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의 홀로서기-12화 (12/261)

12화

오늘은 어학원 개강 첫날이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였고 첫날이라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 나왔다.

먼 이국땅에서 처음 맞이하는 수업이고 아는 친구도 없고 어떤 분위기인지도 모르고 어떤 수업 방식인지도 모르기에 긴장된 마음도 있었지만 내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라 설렘을 가지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서둘러 왔지만 이미 10여 명의 학생들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대부분 앞쪽에 앉아 있었고 난 늘 앉던 대로 맨 뒤에 앉았다. 난 학창시절 키가 큰 편이라 맨 뒤에 앉았었다.

현재 키는 184였다.

9시가 되자 강사로 보이는 40대 초반의 여자가 들어왔다.

다행히도 까탈스럽게 생기지는 않았다. 관상은 과학이라고 전부는 아니지만, 대체로 맞는 편이었다.

강사가 활기차게 영어로 인사하였다.

“반가워요. 앞으로 여러분들과 1년 동안 핀란드어를 공부할 따루예요. 앞으로 잘 지내요.

다들 오늘이 첫날이고 서로 어색할 테니 먼저 각자 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요. 앞에서부터 시작해요.”

맨 앞 왼쪽에 앉은 여학생이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저는 프랑스에서 온 소피 마르소라고 해요.

예전부터 핀란드어를 배우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다가 이번에 일이 있어 프랑스에서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게 되어 핀란드에 오게 되었어요.

앞으로 친하게 잘 지냈으면 해요.”

계속 학생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에서 온 에밀리라고 해요. 저는......”

깜짝 놀랐다. 저 여자가 여기는 왜? 아닌가? 그녀는 티나였는데 이름도 틀리잖아.

근데 나이가 좀 어려 보이기는 하지만 미국인이고 금발도 맞고 입술 왼쪽에 있는 점도 똑같아 맞는 것 같은데.

예전에 스탠퍼드 대학원으로 유학 갔을 때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처럼 난 공부만 하였고 학생들하고 교류가 없이 지냈다.

그때 유아영처럼 나에게 먼저 다가온 여자가 있어서 한동안 만나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때 샤론이 자기 언니라고 소개해준 여자가 지금 일어서서 자기소개하는 에밀리였다.

고개를 저었다.

아닌가? 수십 년이 지나서 기억도 가물가물하였다. 닮은 사람인가 보네.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마지막 내 차례가 되자 유일한 동양인인 나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향하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진민재라고 합니다. 여러분들과 1년 동안 같이 공부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짧고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앉았다.

국적별로 보면 프랑스 2명, 영국 2명, 독일 3명, 스페인 2명, 이탈리아 2명, 터키 1명, 그리스 1명, 오스트리아 1명, 폴란드 1명, 미국 1명, 스위스 2명, 아일랜드 1명, 나까지 포함해서 총 20명이었다.

20명 중 남자는 5명이고 여자가 15명이며 나만 동양인이고 터키, 미국 빼고는 다 유럽에서 왔고 백인이었다.

미국에서 온 에밀리가 몸매도 좋고 가장 예뻤고 그 외 예쁜 여자들이 5명 정도 있었다. 남자들은 평범한 외모들이고 딱히 특이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재미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요로마 울리라 회장 대행은 단스케 은행 앞에 도착하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노카아 회장 대행 자격으로 채권단 은행 중에서 가장 채권을 많이 가지고 있는 단스케 은행과 담판을 지으려고 왔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가 노카아의 미래 운명을 좌우하는 자리이기에 두 어깨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부행장실 앞에서 섰다.

원래는 은행장을 만나고 싶었지만, 자꾸 피하는 눈치라 어쩔 수 없이 부행장을 만나기로 하였다.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있던 나울 라이네 부행장이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맞아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제가 전화 드린 노카아 회장 대행 요로마 울리라입니다.”

“반갑습니다. 앉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았다.

“회장 대행이면 아직 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일주일 뒤에 정식 이사회를 열고 결정할 겁니다.”

“좀 뜻밖입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긴박한 상황이라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노카아 임직원들의 강한 의지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카아의 분할 매각을 막아 주십시오. 노카아는 핀란드의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을 외국 기업에 꼭 매각해야만 합니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요로마 울리라 회장 대행의 강한 눈빛이 부담되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눈길을 어디에다 둘지 난감해하였다.

“저도 참 곤란한 상황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 또한 핀란드의 자존심을 외국 기업에 팔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현실을 보면 매각이 최선이기는 합니다.

우리 은행뿐만 아니라 다른 은행들도 요즘 점점 늘어나는 기업 부채와 개인 부채로 인해 힘든 상황입니다.

