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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의 홀로서기-7화 (7/261)

7화

오늘은 아침부터 봄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유학 문제로 마음도 심란한데 비까지 내리자 더욱더 마음이 심란하여 하루종일 집중하지 못하였다.

저녁이 되자 빗줄기가 더욱 굵어져 저녁만 먹고 일찍 집에 들어왔다.

내 방 창문 앞에서 쏟아지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세차게 내리치는 빗줄기에 꽃잎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니 마치 꽃잎이 가련한 내 신세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41년을 거슬러 올라 과거로 왔지만, 주위에 내 편은 하나도 없이 홀로 세상을 향해 싸우다가 떨어지는 꽃잎이 바로 나인 것 같았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비가 와서 감상적으로 되었나? 이런 나약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떡해?

설령 사방이 온통 적들로 둘러싸여 있어도 앞만 보고 전진해야지. 미래는 찬란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 힘내자. 아자. 아자. 파이팅.’

스스로 응원을 하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네.”

방문이 열리며 작은 엄마가 들어왔다.

“아직 안 자지?”

“네.”

“잠시 이야기 나눌까?”

“네.”

작은 엄마가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자 난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 제안에 대답을 가져온 것 같은데 앉고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떤 대답을 할까? 얼굴을 살폈지만 무표정한 얼굴이라 짐작하지 못하였다.

먼저 물으면 아쉬워하는 게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 작은 엄마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궁금하지 않아?”

“기다리면 알게 되겠죠.”

“요즘 너를 보면 마치 딴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변한 이유가 뭐야? 아닌가? 이게 본모습인가? 그동안 숨겼던 거야?”

“원래부터 이랬을까요? 제가 왜 변했는가는 작은 엄마가 잘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내가 못 해줬다는 말로 들리네.”

잘 알면서 왜 물어?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면 그게 정답이겠죠.”

“이제라도 너의 본모습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인간은 극한의 상황 속에 몰리면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본연의 모습을 보이거든요.”

뭐가 웃긴지 호호거리며 웃었다.

“너 참 재밌다. 날 나쁜 마녀로 만드네.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지냈을까? 난 그게 더 궁금하네.”

“그 이야기 하러 오신 거면 전 대답해줄 말이 없어요.”

“좋아.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 네가 한 제안 받아들일게.”

됐다. 이제 투자할 종잣돈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걸 기반으로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나만의 철옹성을 건설할 것이다.

“작은 엄마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죠. 서로 윈윈하는 거래예요.”

“대신 거래 내용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유학 가는 것도요?”

“말할 사람이라도 있어?”

하긴 말할 사람이 없기도 하였고, 있다고 해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

“알았어요.”

***

“오빠!”

“오빠!”

“민재 오빠!”

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유일한 나의 우군인 진서영이 내 앞으로 뛰어왔다.

기분 좋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부르는 데 그냥 가면 어떡해?”

“날 부르는지 몰랐지. 진작에 이름을 부르지 그랬어?”

새침하게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러네.”

“오늘은 학교 일찍 가네.”

“오늘부터 기말고사잖아. 일찍 가서 공부 좀 하려고.”

“기특하네. 나도 오늘부터 기말고사인데.”

갑자기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오빠야 공부 잘하니까 걱정 없잖아. 난 이상하게 허들이 있는지 그 이상을 못 뛰어넘겠어. 해도 해도 맨날 그 자리야.”

“원래 공부하다 보면 정체되는 구간이 있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공부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구간을 뛰어넘게 돼.

그다음부터는 막히는 곳 없이 고속도로가 뻥 뚫리는 거야. 그러니 조금만 참고 열심히 해. 이제 중2이니까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알았어. 근데 오빠는 유학 가니까 시험 성적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야?”

뭐야? 나보고 유학 가는 거 말하지 말라면서 서영이까지 알고 있는 거야? 그럼 작은 집 식구는 다 알고 있다는 말인데.

어이가 없네.

“어떻게 알았어?”

“말도 마. 엄마가 동민 오빠 미국으로 유학 보내려고 지금 난리야. 오빠는 가지 않겠다고 하고.

동민 오빠 성적이 안 좋아 대학 못갈 것 같으니까 엄마는 유학이라도 보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동민 오빠는 영어도 못 하는데 미국 가서 무슨 공부 하냐고 펄쩍 뛰면서 싫다고 하고 있어.

동민 오빠가 민재 오빠는 왜 유학을 간다고 해서 자기까지 피해 본다고 나한테 하소연하더라. 그래서 알았어.”

과거에 진동민은 유학을 가지 않고 지방대에 갔다.

과거에도 유학을 보내려다가 실패하고 지방대에 간 건지? 아니면 나로 인해 진동민을 유학 보내려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왠지 나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까지 과거와는 다르게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았다. 내가 바뀌니 그에 따른 나비 효과인가?

“동민이 성격에 하기 싫은 거 시키면 역효과만 날 텐데.”

“그러니까 엄마는 싫다는데 왜 보내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여기서도 공부 안 하는데 유학 가면 공부하나?

괜히 사고나 치면 더 골치 아프지. 사고 쳐도 한국에 있어야 수습할 수 있지.”

“작은 엄마도 모르는 게 아니니까 잘 결정하시겠지.”

“오빠는 가면 언제 와?”

“글쎄? 한 5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5년이면 나 대학생 때 오겠네?”

“그렇지. 오면 서영이 숙녀가 되어 있겠네.”

“지금도 숙녀거든.”

