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코스키넨 이사가 일어나며 깍듯이 인사하였다.
난 친구라고 해서 교수와 비슷한 연배인 줄 알았더니 유난히 흰머리가 많은 5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친구가 아니라 형님뻘 아닌가?
“어서 오십시오. 바이노 코스키넨 이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진민재입니다.”
“앉으시죠.”
“네.”
소파에 앉았다. 돈이 많은 은행이라 그런지 소파가 푹신한 게 감촉이 좋았다.
“차는 뭐로 드시겠습니까?”
“커피 있으면 주십시오.”
“네.”
이사가 인터폰으로 커피를 부탁하였다.
“이렇게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오시는 데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근데 왜 이리 나에게 깍듯이 대하는 거지? 난 일개 대학생인데. 과한 친절에 불편해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고 비서가 들어와 커피를 놓고 나갔다.
“드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커피잔을 들어 마시는데 코스키넨 이사 약간 흥분한 채로 입을 열었다.
“매키넨 교수에게 미스터 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천재라고 극찬을 하던데 이렇게 천재를 직접 만나본 것이 처음입니다.
저는 천재라 하면 성격이 괴팍하고 뭔가 괴짜 같은 이미지였는데 미스터 진을 보니 선입견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천재에다가 미남이시고 부자이시니 부럽습니다.”
과한 친절의 이유가 이거였어? 근데 내가 부자라는 것은 노카아의 대주주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건데 어떻게 알지?
“제가 노카아의 대주주라는 것을 아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우리 단스케 은행이 노카아의 최대 채권은행이라 알고 있는 겁니다.”
아! 그랬구나. 매각 반대 탄원서에 서명도 했으니.
“혹시?”
“걱정하지 마십시오. 매키넨 교수는 모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알아도 상관없지만, 굳이 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압니다. 죄송하지만 노카아에 투자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천재이시니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 것 같아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럽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미래를 본 것입니다.”
“네? 미래 가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셈입니다. 충분히 투자 가치가 있으면 제가 판단하기에는 노카아는 핀란드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큰 기업으로 성장할 겁니다.”
“우리 은행에서는 노카아에서 다른 계열사들을 전부 매각하고 통신 장비와 모바일 사업에만 집중하는 것에 우려가 큽니다.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실적도 아직 전무한 상황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 속담에 첫술에 배부르냐? 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뜻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라는 말입니까?”
“이미 정답을 알고 계시네요. 두 사업에만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성장의 원동력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매키넨 교수의 말을 듣다 보니 2000년 문제가 생각보다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결책은 있는 겁니까?”
사실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Y2K 문제가 불거진 초장기에 주요 시설에 컴퓨터 오작동이 일어날 수 있다며 언론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사이비 종교들의 세기말 분위기 때문에 약간 혼란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별문제 없이 지나갔다.
2000년이 오기 전에 프로그램 대부분을 수정했기 때문이었다.
“크게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프로그램만 수정하면 됩니다. 다만 수정할 프로그램이 많아 시간이 걸릴 겁니다.”
“프로그램 수정이라 하심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일단 연도가 들어가 있는 데이터 파일은 전부 4자리로 컨버전하고 프로그램상에 날짜 계산하는 루틴은 전부 수정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한동안 Y2K 문제 해결 방안에 관해 설명하였고 질문과 답변하는 시간을 가졌다.
“말씀 감사합니다. 말씀을 들으니 크게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서 마음이 놓입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나중에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지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은행에는 더 좋을 겁니다.”
“그건 왜입니까?”
“바로 앞의 나무를 보지 마시고 저 멀리 떨어진 숲을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이야 2000년 문제가 아직 불거지지 않아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몇 년이 지나면 핀란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2000년 문제가 대대적으로 큰 이슈가 될 겁니다.
그러면 고객들은 은행에 내 돈을 맡겨도 되는지? 내 재산이 전부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할 겁니다.
그때 단스케 은행에서 우리는 2000년 문제를 이미 몇 년 전에 해결하여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보십시오.
고객들은 어느 은행을 선호하며 신뢰하겠습니까?”
감탄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나를 우러러 바라보았다.
“와! 대단하십니다. 저는 바로 앞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노카아도 미래를 보고 투자하신 거네요.
알겠습니다. 제가 바로 2000년 문제 해결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자문은 얼추 끝난 것 같고 내 용건을 말할 차례였다.
곧 검색 엔진 개발이 완료되면 정식으로 출시할 건데 초기 사업 비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현재 사업할 자본이 없었다.
아빠가 물려 주신 돈을 한국에서 가지고 오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는 노카아에서 투자받아 사업을 시작할까? 했는데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사업을 시작하면 지분을 나눠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오늘 온 김에 대출 여부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다.
“이사님! 한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혹시 저한테 대출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인지 의아하며 되물었다.
“네? 대출 말입니까?”
“네.”
“얼마를 대출하시려는 겁니까?”
“120만 마르카입니다.”
“왜 대출을 받으시려는 겁니까?”
