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요로마 울리라 사장은 이사들이 하는 말들을 들으면서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회사의 운명이 거센 바람 앞에 놓인 연약한 촛불 신세라 언제 꺼질지 모르는데 한가하게 원론적인 논의만 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현실적인 감각들이 없으니 노카아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선한 물이 공급되어야 한다.
“제 생각으로는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올란드 은행에서만 강하게 분할 매각을 주장하여 다음 채권단 회의에서 매각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지만, 채권은행마다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 있어서 실제로 분할 매각은 어렵다고 봅니다.”
자신이 나서고 싶어도 노카아에 입사한 지 2년밖에 안 되었고 서열 10위라 망설이고 있었는데 라이네 이사의 말을 듣고서는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 여러 이사님들은 뭔가 단단히들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틀에 박힌 구태의연한 사고 속에서만 지내다 보니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겁니까?
은행을 믿는 다고요?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없는 곳이 은행입니다. 제가 은행 책임자라면 제일 먼저 노카아를 분할 매각을 추진할 겁니다.
그만큼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처절하고 냉혹하다는 겁니다. 그 점을 먼저 자각해야 합니다.”
라이네 이사가 자신의 의견이 무참히 부정당하자 얼굴이 벌게지며 큰소리쳤다.
“그러는 울리라 이사는 대책이 있는 거요?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혼자 잘난 척하면 누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줄 압니까?”
“우리가 손 놓고 있다면 노카아는 채권단의 계획대로 분할 매각되어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됩니다.
일단은 채권 은행단을 설득해서 매각을 막아야 합니다.”
“그걸 몰라서 가만히 있는 줄 아시오? 어떻게 설득할지? 매각을 막을지? 지금 그 문제를 가지고 회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오.”
“우리 노카아는 이대로는 도저히 회생 불가능합니다.
뭔가 특단의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제가 채권단을 만나 설득해 보겠으니 전권을 주셨으면 합니다.”
요로마 울리라 사장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노카아 서열 2위인 루페 매키넨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해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지금 놓인 위기를 벗어나기 힘들다고 생각하오.
우리에게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오.
그 변화를 이끌어갈 신선한 인물이 절실히 필요하고 현재 공석인 회장 자리의 주인을 새로 정해 회장 중심으로 뭉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오.”
“생각하시는 인물이 있습니까?”
루페 매키넨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이사들을 쭉 둘러 보고서는 입을 열었다.
“그렇소. 지금 외부에서 데려오기에는 우리가 매우 급하오. 내부에서 결정해야 할 것 같소.”
루페 매키넨의 말이 끝나자 이사들은 혹시나 자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들뜨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루페 매키넨의 말이 이어졌다.
“내 생각으로는 새로운 회장으로는 모바일폰 사장 요로마 울리라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오.”
이사들이 전혀 의외라는 표정들을 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울리라 이사가 능력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거대한 노카아를 끌고 가기에는 아직 나이나 경륜이 부족합니다.”
“우리들은 나이나 경륜이 부족해서 노카아가 이 지경까지 오도록 만들었소? 변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오.
울리라 이사 말처럼 우리들은 늙어서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따라갈 수도 없기에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젊은 피가 필요한 시점이요.
모험하지 않으면 노카아는 그대로 침몰할 것이오. 다른 대안이라도 있소?”
“지금 당장 결정하자는 겁니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소이다. 상황이 다급하게 흘러가고 있지 않소이까.”
“저는 찬성입니다. 울리라 이사가 비록 나이는 아직 젊지만, 미국 월가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임원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저는 믿어 보겠습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능력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비상 상황입니다. 평상시라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선장을 맡기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로마 울리라 사장은 루페 매키넨 이사의 충격적인 발언에 매우 놀랐다. 자신을 신임 회장으로 추대하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하였다.
한편으로는 이게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 자리의 욕심보다는 자신이 회장이 되어야 노카아를 새로 싹 뜯어고쳐 위기에서 구할 수 있기에 회장이 되고 싶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양보는 미덕이 아니었다.
“제가 회장이 된다면 책임지고 노카아를 살려내도록 하겠습니다.”
***
“진!”
루페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루페는 객장에서 처음 나에게 말을 건넨 투자자이며 객장에 일주일 동안 계속 나오자 그새 친해졌다.
나이는 아버지뻘이지만 친구처럼 지내기로 하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나오셨네요?”
“여기 나오지 않으면 할 일이 없어. 또 여기 오면 마음이 편안해지거든.”
루페는 개미 투자자이지만 자금력이 어느 정도 있는 중간 손 투자자이었다.
현재 핀란드 경제가 좋지 않아 보유했던 주식을 작년에 빠르게 전부 매도하고 지금은 관망하고만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객장에는 꾸준히 나온다.
소나기가 세차게 내릴 때는 피하는 것도 투자의 한 방법이라며 자산을 지키는 것이 곧 이익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장이 안 좋을 때도 계속 매수와 매도를 반복하며 자산을 잃는 어리석은 투자는 전형적인 하수들이라고 하였다.
처음 본 날 유망한 종목을 추천해주겠다면 몇 개의 종목을 한동안 설명하더니만 지금 매수하지 말고 눈여겨보다가 내년쯤에 매수하라고 하였다.
내가 노카아 주식을 대량으로 매수한다는 것을 알고는 거품을 물며 당장 매수를 중단하고 매수한 주식도 당장 매도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매수를 멈출 수 없는 법.
