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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의 홀로서기-6화 (6/261)

6화

전미정은 답답하고 머저리 같은 남편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단점도 있지만 그만큼 자기 뜻대로 이용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두 가지 다 가질 수는 없겠지.

아버님 건강이 안 좋아 올해부터 남편이 그룹 경영을 맡아 이끌어 가고 있었다.

남편이지만 무슨 남자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배포도 없고 소심하고 매사에 자신이 없는지 하나에서 열까지 자신이 옆에서 조언해주고 도와주며 지금까지 왔다.

하는 것을 보면 답답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아버님 눈 밖에 날까 봐 걱정부터 앞섰다.

자신이 아는 아버님은 냉정하신 분이었다.

비록 아들일지라고 경영을 제대로 못 하면 망설이지 않고 아들을 내치고 전문 경영인을 내세울 분이다.

이런 심각성을 남편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다.

아직은 그룹을 맡은 지 얼마 안 되어 눈에 띄는 것이 없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과 과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기에 하루하루가 불안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그룹 일에 전면에 나서고 싶지만, 아버님 때문에 지금까지 참고 있었다.

지금도 그룹 일에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지만, 안심이 안 되어 좀 더 비중을 늘리고, 나중에 아버님이 돌아가시며 그때는 화려하게 전면에 나설 생각이었다.

“별걱정을 다해. 대한민국에서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다고? 그럴 일 절대 생기지 않도록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민재 제안대로 할게.”

“난 왠지 찝찝해.

민재가 왜 갑자기 그런 제안을 했을까? 이제 고3인데 그런 제안을 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아? 대학 졸업할 때쯤이라면 몰라도.

오늘 아버지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닐까?”

전미정은 민재 친구에게 들은 ‘답답한 한국을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이 떠올랐다.

친한 친구에게 하는 말이니 속에 있는 말일 것이다.

“나도 뜬금없이 유산 상속을 포기한다고 말해 이상하기는 했어.

민재가 똑똑하기는 해도 아직 사회 경험도 없는 어린애야. 내가 보기에는 돈을 받아 외국에서 자유롭게 살려고 하는 것 같아.

나 같아도 그러고 싶을 거야. 다른 숨은 뜻은 없어. 당신 조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삼촌의 도리이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알았어. 당신이 잘 처리해.”

“그럴게.”

작은 엄마와 이야기를 끝내고 내방으로 올라와 씻고 침대에 누웠다.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얼떨결에 미리 말하게 되었다.

잘했어. 시간 끌어봤자 뭐해? 될지 안 될지 미리 결과를 알면 다음 대안을 준비할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어떤 결정을 내릴까? 작은 엄마의 표정을 보니 혹하는 것 같아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았다.

사실 작은 엄마 입장에서 두 손 들고 환영할만한 제안 아닌가?

작은 것을 내주고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인데 그걸 놓칠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었다. 작은아버지라면 놓칠 수도 있겠지만.

김윤석에게 미리 떡밥을 깔아 놓았기에 아무 의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할 것도 없지. 왠지 예감이 좋았다.

*

수업 시작과 동시에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들이 10여 명이 보였다. 대학을 진작에 포기한 아이들이었다.

선생님이 혼낼 만하지만, 수업 시간에 떠드는 것도 아니기에 모르는 척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과거로 돌아와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단 하나 옥에 티가 있었다.

그건 바로 따분하고 지루한 수업을 듣는 것이다.

수업 시간 내내 내가 왜 이걸 듣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여러 번 의문이 들었지만, 현실의 신분이 고등학생이니 어쩔 수 없기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듣고 있었다.

이러니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하였다.

그렇다고 저들과 같이 엎드려 잘 수도 없었다.

며칠 전에 지루하여 한 번 엎드렸다가 선생님이 수업하시다가 멈추고는 나한테 와서 어디 아프냐? 피곤하냐? 묻는 바람에 다시 수업을 들어야만 하였다.

