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말씀은 고마우나 전 핀란드로 갔으면 해요. 핀란드로 못가는 건 아니죠?”
“그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핀란드로 유학 가시겠다는 분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제가 자료를 찾아볼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
상담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료를 찾으러 가자 김윤석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핀란드는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냐?”
무식한 놈! 그것도 모르냐?
“북유럽에 있잖아.”
“난 핀란드 처음 들어보는데 왜 그런 나라로 유학 가려고 해? 나 같으면 미국 아니면 일본으로 가겠다.”
“난 핀란드가 좋거든.”
“핀란드가 왜 좋은데?”
대답하기 귀찮은데 마침 상담사가 자료를 들고 왔다.
“찾아보니 핀란드는 자료가 많지 않네요. 헬싱키 대학교하고 알토 대학교밖에 없어요. 어디를 원하시나요?”
이왕이면 핀란드 명문 대학인 헬싱키 대학을 가는 것이 좋겠지.
“헬싱키 대학에 가고 싶어요.”
“핀란드는 영어권 국가가 아니라서 핀란드어를 할 줄 알아야 해요.
만약 핀란드어를 못하면 바로 학부에 입학하지 못하고 헬싱키 대학 부속 어학원에서 1년 동안 핀란드어를 배우고 시험에 통과해야 입학 자격이 생겨요.”
“시험에 통과 못 하면요?”
“다시 어학원에 다니든가 한국으로 오든가 선택해야겠지요.”
“영어 학부는 없나요?”
“자료를 보니까 하나가 있는데 사이언스 학부예요. 사이언스를 전공하시려면 가능해요.”
“어학원에 가도 유학 비자가 나오나요?”
“당연하죠.”
내 목적은 대학을 가려는 것이 아니라 유학 비자를 취득하는 게 목적이다. 그럼 굳이 대학에 입학하기보다는 어학원에 입학하는 것이 더 좋았다.
유학 비자를 받고 은행이랑 증권사 어카운트를 오픈하여 노카아 주식을 매수하면 내 목적은 끝이 난다.
1년 동안 머물면서 어학원을 다니면서 미국 유학 준비를 하면 될 것 같았다.
“어학원 입학은 언제 하나요?”
“핀란드는 9월 학기제라 그 일정에 맞게 진행해야 하기에 어학원은 보통 3월에 시작해요. 1년 수료하고 시험 보고 하려면 준비 기간이 몇 개월이 필요하니까요.”
“알았어요. 이 자료 가져가도 되나요?”
“네. 자료 가지고 가서 부모님과 잘 상의하시고 결정되면 연락 주세요. 혹시 모르니까 미국 대학 쪽 자료도 줄게요.”
“네. 고맙습니다.”
*
오늘은 토요일, 수업 끝나고 학교 앞 분식집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왜 왔어?”
수십 년 만에 보는 할아버지라 나름 반가운 마음도 있기에 특별히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냉랭한 반응을 보자 실망감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도 손자가 왔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잘 왔다.’ 반가운 척이라도 해주면 안 되나? 마치 오지 말아야 할 곳을 온 것처럼 ‘왜 왔어?’가 뭐야?
어린 손자가 받을 상처는 생각하지도 않으시나?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사신 분인데 쉽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나이를 먹으면 어느 정도 유해져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고고한 선비도 아니면서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겠다는 절절한 마음이 엿보였다.
“손자가 할아버지 찾아오면 안 되는 건가요?”
예전에는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는데 말대꾸하는 나를 요놈 봐라! 하는 표정으로 나를 살피었다.
“그 말하기에는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하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 스스로 혼자 할아버지를 찾아온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제가 많은 인생을 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너무 착해도 안 되는 거더라고요. 오히려 사람들이 호구 취급하며 이용하고 무시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는 제 잇속 다 챙기면서 뻔뻔하게 살려고요.”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아무 말 하지 않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하셨다.
‘네 아비가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여기서 아빠가 나와? 아빠는 자기 잇속을 챙기지 못하고 살았었나? 그러고 보니 난 아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아빠가 하지 못한 것을 제가 하면 안 될까요?”
“내가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어.”
96년 1월에 쓰러지고 4월에 돌아가시니 앞으로 5년을 더 사신다.
그걸 안다고 해도 고령이시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운명대로 사시는 거지.
그렇다고 5년 안에 내가 뭘 보여 드릴 수도 없고.
할아버지가 10년만 더 사신다면 자랑스러운 손자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텐데 아쉽네.
“저에게 기회를 주실 수는 없나요?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손자가 될 것이며 아빠에게 기대했던 몫까지 제가 다 할게요.”
“어린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물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하지만 저는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고 능력도 있어요.”
“원하는 게 뭐야?”
“사업 자금을 지원해 주셨으면 해요.”