은행은 철저하게 실익을 따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우리 노카아는 회생하기 위해 파격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이사회에서 41살의 젊은 저를 회장으로 선임하려고 하겠습니까? 모험을 해서라도 이 위기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겁니다.

또한, 살을 베고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할 구조조정도 시행할 겁니다.

그러니 한 번만 기회를 주시고 지켜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켜보시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매각을 추진해도 되지 않습니까?

변화할 기회조차 주시지 않고 매각한다는 것은 너무나 냉정한 처사가 아닙니까?”

곤란한지 자신의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하였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지만, 저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저 하나 설득한다고 해서 대세의 흐름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요로마 울리라 회장 대행은 답답하였다.

부행장이 자신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자꾸 대답을 회피하기만 하였다.

자신이 모든 총대를 메고 왔건만 아무 소득 없이 물러간다면 다음 주에 있을 회장 선출은 물 건너간다.

그것보다 이대로 노카아가 분할되어 매각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자괴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몸과 마음을 강하게 억누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갈 수는 없다.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 한다.

“채권단에서 원하는 것은 뭐든지 열린 자세로 받아들일 테니 제발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잠시 고민하다 뭔가를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실익을 따지면 분할 매각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정치권을 이용하시면 길이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요로마 울리라 회장 대행은 머리를 망치로 세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채권단에서 분할 매각을 한다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채권단만 생각했던 거였다.

맞다. 국민들의 자존심을 이용해 정치권을 움직이면 매각을 막을 수 있다.

노카아는 핀란드의 대표 기업이고 자존심이기에 분할되어 외국 기업에게 매각된다는 것을 국민들이 알게 되면 분명 반대를 할 것이다.

정부 또한 경제 불황으로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노카아마저 외국 기업에 매각된다면 지지율이 수직 낙하하리라는 것을 잘 알 테니 정부 차원에서라도 막으려고 할 것이 분명하였다.

야당도 정부를 공격할 건수를 잡았기에 그냥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앞서 말했지만, 저도 개인적으로 매각을 반대합니다. 그리고 정치권이나 채권단에게 매각을 철회할 명분이 있어야 할 겁니다.

뼈를 깎는 자구책을 작성하시고 주주들의 매각 반대 탄원서를 받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빠르게 움직이셔야 할 겁니다.”

회사로 돌아온 요로마 울리라 회장 대행은 비서실장을 호출하였다.

“가신 일은 잘 되신 겁니까?”

“회생할 길이 하나 생겼어. 뭐냐면.........”

부행장과 나눈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설명이 끝나자 비서실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치권도 핀란드의 대표 기업인 노카아를 분할해 외국 기업에 매각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낄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야. 시간이 없어. 먼저 주주 명부부터 확보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럼 자구책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현재 놓인 노카아 상태에서 그대로 끌고 가면 결과는 안 봐도 뻔하였기에 작년부터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극단적인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과감하게 버릴 것은 전부 버리고 가야 한다. 함께 가려고 하다가는 전부 침몰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었고 시행하기에는 반발이 많을 것 같아 혼자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해놓은 게 있어. 이사회에서 논의해봐야 할 것 같아.”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이 나가자 요로마 울리라 회장 대행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새겨져 졌다.

***

“진!”

3시에 어학원 강의가 끝나 집으로 가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내 이름을 발음하기 힘들어해서 다들 나를 진으로 부른다. 근데 난 청바지라고 부르는 것 같아 별로였다.

에밀리가 뛰어오고 있었다. 하이힐 신고 뛰는 거라 넘어질까 봐 보는 내가 불안 불안하였다.

“천천히 와. 넘어질라.”

“진은 집에 맛있는 거라도 숨겨놨어?”

“그게 무슨 말이야?”

“강의 끝나면 바로 가잖아.

다른 학생들은 같이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그러는데 진은 맨날 어울리지도 않고 혼자 집에만 가니까 난 집에 뭐 숨겨놓은 줄 알았지.”

“그런 거 없어. 내가 낯을 가려서 그래.”

“나도?”

이 타임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아니.”

“그럼 요 앞에 분위기 좋은 카페 있는 데 가서 커피 마실래?”

이거 어디서 겪은 거 같은 기시감 같은 것이 들었다.

맞다. 내가 미국 스탠퍼드 대학원을 다닐 때 샤론도 나에게 이런 식으로 다가와 친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점심때라 커피가 아니라 밥을 먹으러 갔었는데.

근데 뭐지? 그런 샤론이 자기 언니라고 소개해준 여자가 티나였는데 에밀리는 티나랑 너무나 많이 닮았다.

이게 우연인가? 우연치고는 뭔가 이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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