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네. 학교 끝나고 갔어요.”
“왜 간 거야?”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사업 자금을 요구했다고 하면 귀찮기만 할 테니 대충 둘러대자.
“이제 저도 고3인데 앞날에 대해 지금부터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 할아버지께 상의 좀 하려고요.”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는데?”
“잘 생각해서 판단하라고 하셨어요.”
“네가 생각하는 너의 앞날은 뭔데?”
“글쎄요? 고민 중이에요.”
원하는 대답이 아닌지? 내 대답이 시원치 않았는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저 인상 찡그리는 거 진짜 볼 때마다 짜증이 나고 보기 싫었다. 어린 내 앞에서 굳이 싫은 감정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나의 감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날 무시한다는 의미겠지.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데?
“대학은 어디로 갈 거고 학과도 결정한 거야?”
“저는 재수할 생각이 없기에 대학과 학과는 성적에 맞게 갈 생각이에요.”
“네 성적이면 서울대도 충분히 가겠지. 근데 네 앞날을 생각하면 좁은 한국보다는 외국으로 유학 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넌 공부도 잘하니까 유학 가도 잘 할 거야.”
저 말 예전에 날 유학 보낼 때도 했던 말인데. 이번에는 몇 년 일찍 듣네. 내 행동이 바뀌어서 그런가?
설마 김윤석이 내가 유학 가고 싶다는 것을 벌써 보고했나? 떡밥을 물어서 날 유학 보내려고 하는 건가?
그러면 할아버지한테는 기대할 수 없으니까 멍석 깔렸을 때 협상을 할까?
내 예상보다 빠르기는 하지만 말 나온 김에 빨리 마무리 짓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유학 가기 전까지라도 마음 편히 지내야지.
“제가 유학 가면 비용 지원해 주실 건가요?”
“당연하지. 네가 유학 가서 공부에 전념하도록 부족함 없이 지원해 주지.”
말로만? 그래서 이전에는 갑자기 지원을 딱 끊으셨어요? 지금의 저는 그 말을 순진하게 믿을 제가 아니거든요.
“작은 엄마는 제가 이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시죠? 아니 제가 존재하는 자체가 불편하신 거죠?”
갑작스러운 나의 돌직구에 작은 엄마가 당황한 듯 나를 잠시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아니라 네가 이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말 나온 김에 우리 솔직해지시죠? 작은 엄마는 제가 눈앞에서 사라지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계시잖아요?”
이 집에서 지금까지 작은 엄마를 도발한 사람은 없을 거다. 작은아버지도 이상하게 작은 엄마한테 꼼짝을 못한다.
그런데 기죽어 지내던 내가 도발하자 화가 난 듯 언성이 높아졌다.
“애 말하는 것 좀 봐.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게 막말을 해!
지금까지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고 했나 봐. 이 집이 싫으면 나가든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방귀 뀐 놈이 더 성낸다고 정곡을 찔리자 오히려 더 화를 내는 작은 엄마였다. 지금의 나는 작은 엄마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작은 엄마가 원하시는 대로 눈앞에서 사라져 줄게요.
대신 저만 손해 볼 수 없으니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겠어요. 70억 주시면 작은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요.”
“넌 70억이 애들 푼돈인 줄 아니? 유학 비용을 대줄 수는 있어도 70억 원을 줄 수는 없어.”
“그럼 유학 가지 말고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갈까요? 저도 그게 더 편하거든요.”
아마 그것도 싫을 거다.
내가 할아버지랑 친하게 지내는 것을 막고자 아빠가 돌아가시자 바로 나를 이 집으로 데려온 거니까.
“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고 해?”
은혜는 무슨? 자기 필요에 의해 나를 데려오고서 눈칫밥을 먹게 했으면서. 그런 얼어 죽을 놈의 은혜는 받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쉽게 70억 원을 줄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결국, 히든카드를 꺼내야 하나?
“좋아요. 작은 엄마가 가장 원하는 것을 드릴게요.
70억 원을 주시면 제가 유학을 가고 상속 포기를 할게요. 이 정도면 작은 엄마 입장에서 손해는 아닐 거예요.
오히려 이득이 아닐까요?”
상속 포기를 꺼내자 고민하는 듯하였다. 아마도 어떤 게 이득인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정말 상속 포기를 하겠다는 거야?”
“네. 제가 작정하고 달라붙으면 그 이상도 받아낼 수 있어요.
하지만 가족끼리 유산 다툼만큼 꼴사나운 게 없기에 싸우기 싫어 70억 원만 원하는 거예요.
만약 제 제안을 거절하신다면 저는 나중에 변호사를 고용해 그 이상을 받아낼 거예요. 그러니 제가 내민 손을 잡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70억은 어린 네가 가지기에는 너무 큰돈이야. 네가 큰돈을 가졌다는 것을 알면 사기꾼들이 가만히 있을까?
사기당해 전부 탕진할 수 있어.”
날 생각하는 척 가식을 떨면 내가 믿을 거로 생각하나?
