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녀의 두 번째 남편-195화 (195/199)

195화 음악회 (5)

(195)

강시혁은 예약 손님이라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방은 의자에 앉는 것이 아니고 바닥에 앉는 것이라 걱정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탁자 밑으로 구멍이 파져 있어 발을 뻗게 되어있었다.

방안에 인테리어 소품이 있었는데 옛날 물건들이었다. 진짜인지 이미테이션인지는 몰라도 모두 그럴 듯 했다.

벽에 붙은 수묵화도 동양의 정취를 느끼게 해 놓았다. 절구통이나 항아리, 뒤주 같은 것도 있었다.

주위를 돌아본 이이다 유키 사장과 사카모토 씨는 아주 만족해 했다.

특히 사카모토 씨가 더 좋아했다.

“저는 한국에 온 후로 이런 집은 처음이군요. 아주 분위기 있는 집입니다. 강 대리께서 좋은 데를 안내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는 음악가답게 눈을 감고 가야금 소리도 경청을 했다.

그런데 가야금은 계속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정해놓고 연주하는 것 같았다.

강시혁이 음식을 주문했다.

이 집도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최고 진미밥상을 주문했다. 왕갈비와 신선로, 문어숙회와 오색찬 같은 것이 나왔다.

이이다 유키 사장이 벙글거리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먹는 게 진짜지. 어제 주최 측의 회식은 분위기가 빵점이었어.”

술은 좀 비싼 이강주라도 시킬까 했는데 이이다 유키 사장이 반대했다. 건너편에 앉은 사람들이 마시는 술을 마시자고 했다. 그들이 마시고 있는 것은 작은 항아리에 담긴 동동주였다.

신선로가 끓고 동동주가 돌아갔다. 가야금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술을 마셨다.

강시혁은 차를 가져왔기 때문에 망설였다.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반잔만 마셨다. 그런데 안주가 좋고 가야금 소리도 좋아 갑자기 선비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앞에 있는 잔을 홀딱 비웠다.

이이다 유키 사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시혁을 쳐다보았다.

“차를 가지고 왔으면서 그렇게 술을 마셔도 되나?”

“대리 운전기사를 부르겠습니다.”

강시혁은 진짜 오늘 같은 날은 운전이고 뭐고 팽개치고 마시고 싶었다. 대리를 부르기로 하였다.

대리기사가 이제 출세하여 대리기사를 부르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이다 유키 사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도 운덴 다이고(운전 대행) 사업이 잘되는 것 같군. 그렇다면 한잔 더 해요.”

그러면서 이이다 유키 사장이 강시혁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래서 셋이 간빠이를 외치며 마셨다.

강시혁이 이이다 유키 사장이나 사카모토 씨와 말을 할 때 영어로 이야기하니까 종업원이 서비스를 더 잘해주는 것 같았다.

이이다 유키 사장이 강시혁의 손을 쳐다보며 말했다.

“손가락 괜찮아요?”

“예,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강시혁이 손가락을 보여주면서 접었다 폈다 동작을 해보았다.

“기능은 괜찮은데 흉터는 좀 남은 것 같군.”

“뭐, 자세히 보지 않은 다음에야 잘 모릅니다.”

“기시모토 다카시 군을 지금도 원망해요?”

“예? 기시모토 다카시가 누구죠?“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의 구미쵸(組長: 두목)를 잊으셨나?”

“아, 그 사람요?”

강시혁은 야쿠자 두목인 구미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의식을 잃고 야쿠자들에게 잡혀갔을 때 본 구미쵸의 얼굴이었다. 그때 그는 회복(和服)을 입고 전통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주름이 많고 콧수염이 났지만 눈빛이 날카로웠던 사람이었다.

강시혁은 그의 명령으로 손가락이 잘리는 수모를 당했다.

그때 구미초가 한 말도 생생히 기억이 났다.

‘저놈의 용기와 오도꼬(남자) 기질을 높이 사주겠다. 풀어는 주겠다. 하지만 우리의 사업을 방해하고 조직원들에게 많은 부상을 입혔다. 우리의 룰대로 선물은 하나 주고 풀어주겠다. 기무라! 손가락 하나를 자르는 단지(斷指) 절차의식을 하겠다. 단도를 가져와라!’

강시혁은 이 말을 기억해 내고 쓴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일 뿐이었다.

이이다 유키 사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때 강시혁 씨도 오사카 병원에서 고생이 많았지. 구미쵸의 본명이 기시모토 다카시지. 지금도 많이 원망하고 있겠구먼.”

“원망 안합니다. 다 지난 일이고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조직의 룰을 따랐겠지요.”

“역시 자네는 남자야. 구미쵸도 자네를 주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칭찬을 했지.”

“정말로 그랬습니까?”

“정말로 그랬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삼방그룹도 자네를 끝까지 신임할 것이네. 자, 그런 의미에서 한잔 더 합시다.”

