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사모 펀드사 가동 (1)
(175)
강시혁은 다소 흥분되었다.
방금 이영진 상무가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회장에게 말 했다고 하니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리틀 브라운이 저 때문에 명랑해진 것이 아니라 제가 리틀 브라운 때문에 명랑해진 것 같습니다. 리틀 브라운은 언제나 유쾌한 사람이니까요.”
이 소리를 듣고 이영남은 헤 하며 웃었다.
이영진 상무가 창밖의 한강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지난번에 강 대리님이 장명건설 노사분규를 중단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했었습니다.”
“제 역할보다도 장명건설의 강성 노조가 이제 지질 때도 되어서 그런 것으로 봅니다.”
“강대리님은 항상 겸손하시군요.”
이영남이 말했다.
“누나! 예의 하면 시혁이 형이야. 시혁이 형은 싸움도 잘하지만 예의도 완전히 칼 같아. 깍두기 머리에 선그라스를 끼고 90도 각도로 인사할 때는 완전히 오야붕을 모시는 조폭 같아.”
강시혁이 웃으며 말했다.
“리틀 브라운은 선량한 나를 조폭에 비유하네.”
“누나, 실은 조폭들도 형한텐 꼼짝 못해. 그동안 이태원에서 나를 괴롭히던 양아치 같은 놈들도 형 때문에 내 근처에 오지도 않아.”
강시혁은 이영남의 허풍이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이런 허풍은 자기가 이영진 상무의 보디가드를 오래 하는 데는 플러스 작용을 하리라고 보았다.
이영진 상무가 강시혁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장명건설 노사분규를 단축시키는데 강 대리님이 역할을 많이 했다는 것도 회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 그것도요? 이거 참, 쑥스러워서 어쩌나.”
“그래서 회장님은 강 대리님이 노조관리를 잘할 것으로 보아 장명건설로 발령을 내려고 하셨습니다.”
“예?”
“노무관리를 담당하는 장명건설 총무과장으로 발령을 내시려고 했습니다.”
“예? 뭐라고요?”
강시혁이 놀란 눈으로 이영진 상무를 쳐다보았다.
놀란 것은 강시혁 뿐만이 아니었다. 이영남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장명건설 총무과장으로 가게 되면 월급은 몇 푼 더 받을지는 모르지만 영빈관을 나와야 한다. 그리고 장명건설 회사 근방에 원룸이라도 얻어서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벌려 논 K&B파트너스의 경영도 어려워질지 모른다.
또, 장명건설은 삼방그룹의 계열사도 아니다. 삼방건설에 출자한 자회사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과장이라고 해도 비서실 대리보다 약간의 급여를 더 받는 정도일 것이다.
강시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저는 상무님을 계속 모시고 싶습니다. 제가 장명건설로 가게 되면 상무님을 더 이상 모실 수가 없습니다.”
이영남이 성질을 팍 내었다.
“누나! 이건 말도 안 돼. 잘 있는 형을 왜 다른 데로 보내려고 해? 말도 안 되는 인사야!”
이영진 상무가 입을 막고 호호 웃으며 말했다.
“호호. 그래서 내가 강력히 반대했어. 만약에 강 대리님이 다른 데로 가게 되고 보안회사의 경호요원이 파견 나온다면 나도 싫다고 말했어.”
“누나. 보안회사의 용역 경호요원은 나도 싫어. 전에 파견 나왔던 경호요원을 잊었어? 격투기 선수 출신이라고 목에 힘주고 본사 승용차 기사도 건방지다고 두들겨 팼잖아. 누나를 경호하랬지 누가 회사 직원을 패라고 했나?”
“그 사람은 나도 마음에 안 들었어.”
“또 양아치 같은 자기 후배들을 불러 삼방그룹에 취업시켜준다고 뒷돈도 받고 그랬잖아? 시혁이 형 봐. 언제 취업미끼로 돈을 받고 회사직원을 폭행하고 그랬나?”
“그건 나도 알아.“
“형은 싸움도 잘하지만 예의 있고 인성도 좋잖아. 그리고 영어도 잘하고 또 음악적 감성도 풍부해 우리와 잘 맞잖아. 난 형이 이제는 우리 가족 같은 느낌이 들어.”
“그래. 그래서 아버지도 장명건설 전출을 취소했어. 아버지도 원래 의도는 강 대리님을 좋게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거였어. 하지만 아버지도 강 대리님 만큼 좋은 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취소한 거지.”
“누나! 형은 또 장점이 있잖아? 체격 좋고 얼굴이 미남이잖아!”
이 말에 이영진 상무는 잠시 당황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시혁 역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또 한 번 이영진 상무와 강시혁의 눈이 부딪쳤다.
