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음악회 (7)
(197)
이영남이 선곡한 악보를 나누어주었다.
너무 길게 연주를 갖게 되면 나이 많은 부모님들은 피곤해 하시니까 12곡 정도만 한다고 하였다.
“가족음악회 하는 날이 크리스마스 날이니까 제일 처음곡과 마지막 곡은 크리스마스 케롤로 합니다. 두 곡이 이모님들이 좋아하실 한국가요고 나머지 8곡은 재즈음악입니다.”
“한국 가요는 원래 한곡만 하기로 하지 않았나?”
“어머님 마음 집어넣었어요. 양주동 작사 이흥렬 곡으로요.”
아마 이 곡은 이영진 상무가 넣자고 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
이영진 상무의 어머님인 사모님을 위해서 준비한 것 같았다.
재즈는 사카모토 씨의 스승인 에디 히긴스의 노래가 들어가 있고 존 레넌이나 호레이스 실버, 베니 굿맨, 더 홀리스, 밥 딜런, 쳇 베이커의 음악이 들어가 있었다. 모두 부모님 세대가 좋아하는 곡들이다.
이 곡들은 아마 이영남과 사카모토가 상의한 것 같았다.
제일 처음에 시작할 크리스마스 케롤인 고요한밤 거룩한 밤은 이영진 상무가 피아노를 치고 남자 셋이 노래를 부르기로 하였다.
처음엔 사카모토가 피아노를 치고 이영진 상무 양 옆에 이영남과 강시혁이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이영진 상무가 망설였다. 강시혁도 가족도 아니면서 이영진 상무 옆에 바싹 붙어서 노래를 한다는 것이 아무리 봐도 어색할 것 같았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괜히 회장님과 사모님의 오해를 살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영진 상무가 피아노를 치고 남자 셋이 노래를 부르기로 한 것이다.
사카모토가 이영진 상무에게 피아노를 쳐보라고 하였다.
이영진 상무의 피아노 치는 솜씨를 보고 사카모토가 박수를 쳤다.
“오, 프로급이네요. 재주를 숨기고 계셨군요. 히메사마의 다른 면을 또 보게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 케롤송인 징글벨은 피날레를 장식하는 곡이므로 모두 함께 부르는 것으로 하였다.
리허설에 들어갔다.
피아노는 주로 사카모토가 쳤지만 음악에 따라서는 이영진 상무가 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카모토는 이영진 상무를 칭찬했다. 호들갑을 떨면서 칭찬했다.
사카모토도 이영진 상무의 신분을 알아서 그런지 아부하는 모습이 뚜렷했다.
재벌의 딸에게 잘 보여야지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듯 했다.
확실히 연주는 다 잘했다.
사카모토야 직업이 연주자니까 말할 것도 없고 이영남도 음악대학의 정규코스를 밟은 사람이라 잘했다. 또 춤도 잘 추었다. 웬만한 클럽의 밴드들보다 실력들이 훨씬 나았다.
이영진 상무도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친 사람이라 거의 프로급이었다. 문제는 강시혁이었다. 강시혁은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야자 수업 듣느라고 정신없었고 대학다닐 때는 알바 하느라고 정신없었고 졸업 후 아영테크라는 중소기업 다닐 때도 음악을 접하는 일이 드물었다.
아영테크는 정말 좃소기업이라 공장 시설이 낙후되어 있었고 음악회 같은데 가는 사람도 없었다. 여직원들도 카페에 가서 노닥거리기만 하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대리운전 할 때는 남의 차라 함부로 음악을 틀수도 없었다.
그래도 반주만하고 어깨춤만 추니 그런대로 따라갈 만은 하였다.
이영남이 가져온 악보의 곡을 모두 한 번씩 다 쳐보았다. 시간이 꽤나 걸렸다. 금방 1시간이 훌쩍 넘었다.
땀도 나고 목이 컬컬하여 강시혁이 잽싸게 음료수를 쟁반에 받쳐서 가져왔다. 이 모습을 보고 사카모토가 말했다.
“쟁반 들고 오는 폼이 가다(型)가 딱 잡혔는데요? 일류호텔 종업원보다 자세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나처럼 나비넥타이를 한다면 더 어울리겠습니다. 하하.”
이 소리를 듣고 이영진 상무가 말했다.
“25일 가족음악회 하는 날은 우리 모두 흰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매면 어떨까요? 사카모토 선생님처럼요.”
사카모토가 박수를 쳤다.
“굿 아이디어! 역시 히메사마의 안목은 높습니다. 통일의 미를 보여주는 것도 좋습니다. 저는 대찬성입니다.”
이영남도 박수를 쳤다. 강시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승낙하고 말했다.