전교 1등은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지도 못하는 서글픈 현실이었다.

‘딩동댕.’

드디어 수업이 끝났다는 반가운 벨 소리가 울렸다. 자던 아이들도 귀신같이 일어났다.

가방을 정리하는데 담임이 들어왔다.

“요즘 시국이 어수선하니까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일찍 들어가도록. 이제 학력고사가 221일 남았어.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자. 이상으로 종례 끝.”

나가려다가 멈춘 담임이 나에게 시선을 돌려 한마디 하고서는 나갔다.

“민재는 잠깐 나한테 들렀다가 가도록.”

귀찮게 난 또 왜 부르는데?

“독사가 널 왜 부르는 거야?”

독사는 담임의 별명이다. 누가 지었는지 별명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었다.

어느새 다가와 묻는 김윤석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나도 모르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자 김윤석이 따라왔다.

“같이 가.”

교무실로 들어가 책상에 앉아 뭔가를 보는 담임 앞으로 갔다.

“선생님!”

중단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

“어 왔어. 앉아.”

“네.”

옆에 있는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아주 큰 일이 있기는 있었지.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내 몸으로 왔으니까 이보다 더 한 일이 어디 있겠어?

“아무 일 없어요.”

“그래? 근데 이번 모의고사에서는 성적이 왜 많이 떨어진 거야?”

비록 내가 전교 1등을 도맡아 했지만 그건 과거의 나이고 미래의 나는 아니었다.

영어, 수학, 국어는 어느 정도 풀 수는 있었는데 암기 과목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대부분 찍었다.

모의고사 성적이 개판이라 나를 부른 거였구나.

그나저나 성적이 많이 떨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텐데 공부를 해야 하나?

내가 한국에서 대학 갈 거면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겠지만 유학 갈 거라 힘들게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고등학교 2년 내내 전교 1등만 하다가 갑자기 성적이 팍 떨어지면 그것도 문제인데. 적당히 공부해야 하나?

“사실 저는 한국에서 대학 갈 생각이 없어요. 고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유학 갈 생각이라 지금은 영어만 중점적으로 공부하고 있어요.

그래서 성적이 좋지 않게 나왔을 거예요.”

“그래서 영어는 만점이야? 유학도 좋지만, 한국에서 대학 간 후에 가도 되지 않아? 네 실력이면 무조건 서울대는 합격인데.”

“유학 갈 건데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래도 그게 아니지. 유학도 좋지만,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더 공부하고 싶으면 그때 대학원을 유학 가는 게 더 좋을 거야.”

이 시기의 고등학교는 서울대에 몇 명을 입학시켰냐는 기준에 따라 명문 고등학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서울대에 입학할 확실한 패를 쥐고서도 다이하겠다고 하니 담임이 다급한가 보다.

실제로도 내가 서울대에 입학했으니까.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 학력고사도 보지 않을 거예요.”

“작은 엄마하고도 상의한 거야?”

“작은 엄마와 상의해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오랫동안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한 거예요.”

“민재야! 담임이 아닌 인생 오래 산 선배로서 말하자면........”

담임이 달콤한 말로 계속 설득하였지만 단호한 나의 거절 의사에 한발 물러섰다.

“네 생각을 잘 알았고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잘 생각해봐. 어떤 결정이 너의 앞날에 더 좋을지를.

또 앞일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니 영어 공부만 하지 말고 다른 과목도 열심히 공부하고.”

“네. 알겠어요.”

“그래. 가봐.”

“네.”

담임이 전화기를 드는 것을 보고 나왔다. 작은 엄마에게 전화하는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교무실 앞에서 기다리던 김윤석이 얼른 다가왔다.

“독사가 뭐래?”

“유학 가지 말래.”

“뭐라고 했는데?”

“가겠다고 했지.”

김윤석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전교 1등이 대학을 안 간다고 하니 독사 똥줄 타겠네.”

“나 이제부터 전교 1등 아니야.”

“한번 전교 1등이면 영원한 전교 1등이지.”