피아노 음악이 바뀌었다.
이영진 상무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음악에 심취했다.
음악성이 풍부한 이영남도 커피를 마시며 아예 의자를 창 쪽으로 돌려놓고 음악을 들었다.
두 곡 정도가 끝나자 이영진 상무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영남아. 우리 이제 가자. 강 대리님 피곤하시겠다.”
“누나 오늘 잘 먹었어.”
강시혁도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분위기 좋은데서 식사 잘했습니다. 먼저 내려가서 차 시동을 걸겠습니다.”
그러면서 강시혁은 절도 있게 인사를 하며 식당을 먼저 나왔다.
운전대에 잠시 앉아있자 이영진과 이영남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영화배우 출신이었다는 주인여자가 따라 나와 인사를 하는 것이 보였다.
강시혁은 이영남을 나인원 한남 아파트에 먼저 내려주었다. 그리고 북한남 삼거리를 돌아 한강진 역에서 우회전하여 리움 박물관 쪽으로 올라갔다.
뒤에 앉아서 창밖만 내다보던 이영진 상무가 말했다.
“서울 지리도 잘 알고 운전을 참 편하게 하시네요.”
[그럼요. 대리기사를 몇 년이나 했는데요. 방금 다녀온 유엔 빌리지와 이태원에서 참 많은 손님을 모셨습니다. 몇 십만 원을 벌기위해 술 마신 손님의 투정을 모두 받아줬죠.]
“감사합니다.”
“오늘 피곤하시겠어요.”
“아닙니다. 저도 즐거운 시간 보냈습니다.”
“참, 아까 영남이 테 사카모토 쯔요시 씨가 언제 오냐고 물어볼 걸 못했네요.”
“다음 주에 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관광비자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죠?”
“그것까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내일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됐습니다. 알아서들 하겠죠.”
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도착하면 강 대리가 얼른 먼저 내려 뒷문을 열어주었는데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은 채로 강시혁이 말했다. 그러나 그 음성은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상무님!”
“네?”
“저는 오래도록 상무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이제 사무실도 얻어 영남이와 함께 좋은 일을 해보려고 하는데 계열사 전출이 된다면 영남이와 제가 기운이 많이 빠질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도 강 대리님과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어요.”
“고맙습니다. 상무님.”
강시혁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뒷문을 열어 주었다.
이영진 상무가 내리다가 발을 헛디뎠는지 휘청하였다. 아마 오늘 저녁 와인을 제법 마셔서 그런 것 같기도 하였다.
강시혁이 자기도 모르게 얼른 팔을 뻗어 이영진 상무의 팔을 잡아주었다. 이영진 상무의 몸을 처음 잡아보는 순간이었다. 이영진 상무의 살은 참으로 부드러웠다.
강시혁이 얼른 팔을 놓으며 머리 숙여 인사를 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얼떨결에.......”
“괜찮아요. 제가 술을 좀 마신 것 같네요.”
그러면서 이영진 상무가 강시혁을 올려다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이영진 상무가 웃는 모습은 참으로 황홀스러웠다.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를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껴안는 대신 한발 물러나며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안으로 드시죠.”
이영진 상무가 가방에서 손가락만한 리모콘을 꺼내 누르자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강시혁은 출발하지 않고 그대로 독일 병정처럼 서 있었다.
이영진 상무가 철문 안으로 들어가다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자기의 오른손을 들어 흔들어주었다.
강시혁도 역시 오른손을 들어 흔들어주었다.
강시혁은 영빈관에 돌아와 치아만 닦고 바로 침대에 엎어졌다. 피로가 그대로 몰려왔다.
[회장님께 내 이야기를 했다고? 그리고 장명건설 과장으로 발령을 내려고 했다고?]
강시혁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자리를 옮기면 지금 당장은 벌려 논 것이 있어 불리하지만 회장의 의도는 자기를 키워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회장도 이제 이 강시혁이란 이름은 확실히 알겠지?]
이날 밤 강시혁은 꿈을 꾸었다.
꿈에서 자기는 조선시대의 한명회가 되어 있었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압구정 정자에서 예쁜 기녀를 끼고 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녀는 놀랍게도 이영진 상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녀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자 한명회가 된 자기가 기녀의 팔을 잡아주었다.
그러자 그 기녀는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의 가슴을 파고들고 있었다.
“오냐! 그래야지!”
그러면서 그 기녀를 껴안은 상태에서 등을 토닥거려주다가 잠이 깨었다. 꿈이었다.
깨어보니 자기가 베개를 끌어안고 있었다.
[내가 지나치게 이영진 상무를 생각하니까 이런 꿈을 꾸는 것 같네. 이영진 상무는 결코 나와 다른 세상의 사람이 아닌가. 이런 꿈을 꾸는 것조차도 불경스런 일이지. 이영진 상무와 나는 주종(主從)간이 아닌가!]