“사업이 애들 소꿉장난인 줄 알아? 지금은 공부할 때야. 사업은 대학 졸업하고 해도 늦지 않아.”
나 같아도 고3 손자가 사업하겠다고 자금을 달라고 하면 절대 주지 않을 거다. 쉽지 않네.
“내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도 성인이 돼요. 사업이 애들 소꿉장난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전 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저를 믿으신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이번 한 번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믿어주시면 안 될까요?”
“네가 하고자 하는 사업이 뭔데?”
뭔지 물어보는 것을 보면 지원해 줄 마음도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가장 잘하고 자신 있는 것은 소프트 개발이었다.
구골에서 25년간 주로 했던 일이 검색 엔진 개발과 핸드폰 OS 개발이었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소프트 개발도 했으며 소프트 개발에 한해 뭐든지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인터넷이 범용화되지 못해 아무 쓸모가 없었다. 몇 년 후에 인터넷이 일상화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뭐라고 대답하지? 지금 난 노카아 주식을 사기 위해 자본금이 필요한 건데.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아니다. 주식 투자를 한다고 하면 무조건 반대할 거다. 말 꺼내봤자! 손해다.
“컴퓨터 소프트 개발 사업을 할 생각이에요. 앞으로 컴퓨터가 몰라볼 정도로 발전할 거예요.”
“내가 생각해도 앞으로 컴퓨터 사업은 유망할 거다. 하지만 사업이란 유망하다고 아무나 뛰어들 수 있는 게 아니야.
네가 컴퓨터에 대해 뭘 안다고 사업을 하겠다는 거야? 그 분야에 전문가들도 실패하는 게 사업이야.
컴퓨터 사업을 하고 싶으면 먼저 대학을 졸업하고 컴퓨터와 시장 상황을 알아보고 그때 해도 늦지 않아.
조급하면 굴면 될 것도 안 되는 법이야. 먼저 사업할만한 능력을 갖춰.”
컴퓨터 소프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뒤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데 그걸 보여줄 수 없으니 답답하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할아버지! 저한테 주실 유산을 일부라도 미리 주시면 안 되나요?”
“너한테 한 푼도 주지 않을까 봐 걱정돼? 걱정하지 마라. 어련히 네 몫은 챙겨줄 테니까.”
내 몫을 주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전에도 내 몫을 챙겼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난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유산으로 받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할아버지 장례도 참석하지 못했고 나중에서야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미국에서 들었다. 결국, 작은 엄마가 내 유산까지 다 가져갔다는 말이네.
인간이 왜 그럴까? 진짜 추하다 못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나저나 설득 실패다. 계속한다고 내 말을 들어줄 할아버지가 아니다. 이럴 때 아빠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결국은 작은 엄마와 거래를 해야 하나? 어쩌면 그게 더 깔끔하고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 저 대학은 외국으로 갈 생각이에요.”
“알아서 해.”
반대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 순순히 대답해서 순간 당황스러웠다.
나에 대해 무관심해서인가? 아니면 유학 가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인가? 할아버지의 본심을 알고자 살펴보았으나 무표정하여 모르겠다.
“저 한동안 못 볼 텐데 서운하지 않으세요?”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가 욕심 때문에 손자 앞길을 막을 수는 없지. 열심히 해.”
다행이다. 내 앞길을 위해서였다.
“할아버지가 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피식 웃으셨다.
“오래 살면 뭐해?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지.”
할아버지 집에서 나왔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이 넓은 서울에 갈 곳 하나도 없다니? 서글펐다.
독서실을 가야 하나? 공부할 것도 아닌데. 그래도 그나마 편히 있을 만한 곳이 독서실밖에 없었다.
독서실에서 시간 때우다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작은 엄마가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내방으로 올라가는데 나를 불렀다.
“민재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어?”
웬일이지? 나하고 말하기를 싫어하시는 데. 설마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네.”
소파에 가서 앉자 보던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공부는 잘 돼?”
진짜 오늘 왜 그러지? 뭘 잘못 드셨나? 갑자기 다정스럽게 구니까 뭔 말을 할지 불안하였다.
“그저 그래요.”
“그저 그러면 어떻게? 열심히 해야지. 학력고사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 걱정하기보다는 자기 자식 걱정부터 해야지.
나랑 동갑인 진동민은 성적이 안 되어 과외까지 시키는데도 성적이 오르고 있지 않았다.
현재 성적으로는 서울에 있는 대학 가기도 힘들었다.
“열심히 할게요.”
“그래. 너 오늘 할아버지 댁에 갔다면서?”
그 이유였어? 어떻게 알았을까?
할아버지가 말하지는 않았을 테고 결국은 할아버지 댁에서 일하는 아줌마도 작은 엄마의 스파이라는 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