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요로마 울리라는 어린 청년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작년부터 고심해서 내린 결론과 같다는 것에 속으로 꽤 놀랐다.
자신은 월가에서도 10년 넘게 일한 경험이 있고 2년이지만 노카아에서 근무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결과물인데 이제 19살인 어린 청년이 더구나 외국인이 노카아가 처한 현실과 해결방안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청년이었다. 그러니 거액을 선뜻 투자했겠지.
갑자기 흥분되었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생각 같아서는 이 청년과 맥주를 마시며 밤새도록 경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낭만적인 감상을 할 시간이 없었다.
“혹시 경제를 공부하시거나 그쪽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 지난달에 고등학교 졸업했어요.”
순간 머쓱하여 커피잔을 들어 마셨다.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질문했더니 아니었다.
그렇다면 천재인가? 이 나이에 이 정도 지식과 식견이라면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되면서 궁금하였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이 청년에 대해 알고 싶고 가깝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학원 과정이 끝나면 전공은 어떤 것을 선택하실 겁니까?”
내 원래 전공이 컴퓨터 공학이라 이번에도 컴퓨터 공학을 전공할 생각이었다. 다른 전공 선택해서 귀한 시간 공부하는 데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까.
근데 한가지 컴퓨터 공학도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야호 창립자가 컴퓨터 공학이 아니라 전자 공학을 전공했다는 것이다.
IT 사업이 지금 초창기이기에 당연히 컴퓨터 공학을 전공할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하면 되기는 하지만. 야호나 구골이나 이전 생과는 다르게 내 발밑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웬만한 것은 내가 선점하여 IT 공룡이 되어야지. 히히히.
“컴퓨터 공학을 전공할 겁니다.”
“헬싱키 대학도 컴퓨터 공학 괜찮습니다.”
내가 헬싱키 대학을 갈 거라고 단정하듯 말하였다. 하긴 핀란드에 왔고 어학원을 다니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
헬싱키 대학을 갈지 스탠퍼드 대학을 갈지 아직 결정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대학은 큰 의미가 없다.
미국으로 갈 거면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잘 압니다. 이제 용건을 말씀해 주시지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지금 채권 은행단에서 노카아를 분할 매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매각을 막고자 주주들의 매각 반대 탄원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 들었습니다. 당연히 매각을 막아야죠.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여기에 이름 기재하시고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핀란드어와 영어로 된 탄원서였고 내용은 ‘노카아의 분할 매각을 주주로서(지분 33.3%) 반대합니다.’로 간단하였다.
근데 내 지분이 33.3%나 된다고? 난 67,058,820주만 알았지 지분율까지는 몰랐다. 딱 3분의 1이네.
대박! 노카아 같은 공룡 기업이 70억 원에 지분 33%라고?
하긴 주가가 100원인 껌값이라 시가총액이 수십 배 또는 백배 이상 줄어들었으니 가능한 수치였다.
그렇다면 내가 노카아를 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 대기업은 지분 10~20%로 그룹을 지배하고 있던데.
내가 회장을 해? 아니야! 난 소프트 개발자이지 사업가는 아니지.
고민이네. 난 핸드폰 OS를 개발하여 미국에서 핸드폰 회사를 설립하려고 했는데 노카아를 이용하면 모든 면에서 편하기는 하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핸드폰 시장의 절대 강자이니 망고 사에 앞서 스마트폰을 출시하면 시장 진입이 수월하고 선점하기도 유리하다.
핸드폰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도 노카아를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단점은 핀란드는 세금도 많아 내가 가지는 게 줄어드는데.
또 강한 국가가 아니라서 그게 좀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일단 이 문제는 조금 더 고민해보고 결정하자.
탄원서에 이름을 적고 서명하였다.
“서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주들의 탄원서만으로 매각을 막을 수는 있는 겁니까?”
“막지 못하면 다 같이 죽는 겁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다행히도 여론도 우리 편이라 해볼 만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저녁 식사 한번 초대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요로마 울리라는 긴장한 채 앉아 있었다.