이영남이 나비넥타이는 자기가 준비할 테니 흰 와이셔츠는 알아서 각자 준비해 달라고 했다. 이영진 상무는 여자니까 흰 와이셔츠 대신에 흰 블라우스를 입기로 했다.
두 번째 리허설을 할 땐 좀 더 부드러웠다.
경쾌한 음악이 나올 때 강시혁이 반주하면서 어깨춤을 추었다. 이영진 상무도 피아노를 치면서 음악에 맞추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음향장비가 좋아서 그런지 음악소리는 크고 웅장했다. 멋있게 퍼져나갔다.
“쿵짝! 쿵짝!”
이영진 상무가 고개를 들다가 자기를 바라보는 강시혁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둘은 서로 어깨 율동을 지속하며 마주보고 웃었다.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의 웃는 모습을 보고 또 가슴이 심쿵 했다. 이런 모습은 심은혜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이영진 상무 역시 홍 사장하고 살 때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강시혁과 이영진 상무는 밤새도록 이렇게 어깨춤을 추고 싶었다. 한참 연주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또 웃었다.
쳇 베이커의 마이 아이디얼을 사카모토가 트럼펫 연주할 때는 정말 잘 불었다. 하도 잘 불어 다른 사람들은 연주를 멈추기도 했다. 마지막에 부를 캐롤송 징글벨은 네 사람이 합창을 했다. 각자의 악기를 연주하며 불렀다.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
종이 울려서 장단 맞추니
흥겨워서 소리 높여 노래 부른다.“
이 노래를 부르니 정말 기분도 상쾌하고 흥도 나는 것 같았다.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저녁때가 되었다.
사카모토는 야간 연주를 위해 자리에 일어나야했고 이영진 상무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연습을 하겠다고 하였다. 이영남은 더 남아서 연습을 하겠다고 하였다.
이영진 상무가 말했다.
“가족음악회 날엔 와인과 과일과 안주는 이모님들이 준비할겁니다. 강 대리님은 처음 서빙할 때만 도와주시고 이후는 기타 반주만 해주시면 됩니다.“
“넵, 알겠습니다.”
“영남이가 여기서 더 연습을 한다고 하니까 제가 집에 가는 건 강 대리님 차로 가겠습니다.”
“넵,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강시혁은 사카모토 씨에게도 해밀톤 호텔 앞까지 차를 태워주겠다고 했다.
벤츠의 뒷좌석엔 이영진 상무가 탔고 앞자리 조수석엔 사카모토 씨가 탔다.
사카모토가 뒤를 돌아다보며 손을 비비며 말했다.
“히메사마께서는 학부 때 음악대학을 다니셨나요?“
“아닙니다. 경영학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음악회 하는 날 부모님들이 좋아하실 겁니다.”
“사카모토 선생님이 리드를 잘해서 성공적인 음악회가 될 것 같습니다.”
강시혁은 해밀톤 호텔 앞에서 사카모토 씨를 먼저 내려주었다.
운전을 하고 가면서 강시혁이 룸미러를 쳐다보며 말했다.
“음악을 잘 못하는 제가 끼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강 대리님이 끼어서 무대가 풍성해졌습니다. 강 대리님을 빼고 세 사람이 연주했다면 초라해 보였을 겁니다. 반주도 잘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오늘 한 것처럼 하면 되겠습니까?”
“네, 이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차가 이영진 상무 집 앞에 도착했다.
강시혁이 차를 세우고 얼른 내려 뒷문을 열어주었다.
이영진 상무가 차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우리 둘이 있을 때는 문 안 열어주셔도 되요. 제가 그냥 혼자 내릴게요.”
“아닙니다. 열어드려야지요. 상무님은 제 상사이기 이전에...... 히메사마니까요.”
이 말에 이영진 상무가 주먹을 쥐고 웃으면서 강시혁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강시혁도 미소를 지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강시혁이 허리 굽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이영진 사무가 대문을 들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강시혁도 자기 오른손을 들어 흔들어주었다.
일요일이 지나고 한 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후 이영남은 리허설 핑계로 자주 영빈관엘 왔다. 영빈관은 날마다 쿵짝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이영남의 드럼 소리와 강시혁의 기타에서 나는 소리였다.
문을 열어놓고 쿵짝 소리를 낸다면 그래도 이웃에서 소리가 들릴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겨울이라 이중창문을 닫아놓은 상태였다. 또 이곳은 대지가 넓은 집들이라 집과 집 사이가 넓어 민원 소지는 없었다. 옆 건물도 중동 어느 국가의 대사관이었다.
강시혁은 음악회 날 망신당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반주 연습을 했고 이영남은 자기 스트레스를 풀려고 열심히 드럼을 두드렸다.
“형! 리본 사왔는데 한번 매봐.”
“음악회 하는 날 매지.”
