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싹트는 감정 (5)
(179)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의 굳은 표정을 보았다.
자기가 혹시 뭔가 잘못 말했나 하였다. 하지만 곧 웃는 낯으로 말했다.
“웬걸요. 신종화씨는 애인이 있지 않습니까? 연하의 존잘남 배동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 말에 이영진 상무의 굳은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신종화의 애인 배동수가 이번에 우리가 만든 엔터테인먼트사의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사차 넥타이를 저한테 가져온 것 같습니다. 원래 그런 것 받지 말았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의 표정이 굳어졌던 것이 자기가 뇌물을 받아서 그러나 하였다.
금품을 받은 건 아니지만 넥타이도 뇌물이라면 뇌물이기 때문이었다.
이영진 상무가 차를 타고 가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종화 씨와 배동수 씨는 장래를 약속한 사이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배동수 씨가 한 살 아래의 남자지만 서로 좋아하니 케미가 잘 맞는 것 같습니다. 혼자 있는 제가 가끔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강시혁이 슬쩍 룸미러를 보았다. 이 말에 비로써 이영진 상무가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강시혁은 자기의 주인이며 마음속의 공주님이신 이영진 상무가 긴장하면 자기도 긴장했다. 마음속 공주님이 미소를 지으면 자기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표정이 밝아진 이영진 상무가 말했다.
“오늘 음악회는 지난번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입상을 한 김XX의 연주회입니다.”
“아, 그렇군요.”
강시혁이 뉴스에서 콩쿠르 입상 소식을 한번 본 기억은 있었다.
그렇지만 자기의 관심분야가 아니라 그런 것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였다.
“일신홀은 원래 주말 연주는 잘 안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XX의 출국 때문에 토요일에 하는 것 같습니다.”
“귀한 연주회인 것 같습니다.”
일신홀에 도착하였다.
일신홀의 로비를 보고 강시혁이 감탄했다. 계단이 투명 유리로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와, 건물이 특이하네요.”
“이 건물을 건축한 일신방직 회장님은 미국에서 건축학을 공부하신 분입니다.”
“어쩐지 건물이 특이합니다.”
이영진 상무는 이제 강시혁을 문화재단의 경비반장이 아니라 비서실 직원으로 제대로 대우해주는 것 같았다.
말을 자주 걸어주기 때문이었다.
이영남이 헤헤거리며 왔다.
입장권 네 장을 흔들며 말했다.
“누나! 누나 옆자리는 비워두려고 표를 한 장 더 샀어. 누나는 일반인들이 많이 참석하는 공연장에 가면 꼭 그러잖아.”
“잘했어.“
강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재벌이라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는 것을 싫어하는구나. 그래서 돈이 많으니까 아예 옆자리를 비워두려고 표를 한 장 더 끊었구나.]
그런데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입장객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이태원 같은데 가서 팝음악에 심취해 엉덩이를 흔드는 것은 좋아해도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했다.
또, 여기는 오케스트라 연주회도 아니고 발표회 비슷한 홀이라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젊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나와서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바이올린만 켜고 살아서 그런지 얼굴이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진 듯 했다.
이윽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흘러나오는 곡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였다. 어려서부터 음악 분위기에서 자란 영진, 영남 남매는 열심히 연주를 감상했다. 하지만 뒤에 앉은 강시혁은 졸리기만 하였다.
제 2악장 아다지오가 연주될 때는 정말 졸았다.
꾸벅꾸벅 졸다가도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살을 꼬집기도 하였다.
[재벌의 자녀를 경호하는 게 내 임무인데 졸면 되나?]
강시혁은 언제 박수를 치는지도 잘 몰랐다.
그저 다른 사람이 박수를 치면 따라서 칠 정도였다.
이영진 상무와 이영남을 슬쩍 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연주회가 끝났다.
지루한 연주회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영진 상무는 그 반대였다.
“연주회가 너무 빨리 끝나 아쉽네요.”
“그러네요. 저도 감상을 잘 했는데......”
이 말을 해놓고 강시혁은 낯이 간지럽기는 하였다.
자기는 연주회 내내 졸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은 것 같았다.
이영남은 바로 길만 건너면 나인원 아파트라 걸어서 가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만 태우고 이태원 집으로 향했다.
차가 북한남 삼거리에 이르자 이영진 상무가 말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난 것 같지는 않군요. 남산에 한번 올라가 바람 좀 쏘이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남산으로 모시겠습니다.”
강시혁은 국립극장 쪽에서 남산으로 올라갔다.