“제가 이번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초기 사업 자금이 필요합니다.”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개인적으로는 대출을 해주고 싶지만, 외국인은 신용 대출이 불가능합니다.”
“담보 대출은요? 노카아 주식을 담보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부동산은 외국인도 담보 대출이 가능하지만, 주식은 담보 대출이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주식을 담보로 하면 대출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안되네. 그럼 노카아 밖에 없나? 좋다 말았다.
실망하고 있자 코스키넨 이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업을 핀란드에서 하실 겁니까?”
“네.”
“핀란드에서 사업을 하시려면 유학 비자로는 불가능합니다. 따로 취업 비자를 받으셔야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취업 비자도 졸업하기 한 학기 전부터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장은 사업을 하실 수 없습니다.”
아! 취업 비자를 생각하지 못했네. 그럼 수익을 내지 말고 무료로 시작해야 하나? 무료는 가능하니까.
왜 이리 걸리는 게 많냐? 집 나오면 고생한다더니 나라를 나와도 고생이다. 어휴!
“미스터 진! 이왕이면 시민권을 신청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핀란드는 인구가 500만이라 인구가 매우 부족한 상황입니다.
미스터 진 같은 인재가 시민권을 신청하시면 바로 나올 겁니다. 그럼 사업도 마음대로 하실 수 있고 대출도 제가 신용 대출로 해드리겠습니다.”
핀란드는 한국의 3배가 넘는 크기인데 인구가 500만이라니? 한국의 10%밖에 안 되네.
시민권이라? 이전 생에서도 미국 시민권자였기에 외국 시민권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이번 생에서는 핀란드 시민권을 취득해 볼까?
“생각해 볼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면 핀란드 국적을 취득하게 되면 병역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이전 생에서도 가지 않았던 군대를 핀란드에서 간다고? 미쳤냐? 가더라도 한국에서 가야지. 시민권 신청은 생각지도 말아야겠다.
나중에 미국 가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네? 군대 가야 한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핀란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다르게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어서 남자들은 누구나 병역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기간은 일반병들은 6개월입니다. 사회 복무도 있는데 1년 정도입니다.”
군대가 겨우 6개월이라고? 그거 가서 무슨 훈련을 받는다고? 그래도 가고 싶지는 않았다.
“기간이 짧네요.”
“네. 그렇습니다. 군 면제는 원칙적으로 없지만, 예외적으로 아주 뛰어난 능력 있는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특별 면제 제도가 있기는 합니다.
미스터 진은 천재이기에 면제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면제받는다면 생각해 볼만도 하네.
“알겠습니다.”
상의 안주머니에 봉투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자문료입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얼마를 주었는지 궁금해서 은행에서 나오자마자 봉투를 열어보았다.
600마르카였다. 미화로 100달러 정도였다. 생각보다 많이 줬네. 공돈이 생기자 기분이 좋은 것을 보니 난 속물인가 보다.
집으로 갈까? 하다가 오랜만에 요로마 울리라나 볼까? 노카아로 발걸음을 돌렸다.
회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연락받고 기다리던 요로마 울리라가 문 앞에서 중세 귀족들이 하는 인사처럼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허리를 숙이며 나에게 인사하였다.
“대주주님 어서 오십시오. 요즘 발길이 뜸하셨습니다.”
또 장난이다. 요로마 울리라와 처음 만난 이후로 가끔 만나다 보니 어느새 친해져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고 요로마 울리라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40이 넘어서도 어린아이처럼 장난치기를 좋아할까? 유치하게. 노카아의 신화를 이룩한 요로마 울리라가 이렇다는 것을 누가 알까?
“또 시작이시네요. 재미없어요.”
“내 목이 자네 한마디에 날아갈 수 있는데 잘 보여야지. 나에게 대주주는 하데스 같은 존재야.”
무시하고 소파에 가서 털썩 주저앉자 요로마 울리라도 소파로 와서 앉았다.
“요즘 바빴어? 연락도 없고 회사도 안 오고.”
비록 내가 공식적으로 노카아의 대주주이기는 하지만 난 회사 일에 일체 관여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내가 사업가였던 것도 아니고 어련히 요로마 울리라가 노카아를 세계 제일의 핸드폰 회사로 성장시키는데 내가 옆에서 뭐라고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또 내 할 일도 많은데 굳이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고 1990년도 말쯤에 스마트폰을 노카아에서 생산하여 계속 대주주 지위를 유지할지?
보유 주식을 전부 매도하고 손을 뗄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다.
노카아에서 생산하면 편하고 좋기는 하지만 내 지분이 33%라 내가 따로 회사를 설립하는 것보다는 내 이익이 적어진다.
장단점이 있기는 한데 어느 것이 더 좋을지는 아직 모르겠고 나중에 상황 봐서 결정하면 될 거다.
“검색 엔진 개발이 거의 끝나가요. 다음 주면 개발 끝이에요.”
“정말?”
“네.”
“대단해. 진은 벌써 개발을 끝내는데 난 뭐 하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