“제 걱정하시는 마음 잘 알지만 제 앞길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사기를 당한다고 해도 작은 엄마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달라.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제가 손을 벌리면 받아주실 거예요?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런 말 하실 필요는 없어요.”
“네 뜻이 그렇다면 좋아. 하지만 그런 큰돈을 당장 구하기가 힘들어. 30억 원이면 어떨까?”
작은 엄마가 아니랄까 바 그새 흥정을 한다.
물론 70억 원이 91년도에는 매우 큰 돈이기는 하다.
난 원하는 자본이 70억 원이면 충분하다.
그 이상을 원하고 싶어도 내가 할아버지 자식이 아니고 손자라 유산 상속을 받더라도 많이 받지 못한다.
작은아버지도 있고 고모도 있어서 법적으로 따져도 난 후 순위가 된다.
할아버지가 날 특별히 생각해 더 챙겨주면 모르겠지만 오늘 할아버지 반응을 보면 조금 챙겨주는 선일 것 같았다.
그걸 잘 아는 작은 엄마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면 들어줄 것 같지 않고 싸우기 싫어서 70억을 제안한 거다.
좀 더 더 받겠다고 스트레스받기 싫어 적당한 합의점을 제안한 건데 누굴 호구로 아나? 반이나 깎으려고 해? 여기가 시장통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70억 원이 아니면 제안은 없던 거로 할거예요.
지금 당장 달라는 것도 아니고 유학 가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그때까지 준비하면 될 거예요.
그리고 70억 원은 원화가 아닌 달러로 제가 유학 가는 곳으로 보내주셨으면 해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만약 제안을 받아들이면 상속 포기 각서 쓸 거야? 변호사 공증까지 받아야 해.”
의심은 되게도 많네. 내가 약속 안 지키는 작은 엄마와 같은 사람인 줄 아나?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딱 그 짝이었다.
“그럴게요.”
“네가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유학 비용으로 70억 원이나 되는 큰돈을 외국으로 송금할 수가 없어.
법에 걸려.”
“저도 알아요. 외국환 거래법에 따라 금액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요.
하지만 진성 무역을 통하면 외국에 있는 달러를 보낼 수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보내주셨으면 해요.”
“이 문제는 생각해 보고 결정할게.”
“그러세요. 저 올라가 볼게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할아버지한테도 이 말 한 거야?”
“아니에요.”
“알았어. 올라가.”
“네.”
진민재가 이 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 전미정은 얼른 남편이 있는 서재로 달려갔다.
“여보!”
노크 없이 불쑥 뛰어들어 온 부인을 보며 진동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채신머리없게 뭐 하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무슨 일인데 그래?”
“나 방금 민재랑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민재가 하는 말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하였다.
“난 민재 제안이 괜찮은 것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
진동훈도 의외라는 듯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 민재가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고?”
“그랬다니까. 나도 그 말 듣고 놀랐어. 애가 하루아침에 변한 것 같아. 주눅 들고 눈치 보던 애가 아니야.
나를 똑바로 보고 자기 할 말 다 하는데 그냥 두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더라.
그동안 감추었던 발톱을 드러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결코, 만만하게 볼 애가 아니야.
지금도 이런데 더 크면 어떨 것 같아? 만약 아버님이 민재의 이런 면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
민재가 능력을 보이기 전에 외국으로 보내는 것이 더 나을 거야.”
“민재가 아버지 집에 갔다면서? 혹시 아버지랑 이야기를 나눈 건가?”
“나도 그게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아니래.
만약 아버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분명 반대하실 테니까 민재가 그런 제안 하지도 않았을 거야.
민재 혼자 생각하고 제안한 거야.”
진동훈은 생각이 복잡하였다.
한편으로는 솔깃하면서도 어린 조카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민재가 새끼 호랑이지만 몇 년이 지나 성인이 되면 산속을 호령하는 커다란 호랑이로 자랄 것은 분명하였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인 죽은 형하고 항상 비교당하면서 자랐으며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형을 따라갈 수가 없어 좌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형의 자식이었고 그걸 증명하듯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지금이야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 자신이 대신 그룹 경영을 맡아서 하고 있지만, 온전히 그룹의 주인은 아직 아니었다.
아버지의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지 그룹 주인의 자리가 바뀔 수 있다.
부인 말대로 감추었던 발톱을 드러내는 것인가?
민재가 형과 달리 그룹 경영에 관심을 보이면 분명 능력을 보일 것이고 자신의 위치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에 민재가 유산 상속 포기를 하고 유학을 간다면 자신이 진성 그룹의 주인이 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버지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면 크게 화를 내실 텐데.”
“우리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민재가 먼저 제안한 거야. 민재가 유학 가면 최소 5년 정도는 걸릴 텐데 아버님이 알 리가 없어.
그렇다고 민재가 말하지는 않을 거야.”
진동훈이 굳은 얼굴로 아무 말이 없자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뭐가 걸리는데? 당신한테도 더 좋은 거 아니야?”
“좋기는 하지. 근데 민재는 미성년자라 각서를 작성하더라도 법적으로 효력이 없기에 나중에 무효를 주장할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