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사람이 어떻게 과거로 그것도 미래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과거 모습 그대로 돌아올 수가 있는 걸까?
도저히 믿기지 않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학교 앞에 도착하자 낯익은 분식집이 눈에 들어왔다. 분식집도 반가웠다.
작은아버지 식구와 함께 식사하는 것이 숨 막힐 정도로 싫어 아침 식사는 집에서 하지 않고 여기 분식집에서 항상 토스트와 두유를 사 먹었다.
점심은 도시락을 먹고 저녁은 방과 후 독서실에 가서 공부하고 근처 식당에서 해결하였다.
‘여기도 진짜 몇십 년 만에 오는 거네.’
떨리고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분식집 주인아줌마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민재 학생 왔어?”
비록 돈을 받고 음식을 파는 아줌마였지만 유일하게 나에게 따듯한 정을 주었던 분이었다.
날씬한 엄마와 약간 통통한 아줌마와는 이미지가 전혀 다르지만 어쩌면 엄마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것을 아줌마에게서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오랜만에 뵈니 무척 반갑네요.”
아줌마가 싱겁다는 듯 피식 웃었다.
“주말에 안 봤다고 오랜만이야?”
“시간은 상대적인 거예요. 누구에게는 하루일지라도 누구에게는 수십 년 시간일 수도 있어요.”
“요즘 연애해?”
“네? 고3이 무슨 연애예요? 학력고사도 코앞인데요.”
“그런 마음은 보통 연애할 때 가지는 마음이잖아.”
“아니에요. 토스트 주세요.”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맛있게 해줄게.”
“네.”
토스트를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6년 후에 다가올 IMF의 거친 파도를 진성 그룹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IMF로 인해 제일 먼저 진성 건설이 부도를 맞았고 그룹 경영이 어려워지자 7개의 계열사 중 5곳을 매각하였다.
그나마 알짜 기업인 리조트 사업만은 2004년까지 어렵게 끌고 갔지만 결국 부도가 나 매각 절차를 겪게 되어 할아버지가 일궈낸 진성 그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나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또한,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작은아버지와 작은 엄마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할까? 가장 통쾌한 복수가 무엇일까?
그들이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을 빼앗는 것이 가장 큰 복수 같았다.
진성 그룹을 내가 가지게 되면 통쾌한 복수를 함과 동시에 할아버지가 일궈낸 진성 그룹이 망하는 것을 막게 된다.
난 지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19살의 고3이었다.
복수하려면 그만큼 자본이 많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가진 소프트웨어 기술로 돈을 벌까? 아직은 시기상조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학교 안 가?”
아줌마의 말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시계를 보았다. 8시 20분이었다.
“아직 안 늦었어요.”
“항상 일찍 가서 공부했잖아?”
그때는 그랬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공부였고 공부가 제일 쉬웠다.
그래서 난 국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항상 전교 1등을 하였고 서울대 컴퓨터 공학과에 수석 입학하는 영광도 누렸다.
고1 때 이과, 문과를 놓고 진로를 고민할 때 작은 엄마가 앞으로는 이과가 유망하다는 달콤한 말로 이과를 선택하게 하였다.
그때는 나를 위한 것인 줄 알았는데 내가 어렸을 때부터 전교 1등만 하자 나에게 위기감을 느꼈는지 문과로 가 내가 경영학을 전공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황당했던지.
하지만 이제는 문과든 이과든 공부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이 쉴 때도 있어야죠. 어떻게 공부만 해요?”
평소와 다른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아줌마였다.
“무슨 일 있어?”
있지. 아주 큰 일이. 미래에서 과거로 왔으니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을까?
“없어요. 저 갈게요.”
수십 년 만에 온 학교이지만 반 아이들을 보니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다들 앳된 얼굴들이네. 반가워 교실 문 앞에서 잠시 반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안 들어가고 뭐 해?”
고개를 돌리니 김윤석이 뭐 하고 있냐는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놈도 얼마 만에 보는 거냐? 한때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했던 놈인데 뒤통수를 아주 세게 맞았다.
이 당시 난 공부만 죽어라 했기에 친구가 없었는데 이놈은 그런 나에게 살갑게 굴면 내 곁에서 맴돌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이놈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속에 있는 말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놈이 작은 엄마의 스파이인 줄 누가 알았겠나?
내가 하는 행동, 하는 말 모든 것이 작은 엄마 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놈이었다.
얼마를 받았을까? 고등학생이라 큰돈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고등학생 신분으로는 큰돈이겠지.