사카모토 씨는 눈을 반짝이며 이이다 유키 사장과 강시혁의 대화를 흥미 있게 듣고 있었다.

그동안 밤무대 활동을 하면서 야쿠자들에게 많은 시달림을 받아온 사람이라 그런 것 같았다.

이이다 유키 사장이 말했다.

“그 야마구치구미의 구미쵸가 다음 주에 한국엘 오네.“

“예? 그 사람이요?”

“자네 한국의 조폭 조직인 북극성파를 들어보았나?”

“전에 매스컴 보도로 들어본 것도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조태춘 파와 함께 최대 조직이지. 거기 오야붕이 교도소에 있다가 작년에 나왔는데 이번에 결혼을 하지. 그래서 구미쵸가 한국엘 오네. 하객으로 참석을 하는 거지.“

“그래요?”

“북극성파의 두목은 나이가 50세가 넘었지만 신부는 20세 아래인 학원 강사하고 결혼을 한다는군.”

“아, 그건 인터넷 뉴스 판에서 본 것 같습니다.“

“그날엔 한국의 조폭들이 모두 모이므로 경찰도 많이 깔리겠지. 난 이번에 일본 야쿠자들도 많이 온다는 것을 어제 경찰 간부를 만나서 이야기 해주었네. 실은 심포지움도 참석을 안 하려다가 그것 때문에 왔지.”

“그랬군요.“

“한국 경찰도 정보를 입수하고 경비 병력을 배치할 테니까 큰 불상사는 없겠지.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까 주의는 해야겠지.”

“경찰이 사전에 알고 깔린다면 큰일은 없겠죠. 아무리 막강한 조폭들이라고 해도 공권력에 대항하는 어리석은 짓은 안하겠죠.“

“구미쵸를 한번 만나보게. 가서 인사라도 한다면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도 될 테니까.”

“글쎄요. 정말 만나보고 싶네요. 저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입니다.”

“구미쵸는 자네의 손가락을 잘랐지만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네.‘

“다행이군요. 그런데 참, 홍 사장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홍 사장? 궁금한가?”

“삼방전기와 장명건설에 가압류를 걸어 한때 삼방의 주가가 폭락을 했었습니다.”

“이혼을 했으면 깨끗이 물러가야지 지저분한 사람임에는 틀림없구먼.”

“그런 것 같습니다.”

“홍 사장은 지금 한국에서 들어온 삼류 연예인과 미나미쿠에서 동거를 하고 있다네. 나도 다이마루 신시이바시 백화점 앞에서 둘이 팔짱을 끼고 가는 것을 봤지.”

“혹시 한국 연예인 K양이 아닙니까? 언젠가 오사카 닛폰바시 병원에서 약물투입으로 검거되었든 사람 말입니다.”

“그것까지는 내가 모르겠네. 혹시 알아봐달라면 알아봐 주지. 하지만 우리도 영업을 해야 하니 정식으로 의뢰서에 서명을 해줘야 하네.”

“하하. 이미 남이 되어버린 사람이라 그렇게 까지는......”

“그러겠지. 이미 헤어진 사람이라 관심 둘 필요가 없겠지.”

사카모토 씨가 말했다.

“홍 사장이 누구입니까?”

“자네 같은 뽕쟁이가 한사람 있네.”

“저는 요즘 뽕 근처에도 안갑니다.”

이이다 유키 사장도 사카모토 씨에게 홍 사장의 신분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 존경하는 히메사마의 전남편이라는 소리를 안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안했다.

강시혁은 이이다 유키 사장에게 홍 사장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봐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자기는 경호원에 불과한 사람이기 때문에 너무 앞서가지 않기로 했다.

동동주 한 항아리를 모두 비웠다. 모두 오늘은 술이 잘 받는지 잘도 마셨다.

이이다 유키 사장이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아주 잘 먹었소. 이제 취했으니 갑시다.”

강시혁 씨가 사카모토 씨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 늦게라도 클럽에 가셔서 연주한다는데 괜찮겠습니까? 사카모토 씨도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아니, 괜찮아요. 나는 취해야 연주가 더 잘됩니다.”

강시혁이 대리기사를 불렀다.

잠시 후 대리기사의 전화가 왔다.

“대리기사입니다. 이 근방에 와 있는데요. 5분 안에 가겠습니다.”

강시혁은 이 소리를 듣고 옛날 자기 생각이 났다.

헉헉대고 대리기사를 부른 장소로 뛰어가던 생각이 났다.

잠시 후 대리기사가 왔다. 강시혁보다 나이가 많은 40대로 보였다.

강시혁이 차 키를 주면서 말했다.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 들렀다가 이태원으로 가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사장님!”

대리기사가 차를 보고 말했다.

“오, 벤츠 S클라스군요. 차 좋습니다.”

마포에서 여의도로 가는 차안에서 이이다 유키 사장이 말했다.

“오늘 분위기 좋은데서 아주 잘 마셨소.”

