 한번 정하면 바꾸지 못하기에 잘 정해야 하는데.
“알았어. 학교 가서 과 애들한테 물어보고 결정할게.”
“물어보나 마나일걸. 일단은 OCEAN도 디자인해볼게. 내가 생각해놓은 게 있거든.”
“알았어.”
“그리고 참고로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러는데 지금 하는 디자인 다 끝나면 또 뭘 할 거야?”
“이 일 끝나면 웹사이트 디자인 작업할 거야.”
“알았어.”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옆자리에서 책을 보고 있는 니로를 불렀다.
“니로!”
“왜?”
“내가 전에 검색 엔진 개발하고 있다고 했잖아. 도메인 이름으로 고대 국가 이름을 사용하는 것 어때?”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 국가 이름을 왜 사용하려는 거야?”
“그럼 오션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나쁘지는 않아.”
“괜찮다는 거야?”
“응.”
“추천해줄 만한 이름이 있어?”
“그냥 오션으로 해. 기억하기도 편하고 뭔가 위대한 느낌도 들잖아.”
결국, 바꿔야 하나? 아쉽다.
***
1993년 한 해가 지나가고 1994년 새해가 밝았다.
사람들은 보통 새해를 맞이하면서 설렘과 기대를 하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저마다 다 다르듯 나 또한 새해를 맞이하는 감정은 남들과 달랐다.
나에게 새해는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새해를 맞이하여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하게만 느껴져 달갑지 않을 것이고 어린 친구들은 새해가 되어 어른으로의 성장이 더 가까워져 즐거워할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 1년 동안을 뒤돌아보고 새해에는 더 나은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지키지 못할 이것저것 신년 계획들을 많이 세운다.
매년 반복되는 경험이지만 사람들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또다시 반복한다. 물론 계획을 지키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새해를 맞이하여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계획을 세우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해의 키워드를 정할 뿐이다.
1992년의 키워드는 독립이었고 1993년은 사업 준비, 1994년은 무엇으로 지을까? 그래 ‘날갯짓’이 좋을 것 같았다.
어린 새가 둥지를 막 떠나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려는 그 날갯짓 말이다.
요로마 울리라 준 1994년 다이어리 첫 장에 파란 사인펜으로 ‘날갯짓’이라고 썼다. 올해 한 해는 이것만 생각하자.
그래도 새해인데 할아버지한테 인사는 해야겠지.
지금쯤이면 한국은 저녁이고 직은 집 식구들이 왔다가 돌아갔을 것 같아 전화기를 들었다.
오늘은 신호가 몇 번 울리지 않았는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를 한 살 더 드셨는데도 목소리는 여전하시네.
(평창동입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민재예요.)
(오 그래! 공부는 잘하고 있지?)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건강은 좀 어떠세요?)
(맨날 똑같지.)
(서재에만 맨날 계시지 마시고 집 마당에 나가 걷는 거라도 하세요.)
(알아서 할게. 언제 들어와?)
한 살 더 드시더니 마음이 약해졌나? 들어오지 말고 공부만 하라더니.
(들어갈까요?)
(이유 없이 뭐하러 들어와.)
(이유야 만들면 되는 거죠.)
(아니다. 들어오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할 말 없으면 끊어.)
잠시 착각이었나? 여전하시네.
(사업은 어때요?)
바로 대답이 없으셨다.
(그저 그렇지.)
뜸을 들이고 갑자기 목소리가 안 좋게 느껴지는 것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이 당시 어땠지? 내가 대학을 다니고 있어 자세히 모르겠지만, 특별히 이상하다는 점은 못 느꼈는데.
나 모르는 문제가 있었던 건가?
(정말 괜찮은 거예요?)
(그렇다니까. 넌 신경 쓸 필요 없어. 할 말 다 했으면 끊자.)
전화가 끊겼다.
뭐야? 멀리 있으니까 이럴 땐 불편하네. 별일은 없겠지? 있다 해도 이젠 나랑은 상관이 없으니까. 그래 신경 쓰지 말자.
94년은 날갯짓에만 신경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