“꼬마 숙녀지.”

*

문제를 다 풀고 펜을 내려놓았다.

난 이제 전교 1등이 아닐 뿐 아니라 반에서도 1등이 아니었다.

처음 본 모의고사에서 반에서 30등을 하였다. 내 인생에서 이런 처참한 등수는 처음이라 좀 충격이었다.

그러니 담임 또한 놀라서 나를 불렀겠지.

한국에서 대학을 가든 말든 이건 내 자존심의 문제라 공부를 시작하였고 신기하게도 공부를 하자 과거의 나의 기억인지 미래의 나의 기억인지 교과 내용이 조금씩 기억이 났다.

하지만 예전처럼 전교 1등 할 정도는 아니라서 지난 월말고사와 중간고사에서 반에서 5등, 3등을 하였다.

죽어라 공부하면 전교 1등을 다시 하겠지만 무의미하여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 정도 선에서 성적을 유지하기로 하였다.

작은 엄마와 통화한 담임은 그날 이후로 나에게 더는 성적이나 대학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벨이 울리고 1학기 기말고사 시험이 모두 끝났다. 후련하였다.

김윤석이 시험에서 해방되어 홀가분하다는 듯 웃으며 다가왔다.

“시험 잘 봤냐?”

“대충 너는?”

“나야 늘 문제는 잘 보지만 정답은 항상 비 사이로 피해가잖아. 시험도 끝났는데 오늘도 독서실 갈 거야?”

놈의 얼굴을 보니 오늘은 독서실에 가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긴 만화책이나 무협지를 읽어도 독서실에서 있는 시간이 무척이나 지루하겠지.

그런데도 늘 따라오는 것을 보면 대단해. 그런 끈기와 집념으로 공부하면 좋을 텐데.

그래 오늘은 나도 쉬고 나 쫓아다니느라 고생한 너도 쉬자.

“뭐 하고 싶은데?”

“터미네이터 2 이번에 개봉했더라. 우리 영화 보러 가자.”

영화라? 난 뭐 때문에 빡빡하게 살았길래 이전 삶에서 영화를 본 적이 거의 없었냐?

고등학교 때는 한 번도 못 봤고 대학교 때는 여자 친구와 2번 보러 간 것이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유아영이 보고 싶네. 뭐 하고 지낼까? 고3이니 열심히 공부하고 있겠지.

유아영은 대학 2학년 때까지 공붓벌레답게 공부만 하며 지내던 나에게 다가온 나의 첫 번째 여자 친구이자 나의 첫사랑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자 웃음이 나왔다.

3학년 때 학교 축제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고 수줍어하던 나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대시하였다. 만약 유아영이 대시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인연은 그날로 끝이 났을 텐데.

수줍어하던 내가 신기했고 호기심이 들었다고 하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키 크고 잘생긴 내 외모에 호감이 있었던 거지.

2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시기였다.

유아영은 법대생이라 고시 준비를 하느라 우리는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였고 밥 먹고 커피 마시는 시간이 데이트하는 시간이었다.

유아영은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4학년 때 사시에 합격했고 내가 유학을 가게 되면서 우리의 인연이 끝이 났다.

나중에 검사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이후로는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잘 살았을 것이다.

생각 난 김에 오늘 보러 갈까?

“터미네이터 2 말고 양들의 침묵 보러 가자.”

“터미네이터 2가 더 재미있어.”

“그럼 넌 터미네이터 2 보러 가. 난 양들의 침묵 보러 갈게.”

놈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꽤 보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게 보고 싶으면 자기 혼자 가든가 다른 애랑 가면 되지.

내가 왜 따라가야 하는데?

“정말 안 갈 거야?”

“내가 너보고 강제로 양들의 침묵 보러 가자는 건 아니잖아. 그냥 각자 보고 싶은 거 보러 가자.”

결국, 양들의 침묵을 보자 삐져서 말이 없이 내 뒤를 따라오는 김윤석을 신경 쓰지 않고 내 갈 길을 무쏘처럼 우직하게 갔다.

저 앞에 세화여고 정문이 보여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지 않았는지 교문 앞에서는 적막감이 흘렀다.

우리 학교는 야간 자율이 진짜로 자율이다. 하고 싶은 사람만 남아서 하고 가고 싶은 사람은 가도 된다.

“여기 세화여고 아니야? 여긴 왜 온 거야?”

“볼 일이 있어서.”

“누구 보러 온 거야?”

“글쎄? 갑자기 꽃 구경이 하고 싶어서.”

“그게 무슨 말이야?”

시계를 보니 9시 5분이 되었다. 세화여고는 9시까지만 야간 자율을 하기에 이제 나올 때가 되었다.

“너도 꽃구경이나 해.”

조금 있자 학생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였고 혹시나 유아영을 못 볼까 봐 집중하며 학생들의 얼굴을 재빨리 스캔하였다.

10분 정도 지나자 드디어 내 레이더에 친구와 수다를 떨며 걸어 나오는 유아영이 포착되었다.

반갑다. 유아영!

널 다시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그때도 예뻤지만, 지금은 풋풋한 게 더 예쁘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만 보았다. 따라갈까도 생각했지만 이미 끝난 인연인데 미련을 가져서 뭐하나?

얼굴 한번 본 것으로 만족하였다.

“이제 집에 가자.”

“뭐? 간다고?”

벙찐 얼굴로 서 있는 김윤석을 뒤로하고 걸어갔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1992년 2월이 되어 핀란드로 떠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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