오히려 내가 노카아 주식을 매수하여 장기적으로 보유하는 전략을 짜라고 건의했더니만 장기 보유라면 나쁘지 않지만, 만약 청산되면 큰 손해를 볼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 보내는 것이 더 좋지 않아요?”
내 말에 기겁하며 인상을 썼다.
그 말이 기겁할 말인가?
“자네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 와이프 잔소리 듣는 게 얼마나 고역인 줄 모르지? 그 소리 들을 바에는 여기 나오는 게 더 편해.
자식들은 다 자기 일 하러 나가 집에 없어.”
내가 본 것은 작은 집 경우뿐인데 작은아버지가 작은 엄마한테 꼼짝을 못하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그래도 믿을 건 가족뿐이죠.”
“그건 맞아. 오늘도 노카아 매수할 거야?”
난 금액이 커서 매수하는데 한 달 정도 걸릴 줄 알았는데 매수보다는 매도 물량이 압도적으로 많고 내가 매도 물량을 다 받아주자 매도 물량이 더 많이 나와 잔액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네. 이제 매수할 잔액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오늘이나 내일이면 다 끝날 것 같아요.”
“난 걱정돼. 내가 주식 투자만 20년 동안 했지만, 당장 쓰러질 회사에 엄청난 거액을 투자하다니 자네처럼 무식하게 투자하는 것은 처음 봐.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그걸 잘 알면서도 자넨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거야. 20년 주식 투자한 나도 심장 떨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자네 심장은 강철로 만들어졌어?”
그거야 미래를 아니까 그러는 거지. 미치지 않고서야 곧 도산할지 모르는 기업에 거액을 투자하는 모험을 하겠어?
피식 웃었다.
“저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거든요.”
“뭐 믿는 구석이 있는 거야?”
“노카아는 100년이 넘은 기업이에요.
그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100년 이상 기업을 이어온다는 게 결코 쉬운 것은 아니거든요.
지금은 매우 힘든 상황이지만 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거예요. 위기는 이번뿐만 있었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전에도 위기가 있었지만 잘 극복하고 지금까지 왔어요. 전 이번에도 잘 극복할 것이라고 노카아를 믿어요.
지금처럼 거의 껌값일 때 많이 사두어야죠. 이런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거예요. 안 그래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노카아 주식 매수하라는 말을 하지 않겠지만 나한테 밥도 커피도 사주고 잘해주어 고마워서 권유하였다.
강요할 수는 없으니 결정은 루페 자신이 하는 거겠지만.
처음에는 과도한 친절에 사기꾼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경계했는데 그게 아니라 순순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이었다.
핀란드에서 한 달도 살지 않았지만, 아직 인종 차별을 당하지는 않았다.
인종 차별은커녕 핀란드에 동양인이 거의 없다 보니 나를 신기하다는 듯 먼저 다가와 말을 걸기도 하고 내가 뭘 물어보면 친절하게 다들 잘 알려주었다.
핀란드에 왜 왔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때는 핀란드가 좋아서 유학 왔다고 대답하면 다들 좋아하면서 잘해주려고 한다.
유용하게 써먹는 대답이었다.
루페도 그래서 잘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
내 말에 긍정하면서도 이건 아닌데 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껌값인 것은 확실해. 그럼 나도 조금만 투자해볼까?”
“남자가 쪼잔하게 조금이 뭐예요? 사내대장부답게 지를 땐 확실히 지르고 보험으로 장기 투자하세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떻게 핀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보다 핀란드에 온 지 한 달도 안 된 자네가 더 믿음이 강해.”
“애국하는 셈 치고 투자하세요. 핀란드 경제도 어려운데 어려운 기업에 투자해야죠.”
“생각 좀 해볼게.”
“진!”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창구 여직원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앞으로 갔다.
“무슨 일 있어요?”
“방금 마지막 매수 주문이 체결되었어요.”
됐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2000년 6월이 최고점인데 8년을 언제 기다리지?
“드디어 끝났네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제 안 오시는 거예요?”
“네.”
아쉬운 듯한 얼굴이었다.
“매도하시러 오지 않아요?”
“5년 이상의 장기 투자로 하는 거라 단기간에 매도할 일은 없어요.”
“노카아 주식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투자하실 일이 있으면 오세요.”
“네. 그럴게요.”
“그리고 제가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외국인이 한 종목을 몇 % 이상 보유했을 때 증권거래소에 신고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한번 알아보세요.”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았다. 알아봐야겠네.
“알았어요. 고마워요.”
“매수 거래 내역 출력해드릴까요?”
“네. 부탁해요.”
출력한 자료를 가지고 와서 자리에 앉았다.
“루페! 한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요. 외국인이 한 종목을 몇 % 이상 보유하면 신고해야 하나요?”
“그 생각을 못 했네. 신고해야 할 거야. 2개월 안에 신고만 하면 되니까 어려운 것은 없어.
내가 도와줄 테니까 내일 나랑 같이 가.”
“고마워요.”
“매수는 다 한 거야?”
“네. 방금 모두 매수가 끝났어요.”
“그럼 이제 여기 안 와?”
“네. 다음 주에 어학원 개강이기도 해요.”
“가끔 놀러 와. 난 항상 여기 있으니까.”
“네.”
출력한 자료를 펼쳐보았다.
매수 평균 단가가 0.85 마르카에 총 매수 주식은 67,058,820주였다.
내가 대량으로 매수를 하자 주가가 조금 상승하여 예상보다 400만 주 줄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루페가 궁금하다는 듯 어깨너머로 보며 물었다,
“나도 봐도 돼?”
“보세요.”
내역서를 보고서는 바로 탄성을 자아냈다.
“와! 대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