날 배신하고 스파이 짓 한 대가로 고등학교 졸업하고 진성 그룹 계열사에 취직했지만 망하면서 실업자가 되었다는 훈훈한 결말을 듣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다 자업자득이지.
이제는 이놈이 작은 엄마의 스파이라는 것을 아니 역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들어갈 거야.”
신기하게도 내 자리도 기억이 났다.
“이번 주 금요일에 전국 모의고사가 있는 거 다 알지?
며칠 안 남았지만 3학년 올라와서 처음 보는 모의고사인 만큼 준비를 철저히 해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조회하는 담임을 보며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담임도 작은 엄마의 스파이였다. 돈을 얼마나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제자를 팔아먹고 싶었을까?
난 이 당시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현실 도피하기 위해 공부만 죽어라 했기에 담임이 가라는 컴퓨터 공학과에 지원했다.
그러고 보면 난 공부는 잘했지만, 세상 물정도 전혀 모르고 꿈도 희망도 없는 참 한심한 놈이었다.
아마 김윤석이나 담임 이 둘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으면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매국 놈이 되었을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 둘이지만 내가 모르는 스파이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엄마는 그렇게 나를 견제해야만 했을까? 내가 그런 존재였던 건가? 의문이 들었다.
작은 엄마의 자식들은 나보다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다. 내가 워낙 뛰어나니 비교가 되어서 자격지심에 그런 건가?
작은아버지가 결혼을 조금 일찍 하여 내 위로 4살 형인 진석구, 2살 누나인 진희영이 있고 나와 동갑인 진동민, 4살 어린 진서영이 있었다.
막내인 서영이 빼고는 하나같이 재수가 없어 보기도 상대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서영이를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다.
작은 엄마나 작은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은 돌연변이였다. 착해가지 고서 오빠, 언니에게 휘둘리기나 하고 서영이만은 잘해줘야지.
과거에는 남자 하나 잘못 만나서 고생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좋은 남자 소개해 줄 테니까 행복해야 한다.
“같이 가.”
어떻게 수업이 끝났는지도 모르게 수업이 끝나 독서실로 가는데 김윤석이 친한 척 다가왔다.
평상시였다면 반갑게 맞아 주겠지만 스파이인 걸 아는 지금은 나오는 말이 곱지는 않았다.
“넌 왜 날 쫓아다니는 건데? 독서실에 가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잖아?”
“바늘 가는 데 실도 따라가야지.”
능청스럽게 말하는 놈을 보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돈 보고 온다고 입은 삐뚤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실이 뒤통수치면 바느질을 어떻게 하라고?
“너 나한테 찔리는 거 없냐?”
자기도 양심에 찔리는지 바로 대답하지 못하다가 겁먹은 개가 더 요란하게 소리치는 것처럼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딱 그 짝이다.
“내가 뭘? 그런 말 하면 내가 서운하지. 난 너의 베스트 친구 아니냐?”
이용하려면 적당히 해야지.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는데 참자.
“그렇지. 나의 둘도 없는 베스트 친구이지. 그래 가자.”
그새 얼굴이 활짝 폈다. 단순한 놈 같으니라고. 이런 놈에게 뒤통수를 맞는 나는 더 한심한 놈이었네.
독서실에 앉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학교에서도 수업 내내 생각해 보았지만, 답이 보이지 않았다.
6년 후에 다가올 IMF와 IT 버블, 이 시대의 정보를 이용한다면 큰돈을 벌 수 있지만, 문제는 내가 거지라는 건데.
돈을 벌려면 일단 자본금이 있어야 하는데 돈 나올 구멍이 전혀 없었다.
아직 고등학생 신분이라 내 몫을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고 요구한다고 해도 줄 작은 엄마도 아니었다.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건 할아버지뿐인데 문제는 할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룹 경영에는 손을 떼고 집에서 요양 중이라는 것이다.
또한, 아빠로 인해 나에 대한 감정도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도 문제였다. 첩첩산중이네.
그렇다고 지금 돈을 벌 수도 없고.
자본금을 어떻게 마련하지?
자본금만 있다면 수백 배 수천 배로 불릴 수 있는데 답답하였다.
옆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김윤석이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놈은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놈이라 대학은 이미 포기했기에 독서실에 와서는 주로 만화책 아니면 무협지를 읽으면 시간을 때웠다.
예전에는 독서실까지 같이 와주어 진짜 고맙다고 생각했었는데.
답답하여 바람이나 쐬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