남산 위에 올라가니 역시 바람이 많이 불었다. 더구나 지금은 겨울이 되어 바람이 세었다.
강시혁이 말했다.
“바람이 몹시 찹니다. 차라리 전망대로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이 출입을 하는 것을 보니 아직 영업시간인 것 같습니다.”
강시혁은 인서울 대학에 합격하고 원룸을 얻었을 때 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온 적이 있었다.
강시혁이 입학한 학교도 구경하고 원룸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강시혁은 부모님을 모시고 남산 전망대를 구경 왔었다. 5층 전망대 위의 그릴은 너무 비싼 것 같아서 이용하지도 못하고 남산을 내려와 국밥을 사먹었던 기억이 났다.
남산 전망대는 다행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주말이라 밤 11시까지 문을 연다고 하였다.
춥고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손님들은 많지 않았다. 데이트 손님들만 드문드문 있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서울의 야경이 아름답네요.”
강시혁은 체격도 좋았지만 목소리도 좋았다.
“네, 좋군요.”
이영진 상무는 어려서 가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따라 남산을 올라온 적이 있었다.
부모님은 사람 많은데 가기 싫다고 하여 잘 올라오질 않았다. 그래서 창업 회장님이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가끔 올라왔었다.
이영진 상무는 서울 시내를 바라다보며 추억에 잠긴 눈을 하고 있었다.
다른 커플들이 강시혁과 이영진 상무를 쳐다보았다.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성이 서울 시내의 야경 구경을 하고 있으니 더 쳐다보는 것 같았다.
이영진 상무는 강시혁이 자랑스러웠다.
삼방그룹 사무직 직원들에게서 느끼지 못한 야성미를 느끼기도 했고 그의 절도 있는 매너도 좋았다. 그리고 윤곽선이 뚜렷한 얼굴도 좋았다.
이런 남자라면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재벌의 아들이 아니다. 흙수저인 삼방 문화재단의 경비반장 출신이었다.
대학을 나왔지만 스카이대학 출신이거나 외국 유학생 출신도 아니었다. 자기와는 평등하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은 못되었다.
그렇지만 그런 배경이나 스펙을 벗어던져버린다면?
이런 남자가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영진 상무는 마음에 드는 남자들과 알콩달콩한 사랑을 나누어보지도 못했다.
재벌의 딸이라 불순한 의도를 갖고 접근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홍 사장처럼 집안 배경만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뿐이었다.
홍 사장도 실은 마음에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혼인해야 한다고 서둘러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었다.
어른들은 살다보면 정이 든다고 했지만 홍 사장은 살면 살수록 회의감만 들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헤어질 결심을 한 것은 자기에게도 약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영진 상무는 남산 N타워 전망대 차창에 어른거리는 홍 사장의 얼굴을 보았다.
환상인가 하여 눈을 껌벅거리면 없어졌다가 다시 얼굴 그림자가 비추어졌다. 홍 사장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영진아! 이 약 한번 투약해봐. 각성제야. 피로회복에 엄청 좋고 열 배, 스무 배로 결혼생활의 만족을 얻을 수 있어.”
“각성제는 싫어! 오빠는 왜 이런 물건을 들고 다니지?”
“너도 미국에서 학교 다닐 때 마리화나는 많이 피워봤잖아. 미국이라는 나라는 중학생만 되어도 클럽활동이나 파티에서도 많이 하잖아.”
“난 모르겠어.”
“미국에서는 학교 록커에 마리화나를 넣어두었다가 냄새를 맡는 아이들도 많잖아. 시험 때는 많이 하잖아.”
“나는 중, 고등학교를 한국에서 다닌 사람이야. 대학도 서울서 다니고. 그런 문화는 잘 몰라.”
“바보야. 미국에선 12학년만 되어도 절반이 피운다더라. 시험 스트레스를 날리는 길은 이것 밖에 없지.”
“절반이 그렇다면 안 그런 사람도 절반이잖아. 오빠, 부탁이야. 제발 이런 짓 하지 마.”
“너 나에게 그다지 애정도 없지? 연애기간도 없이 결혼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하지만 이 각성제 투약을 하면 없는 애정도 생기고 결혼 생활이 황홀 그 자체일거야.”
“이건 마리화나도 아니고 유명한 각성제인 뽕이 아니야!”
“그러니까 뽕 가게 해준다는 거지. 말 들어! 너는 내 와이프야!”
“유치해!”
“너, 고상한 줄은 알아! 하지만 고상한건 밖에 나가서 하면 돼. 잠자리에선 요부가 되라는 말 못 들었어?”
“그게 오빠 수준이야? 정말 실망했어. 흑흑.”