이틀이 지났다.
아침에 영빈관 청소를 하고 있는데 변상철의 전화를 받았다.
“형! 이따 여기 사무실 올 거지? 오는 김진석이가 10시까지 오는 날이야.”
“김진석? 김진석이 누구지?”
“새로 뽑은 펀드매니저지.”
"아, 알았어. 곧 갈게.“
강기혁이 김진석을 만났다.
김진석은 아직도 사무실을 두리번거렸다. 아직은 믿음이 가지 않는 눈치였다.
강시혁이 부드럽게 말했다.
“집이 멀지 않다고 하니 금방 왔겠네요.”
“네, 6호선 타고 금방 왔습니다.”
“우리는 셋이 의기가 투합해서 법인을 만들었지만 본격적인 영업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지만 사모펀드사를 운영했던 사람은 아닙니다.”
김진석은 계속 듣기만 했다.
“사모펀드라는 것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자금을 받아 돈을 늘려주는 회사가 아닙니까? 우리 회사는 일반 사모펀드고 경영참여형은 아닙니다.”
“그럼 헤지펀드에 가까운 회사네요.”
“면접 때 말씀드린 대로 우선은 돈이 될 만한 회사의 주식에 투자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지금 법인만 설립되었고 아직 관계당국의 허가를 받은 상태도 아닙니다.”
“지금은 사모펀드사가 등록제지 허가제는 아닙니다.”
“그럼 어렵지는 않겠네요.”
“사모펀드의 설립과 등록을 컨설팅 해주는 회사도 있습니다.”
“그런 게 있습니까?”
“예, 다해줍니다. 돈이 들어가서 그렇지.”
“그럼 김진석 씨가 등록업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여기 상주를 못하고 영빈관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 영빈관이라고요?”
“예. 이 근처에 삼방그룹 영빈관이 있습니다. 거기 관리업무도 맡고 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그러면서 김진석은 상당히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강시혁을 쳐다보았다. 눈을 깜박이며 혹시 이 회사가 삼방그룹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 가 했다.
하지만 그건 아닐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왜냐하면 삼방그룹 기획실 같은 데는 유능한 사람들이 많아 이런 사모펀드사 등록 같은 것은 하루 만에 뚝딱하고 해버릴 것 같아서였다.
변상철이 옆에서 말했다.
“내가 금융위원회 사이트에 들어가 전문사모 투자업 등록신청서를 작성해보았습니다. 전문인력 기재사항이 있는데.... 우린 금융관련 자격증이 없어서.....”
김진석이 변상철이 초벌 작성한 신청서를 보았다.
“강시혁 사장님이 주식지분이 50%, 변상철 부사장님이 5%, 그리고 이영남 감사님이 45%이네요.”
“그렇습니다.”
“와, 그런데 정말 사장님 경력난이 삼방그룹 비서실이네요. 여기서 자금운용을 담당하셨습니까?”
“아, 예. 뭐, 그....”
“와, 이영남 감사님은 해외 MBA졸업에 월스트리트 투자은행 경력도 있네요. 그런데 변상철 부사장님은 공란이네요.”
“난 금융 쪽 경력이 없어서 뺐습니다. 대신 김진썩 씨를 집어넣을까 합니다.”:
“예? 저를요?”
“강시혁 사장님과 이영남 감사님도 경력들은 있지만 자격증은 없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강시혁이 말했다.
“김진석 씨는 직위를 이사로 해서 신청서를 작성해요.”
“예? 이사요?”
“사원은 한명도 없고 전부 임원이네요. 하지만 처음엔 다 이렇게 가는 거니까. 이해해요.”
변상철이 신청서에 필요한 법인등기부등본, 정관, 임대차계약서 사본 등을 김진석에게 넘겨주었다.
강시혁이 말했다.
“혹시 전문 인력이 자격증 없다고 신청이 잘 안될 것 같으면 컨설팅 회사와 의논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금융위원회는 여의도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광화문 정부청사에 있습니다.”
“일단 등록증을 받으면 사업자 등록증을 내러 세무서에 가는 것은 내가 가지요.”
“알겠습니다. 금융위원회 등록 업무는 제가 하겠습니다. 필요한 서류는 필요하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김진석은 처음엔 망설이더니 이제 적극성을 보이는 것 같았다.
이곳이 주식 리딩방이나 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사장이 삼방그룹 비서실 출신이고 감사가 월스트리트의 금융투자기관에서 근무했던 사람이라면 믿을 만 하였다.
어쩌면 이곳은 실력 이상의 회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습게 볼 회사는 분명히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