“싫어. 한번 매봐.”
[이 녀석 참 되게 귀찮게 하네.]
이 날은 이영남도 흰 와이셔츠에 리본을 맺다.
강시혁이 흰 와이셔츠에 리본을 매고나오자 이영남은 강시혁을 쳐다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영남이 미소 띤 얼굴로 강시혁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새삼스럽게 뭔 사진을 찍자고 그러나?]
그래서 강시혁은 드럼 앞에서 이영남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영남이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는 순간 이영남이 강시혁의 팔짱을 끼었다. 이영남은 운동 살이 안 붙어서 그런지 살이 물렁했다. 항상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사람이라 짙은 향수 냄새도 났다.
“리틀 브라운! 리틀 브라운은 운동을 좀 해야겠네. 살이 너무 물렁해.”
“형이나 많이 해. 싫어.”
“남자가 운동 살이 좀 있어야지. 이 형은 바벨운동하면서 근육관리 때문에 닭 가슴살도 자주 먹거든? 닭 가슴살도 먹고 한번 바벨운동 해볼래?”
“싫어. 형 알통이나 한번 보여 줘봐.”
강시혁이 팔을 굽혀 힘을 주었다.
힘줄이 불거져 나오며 알통이 튀어나오기 시작하자 이영남이 신음소리를 내며 만지려고 하였다. 그래서 강시혁은 얼른 팔을 폈다.
“리틀 브라운! 드럼도 좋지만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바벨운동 해봐. 내가 아령을 사다놓은 것이 있으니 아령운동도 좋아.”
“형! 나 오늘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갈게.“
강시혁은 이영남이 운동을 참 싫어하는 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영남은 강시혁처럼 체격이 큰 사람도 아니라서 운동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안하니 걱정이 되었다.
강시혁은 갑자기 교바시 보디가드의 이이다 유키 사장이 생각났다.
그 사람도 체격은 이영남 정도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얼마나 운동을 많이 했는지 가슴이 딱 벌어지고 팔뚝 굵기가 다리통 만 했다.
그러니 이이다 사장은 경시청 경시까지 올라가고 강도를 많이 잡아 일본 정부의 표창장도 많이 받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늙은 나이에도 은퇴 후 일종의 보안 경호회사인 보디가드사를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강시혁은 이이다 유키 사장을 생각하다보니까 야쿠자 두목 구미쵸가 한국을 방문한다는 생각이 났다.
“한국 조폭 북극성파 두목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했지?“
인터넷에서 북극성파 두목 결혼식에 대한 기사를 본 것 같아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기사도 있고 북극성파 두목의 얼굴과 신부될 사람의 사진도 나왔다. 신부는 고개를 숙여 얼굴이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미인으로 보였다.
[지난 여름에 출소한 북극성파 두목 이강한이 오는 12월 22일 XX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경찰은 이날 전국의 조폭들이 몰려올 것을 예상해 결혼식장 주변에 경찰인력을 배치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예정이다.
한편 신부는 이강한 씨와 20년 연하로 미모를 겸비한 학원 강사로 알려졌다. 이강한 씨는 결혼 후 새로운 사업을 할 것이며 다시는 조폭세계에 가담하지 않을 것을 밝힌바 있다.]
강시혁은 이강한을 잘 모른다. 한 번도 만난 사실도 없다. 그런 사람의 결혼식에 간다는 것이 좀 이상했다. 그리고 결혼식장에 가서 축의금을 내고 방명록에 서명을 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식장엔 들어가지 않고 좀 늦게 피로연장에나 가기로 마음먹었다.
구미쵸가 온다면 그도 한국의 원로 조폭들을 만나기 위해 피로연장에서 식사를 할 것으로 보았다.
강시혁이 달력을 보았다.
“결혼식이 내일이네? 그러면 모래 금요일이 일신홀 삼방그룹 임원초청 음악회인가? 그리고 25일 일요일은 영빈관 음악회고. 이번 주는 스케줄이 꽉 찼네.”
다음날 강시혁은 머리도 깎고 검은 양복에 선그라스를 꼈다. 이영남이 물었다.
“형, 오늘 어디 가?”
“응.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누구 결혼식인데?”
강시혁은 조폭두목 결혼식에 간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제대로 말하면 이영남이 이상하게 자기를 쳐다볼 것 같았다.
“고등학교 동창이 결혼해. 동창인데 안 가볼 수 있나?”
“그럼 그 사람도 대전출신이겠네.”
“응? 그, 그래.”
“그렇게 깍두기 머리 깎고 양복에 선그라스 끼니까 멋있는데? 완전 조폭 두목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조폭 만나러간다. 이놈아!]
강시혁은 벤츠를 끌고 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하철을 타고가기로 했다. 벤츠를 그런데 가서 노출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