“부담돼서 이제 그 자리에서 내려오련다. 그러니까 전교 1등이라는 소리 다시는 하지 마.”

“내 맘이지.”

“나도 내 맘대로 이제 너하고 같이 안 다닐 거야. 따라오지 마.”

한마디 하고 앞으로 걸어나가자 김윤석이 뛰어와 내 어깨에 팔을 걸었다.

“그럴 수는 없지. 바늘 가는 데 실도 가야지. 전교 1등이라는 말 안 할게. 독서실 갈 거지?”

지금처럼 능청스럽게 말하는 놈을 보면 전혀 스파이 같지가 않고 친한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파이 짓을 하려고 친한 척하는 건지? 친하기는 하지만 말 못 할 사정 때문에 스파이 짓을 하는 건지 헷갈렸다.

그러고 보니 난 이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내 주변에서 실실거리다 보니 편안하게만 생각했지 집안 형편이 어떻고 부모 상황이 어떤지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난 이놈을 친한 친구로 생각했던 건가?

원래 사람이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존재이기에 난 공부밖에 몰랐고 내 처지가 가장 기구하다고만 생각하여 피해망상에 빠져 지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서 난 이놈에게 무엇을 원했던 건가? 난 이놈에게 관심도 주지 않았으면서 날 뒤통수쳤다고 미워할 수 있는 건가?

해준 것도 없으면서 바라기만 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 반성하게 되었다. 괜히 미안했다.

“독서실 말고 오늘은 너희 집에 가면 안 될까?”

녀석이 놀라 눈이 커졌다.

“우리 집?”

“응. 가면 안 돼?”

“안될 것까지는 없는데 너희 집 하고는 많이 다를 거야.”

“다르면 어때 가자. 오늘 기분도 꿀꿀한 데 땡땡이치자.”

“먹을 것도 별로 없는데.”

“먹으러 가냐? 저녁은 나가서 사 먹으면 되지.”

“알았어. 가자.”

녀석의 집은 오래되고 허름한 연립 주택이었다.

25평 정도 돼 보이며 방은 3개였다. 예상대로 집안 형편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녀석이 멋쩍게 웃었다.

“너희 집과는 다르지?”

“가족은 어떻게 돼?”

“나도 너처럼 아빠가 없어. 어렸을 때 돌아가셨거든. 엄마하고 대학교 다니는 누나가 있어.”

그래도 넌 엄마하고 친누나가 가까이에 있잖아? 난 아무도 없어 항상 외롭고 쓸쓸했거든. 그것도 행복이야.

“어머니는 집에 안 계셔? 인사드리게.”

“엄마랑 누나 다 늦게 들어와. 엄마는 낮에 식당에 나가서 저녁 10시까지 일 하시다가 오시거든.

누나도 학교 끝나고 아르바이트하다가 와.”

마음이 착잡하였다.

집안 형편이 이러니 작은 엄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 거였다.

아무리 그래도 돈에 친구를 팔았다는 것은 용서하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정상 참작은 할 수 있겠지만.

어렵고 힘들면 무슨 짓이라도 다 해도 용서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렵고 힘들어도 양심을 파는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이런 약점을 이용해 친구를 팔게 만든 작은 엄마가 사람 같지가 않았다. 꼭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얼마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생 신분에 쉽게 공돈이 생기면 흥청망청 쓸 텐데 이놈은 그러지는 않았다.

특별히 낭비하는 것도 없었고 누구나 다 신는 메이커 신발도 신고 다니지 않았다. 그 점은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저축하거나 엄마에게 드렸겠지.

이놈에게 왜 스파이 짓 했냐고 물어볼까? 아니다. 그걸 묻는 순간부터 우리는 예전과 같은 사이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 묻지 말자.

이제 1년도 남지 않았고 유학 가면 다시 볼일도 없을 테고 나도 역으로 이용하면 되고 그동안 정신적으로 의지도 되고 도움도 받았으니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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