지금 옆 회의실에서는 자신의 회장 선임에 관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회장 대행을 맡았기에 쉽게 결정이 될 거로 생각했었지만, 예상보다 회의가 길어지는 것을 보니 찬반 격론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다른 이사들보다 나이도 젊고 경험이 많지 않아 반대하는 이사들도 있었고 젊은 패기를 한번 믿어 보자는 이사들도 있었다.
문이 열리고 직원이 들어왔다.
“회의실로 오시라고 합니다.”
드디어 결정이 났나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이사들이 박수를 치며 자신을 맞아 주었다. 임원 서열 10위인 자신이 회장이 된 것이며 이사회에서 모험을 선택한 것이다.
쑥스럽게 서 있는 자신에게 노카아 서열 2위인 루페 매키넨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하오.”
“감사합니다. 여러 이사님들이 저를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회장 취임을 하게 되어 어깨가 매우 무거울 것이오.
우리 이사들도 신임 회장을 적극적으로 도울 테니 이 위기를 반드시 극복해 예전 노카아 명성을 되찾아 주시오.”
“물론입니다. 많은 지도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이제 신임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노카아를 이끌어 갈지 포부를 밝혀주셨으면 하오.”
요로마 울리라 회장은 지금 이 자리에서 원론적인 이야기만 할까? 자신이 계획한 구제안을 말할까?
고민하다가 바로 비상 체계로 전환하여 빠르게 경영 정상화를 이루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이사님들도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노카아뿐만 아니라 핀란드의 경제가 악화일로를 겪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불경기를 겪고 있는 유럽의 소비자들도 우리 노카아의 TV 등 우리 제품에 지갑을 열고 있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카아가 살아남을 길은 무엇일까? 많은 고민 끝에 제가 결정한 것은 선택과 집중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노카아가 유일하게 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선택을 할 시기입니다.
수많은 사업 중에 어떤 사업을 선택해야 할까요? 미래 가치가 있고 발전할 수 있는 사업을 선택하고 그 사업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합니다.
저는 통신 장비 사업과 모바일 사업만 남기고 나머지 사업들은 전부 매각할 것입니다.”
폭탄 발언에 이사들이 다들 놀랐다.
“네? 전부 다 매각하신다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통신 장비 사업과 모바일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투자 자금이 많이 필요합니다.
현재 재정상 투자 자금이 현저히 부족하기에 다른 사업들을 매각하여 투자금을 확보할 겁니다.”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오랜 기간 우리 노카아를 끌고 왔던 고무, 제지 등의 사업을 정리하다니 이는 말이 안 됩니다.
스스로 노카아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아직도 국민들은 우리 노카아의 고무장화를 사랑하며 많이들 애용합니다. 우리 노카아의 대표작인 사업들입니다.”
“언제까지 굴뚝 산업에만 의존하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굴뚝 산업은 한계가 명확하고 노카아을 더 이상 발전시킬 수는 없습니다.
세계 산업 지형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에 도태되는 순간 영원히 낙오자가 되는 겁니다.
노카아도 변화에 맞게 따라가야 합니다.”
다른 이사가 강한 의문을 가진 채 질문하였다.
“회장님은 통신 장비 사업과 모바일 사업이 유망하다는 겁니까? 현재 두 사업의 매출은 다른 사업들보다 현저히 저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현재는 다른 사업들과 비교하면 매출 실적이 저조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 저조하다고 언제까지 저조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생산하는 TV나 전화기를 보십시오.
처음 TV나 전화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매출이 어땠을까요? 소수만이 사용하던 제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다수가 사용하는 제품으로 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핸드폰 역시 현재는 소수만 사용하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다수가 사용하는 제품이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시대를 미리 준비해야만 하는 겁니다. 남들보다 한 발짝 앞선다는 것은 그만큼 성공에 한 발짝 다가선다는 겁니다.
제가 며칠 전에 주주들에게 탄원서를 받기 위해 19세의 외국인인 한 주주를 만났었습니다.
그 주주가 하는 말이 미래에는 통신 산업이 유망하고 발전할 것이라며 노카아도 미래를 준비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19세의 주주도 미래를 내다보는 데 우리 이사들은 옛것에만 사로잡혀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미래도 희망도 없습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택했다면 대담하게 선택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앞으로 노카아는 통신과 함께 살아남거나 죽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절실한 마음으로 모두가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