그러면서 이영진 상무가 방을 뛰어나간 기억이 났다.
이영진 상무는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강시혁이 안보는 틈을 타서 몰래 눈가의 이슬을 손가락으로 찍어냈다.
이영진 상무가 강시혁을 쳐다보았다.
강시혁은 아직도 열심히 서울의 야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영진 상무는 강시혁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늠름한 체격에 잘생긴 얼굴, 그리고 돈은 없어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 건강한 젊은이가 좋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흙수저였다.
이영진 상무가 강시혁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배고프죠?”
“아니, 저는 됐습니다.“
“여기 엔그릴 이라는 레스토랑이 있다고 팜프렛에 나와 있네요. 한번 가볼까요?”
엔그릴은 전망대 위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윗층으로 올라가자 종업원이 말했다.
“아직 문 닫을 시간은 아니지만 새로운 손님을 받기엔 좀 늦은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손님.”
그래서 두 사람은 남산 N타워를 나왔다.
이영진 상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빈관으로 가시죠.”
“알겠습니다. 가다가 상무님을 집에 모셔드리고 가겠습니다.”
“영빈관에 제가 쓰던 피아노는 그대로 있죠?”
“있습니다. 날마다 제가 피아노를 닦아놓고 있습니다. 언젠가 피아노를 치러올 주인을 위해서입니다.”
“어머, 그래요? 그럼 오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이 아닌 피아노 곡을 한번 쳐보고 갈까요?”
“오늘요? 아, 알겠습니다.”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를 차에 태우고 천천히 남산을 내려왔다.
아름다운 여성을 태우고 운전하는데 난폭하게 운전할 수는 없었다.
영빈관에 도착 후 강시혁은 영빈관의 등을 모두 켰다.
그리고 2층에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이영진 상무를 안내했다.
이영진 상무는 피아노를 보더니 반가운 생각이 들은 것 같았다. 자기의 손때가 묻었던 피아노이기 때문이었다.
이영진 상무는 건반 테스트를 해보았다. 그리고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1번 1악장의 매력적 선율이 영빈관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강시혁은 지하실로 내려와 옷을 갈아입고 다시 1층으로 갔다.
지하실에서 대기하는 것 보다는 여기서 대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야 이영진 상무가 부르면 바로 달려가 심부름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시혁은 1층 접견실에 앉아서 책을 보았다.
한참 후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의 곡이 끝이 났다.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가 이제 내려오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영진 상무는 다시 격정적으로 피아노를 쳤다. 강시혁이 알 수 없는 곡이었다.
한참 후 이영진 상무가 내려왔다.
강시혁은 얼른 생수를 갖다 주며 말했다.
“정말 잘 치시는데요?“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강시혁은 클래식에 대하여는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해주었다.
“오래간만에 치니 잘 안되네요. 피아니스트가 와서 들었다면 눈살을 찌푸렸을 거예요.”
그러면서 이영진 상무는 1층 접견실 의자에 앉아 물을 마셨다.
“물밖에 대접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지금 12시가 넘어서 배도 고프실 텐데 말입니다. 여기는 먹다 남은 찬밥과 라면밖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라면요? 우리 라면 먹을 까요?”
“옛? 무슨 말씀을! 상무님 같이 귀한 분이 라면을 드시면 되겠습니까. 댁에 가셔서 일류 요리사인 금산 아줌마가 해주시는 뜨듯한 밥을 드셔야지요.”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어요.”
“정말입니까?”
“저 대학 학교 다닐 때 친구 집에 가서 라면 많이 먹었어요.”
“그,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잠깐 기다리세요.”
강시혁은 즉석에서 라면 두 개를 끓였다.
기왕이면 다른 재료를 넣을까 하다가 그건 그만두었다.
강시혁은 지하실 자기가 먹는 곳으로 안내하지 않았다. 1층 접견실에서 식사를 하도록 했다.
귀하신 분을 지하실로 내려오게 할 수는 없었다.
강시혁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너구리 라면을 이영진 상무가 앉아있는 테이블위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자기는 주방에서 먹기 시작했다.
“호호. 강 대리님은 언제나 따로 식사를 하시려고 하네요. 이리와 같이 드세요.”
“저, 저는 여기서 먹겠습니다.”
“이리와요. 그건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강시혁은 할 수없이 쟁반에 라면그릇을 받쳐 들고 이영진 상무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왔다.
둘이 후루룩대며 라면을 먹었다.
그런데 배고플 때 먹는 라면이라 그런지 유별나게 라면 맛이 오늘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