“더 좋은 데로 모셨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요. 좋은 식당이었소. 이렇게 시간을 내어 날 찾아주니 고맙소. 히메사마에게도 안부 전해줘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내일은 내가 귀국을 하니 배웅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초청 단체에서 차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럼 여기서 인사를 드려야 하겠군요.”

강시혁은 콘래드 호텔 앞에서 자기도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이이다 유키 사장에게 정중히 작별인사를 해주었다.

차는 다시 이태원으로 향했다.

사카모토 씨를 보니 입을 벌리고 신나게 자고 있었다. 털투성이가 입만 벌리고 자고 있으니까 꼭 벌어진 밤송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늦도록 연주를 하려면 지금 차안에서 잠을 자는 것이 좋으리라고 보았다.

차가 이태원 클럽 앞에 도착해서야 사카모토 씨는 잠에서 깨었다.

“어? 여기가 어디야?”

“이태원 클럽 앞입니다. 야간 연주 하셔야죠.”

사카모토가 황급히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오늘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고맙습니다.”

강시혁은 사카모토 씨를 내려주고 영빈관으로 가는 길을 기사에게 알려주었다.

대리기사를 보니 옛날 생각이 나서 물었다.

“많이 힘들죠?”

“아니, 괜찮습니다.”

“대리기사를 한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3년 되었습니다.”

“낮에 다른 일을 하시나요?”

“넵. 원단 나르는 일을 합니다.”

“투잡이면 많이 버시겠네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원단 나르는 일도 그렇게 많이 받지는 못합니다.”

“투잡이니 생활은 되시겠네요.”

대리기사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신용불량이라 지금 신용회복위원회 변제금 갚고 나면 생활이 빠듯합니다. 아들놈이 초등학교 1학년인데 학교 보내기도 빠듯합니다.”

신용회복위원회 소리가 나오자 강시혁은 아픔이 밀려왔다.

자기는 주식으로 운 좋게 벌었기 때문에 빚을 한꺼번에 갚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운이 없다면 투잡을 뛰어도 빚을 갚기가 어렵다.

더구나 이 사람은 아이도 있다니 고달픈 삶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사님! 힘내세요. 살다보면 좋은 날이 있겠죠.“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분은 사장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대리기사는 강시혁이 벤츠나 끌고 다니는 돈 많은 젊은 사장으로 본 것 같았다.

돈 많은 사람들은 대리기사를 우습게 알고 있는데 이 젊은 사장은 상당히 교양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았다.

“이태원은 지금 이 시각이면 대리 잡기가 수월한 지역이니 좋은 손님 잡으세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시각이면 술들이 많이 취해서 어려운 손님도 많습니다. 어제는 마포에서 광명시 가는 손님인데 길을 잘못 들었다고 운전하는 내 뒤통수를 톡톡 때리는 손님도 있었습니다.”

“나쁜 인간이네요.”

강시혁은 자기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기도 대리기사 출신이라 그런 것 같았다.

대리기사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것도 저보다 10년 이상 젊은 사람이 그러니 정말 한 대 받아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린 아들놈 얼굴이 생각나 참았습니다.”

“잘 참으셨습니다. 정말 진상고객을 만나면 힘드시겠습니다.”

차가 영빈관 앞에 도착했다. 대리기사는 영빈관을 보고 말했다.

“이 건물은 어느 나라 대사관입니까?”

이 지역은 대사관이 많은 지역이라 대리기사는 영빈관을 어느 나라의 대사관으로 본 것 같았다.

“대사관은 아니고 회사 사옥입니다.”

“사옥을 빌딩이 아니고 이런 마당있는 건물을 사용하는 회사도 있는 것 같네요.”

강시혁은 대리 비용은 카드로 결재했었다. 하지만 불쌍한 이 기사에게 용돈이라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지갑에서 2만을 꺼내었다.

“집에 갈 때 아들 과자라도 사가지고 가세요.”

“헉! 고, 고맙습니다.”

그러면서 대리기사는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 굽혀 강시혁에게 인사를 하였다.

강시혁은 영빈관로 들어왔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늘 그래왔듯이 영빈관 전체 불을 켜고 한 바퀴 점검을 해보았다. 그리고 이상이 없자 지하실에 있는 관리실로 왔다.

강시혁은 마포의 한정식 집에서 나올 때까지는 기분이 좋았었다.

그렇지만 대리 기사를 만난 후에는 왠지 기분이 찜찜했다. 꼭 자기의 모습 본 것 같아서였다.

강시혁은 냉장고 문을 열고 캔 맥주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단무지 하나를 갖다놓고 혼자 마셨다.

조금 전에 만난 대리기사가 대리 일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는 정말 운 좋게 잘 풀렸지만 방금 만난 대리기사는 답이 없어보였다.

강시혁은 맥주를 마시면서 그 대리기사가 잘 풀려나가기를 마음속으로 빌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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