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녀의 두 번째 남편-155화 (155/199)

155화 골프 치는 사람들 (1)

(155)

다음날 오전이었다.

문화재단 큐레이터 신종화가 어떤 남자하고 같이 왔다.

“이분이 설운동 대리 자리로 오신 분입니다. 울산에서 올라오신 분입니다.”

“오, 그러세요?”

남자는 강시혁 또래로 보였다.

그런데 아주 정중히 허리 굽혀 인사했다.

“문재식 대리라고 합니다.”

“강시혁입니다.”

“울산서 새로 올라와 아직은 어리바리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문화재단에서 행정업무를 보는 대리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시혁의 직속상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오늘은 강시혁에게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하는 것이었다.

“저도 같은 대리입니다. 오히려 내가 부탁해야죠, 그런데 문 대리님은 대리 몇 년차이십니까?”

“삼년차입니다.”

“전 올해 대리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 제가 부탁해야죠.”

“아닙니다. 강 대리님은 비서실 대리 아닙니까? 청와대 비서관이 문화재청 7급보다는 더 끗발이 센 것 아닙니까?”

“아유, 요즘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다 각자의 맡은 일만 잘하면 되는 거죠. 오셨으니 차 한잔 하세요.”

그러면서 강시혁이 금산 아줌마가 준 대추차를 타주었다.

“차 맛이 좋네요.”

“문 대리님은 울산의 삼방전기에선 품질팀에 계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 설운동 대리와 자리를 맞바꾸었습니다.”

“설운동 대리는 잘 있죠?”

“매일 저한테 전화가 옵니다. 아무래도 ISO(국제규격) 품질관리 업무를 처음 해봐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고생하는군요.”

“그런데 강 대리님은 영빈관 관리업무 이외에 VIP 경호업무도 보는 분이라 그런지 체격이 참 좋습니다. 학교 다닐 때 학폭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 그런 건 없었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의 학생들이 다 얌전해서요.”

옆에서 신종화가 웃으며 말했다.

“강 대리님은 학폭에 시달린 게 아니라 일진 출신일거예요. 일본에 가서 혼자 야쿠자 7명을 때려눕힌 분이예요. 그 사건은 우리 그룹의 전설로 전해지고 있어요.”

“예, 그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

강시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싸운 건 맞지만 때려눕히진 못했습니다.”

“참, 대단하십니다. 내가 대단하신 분을 알게 되어 영광입니다.”

“일단 오셨으니 여기서 미술품 관리 시스템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관장님이 보내주신 업무 매뉴얼도 있습니다.”

“매뉴얼대로 하면 됩니다. 제조공장의 ISO 품질관리도 매뉴얼대로 하는 지침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림 반출은 어떻게 하는가요?”

“관장님의 반출허가 서명이 들어간 반출증 전표를 받으면 내줍니다. 여기 엑셀에 반출 그림 번호와 반출일자, 수령자 이름을 입력합니다.”

이 말을 하고 강시혁은 약간 속으로 뜨끔했다.

지난번에 신종화가 대작을 가져간 날 반출증을 받지 않고 내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동안 신종화가 가져간 그림들은 대개 반출증 없이 내어주었다. 큐레이터니까 믿었던 것이었다.

또, 관장도 그 당시는 강시혁에게 큐레이터 지시를 받고 일을 하라고 해서 까다롭게 굴지를 못했던 것이었다.

역시 새로 온 문 대리는 품질관리를 한 사람이라 일을 하는 접근방식이 달라 보이기는 했다. 꼼꼼한 사람 같았다.

강시혁은 문 대리에게 2층의 그림이 보관된 방들을 구경시켜주었다.

문 대리가 그림을 구경하는 동안 강시혁이 신종화에게 물었다.

“배동수 씨는 요즘 뭐해요? 천안의 XX대학 총장님을 만나러 갔었나요?”

“갔다 왔는데..... 영양가가 없는지 다시는 천안에 안 내려간다고 하네요. 지자체 홍보 애니메이션인데 별로 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거라도 하면 좋겠는데.....”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더 좋은데 가려고 하는 것 같군요.”

강시혁은 수입원이 따로 없는 배동수가 개고생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날 자기가 배동수의 팔을 꺾고 모작 그림을 찢은 것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문 대리가 강시혁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림 보관상태가 좋네요. 강 대리님이 관리를 잘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매뉴얼대로 했을 뿐입니다.”

“매뉴얼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죠. 삼방전기 울산공장에서 일어나는 안전사고도 따지고 보면 매뉴얼을 지키지 않는데서 나오죠.”

이날 문 대리와 신종화는 사무국장과 관장의 서명이 들어간 반출증을 보이고 소품 두 점을 가져갔다.

오후에 비서실 오남수 대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남수 대리는 비서실에서 건설 쪽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강 대리님? 오남수입니다.”

“아, 오 대리님!”

“강 대리님 말대로 장명건설은 정말 노노간의 반목이 심하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아, 그래요? 저도 말만 들었습니다.”

강시혁은 자기가 K&B컨설팅이란 가짜 명함을 가지고 노조위원장을 만나러 갔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이영진 상무에게만 보고 했었다.

“그런데 노조에서 어쩐 일인지 협상테이블로 나오겠다는 연락이 왔답니다. 그래서 내일 16차 협상이 열린답니다.”

“16차 협상요? 그럼 그동안 15차례나 협상을 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15차 임금협상을 하면서도 의견을 좁히지 못했던 거죠.”

“16차면 노조에서 올려달라는 임금 16%와 같네요.”

“하하, 그러네요. 그런데 회사가 줄 돈도 없습니다. 회사가 제시한 6%는 좀 야박한 것 같고 회사의 마지노선인 8%면 가장 좋은 타결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그럼 내일 오 대리님도 임금 단체협상 위원으로 참여를 하십니까?”

“아닙니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회사 측의 임단협 위원들은 장명건설 임직원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삼방건설 직원들도 거기엔 끼지 못합니다.”

“회사가 다르니 그렇군요.“

“사측 임금 교섭위원장은 장명건설 사장님이 하십니다. 삼방건설 전무이사였던 분인데 장명건설 인수하면서 그 회사 사장으로 가신분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분 요즘 날마다 회장님한테 깨지고 있습니다. 옆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입니다.”

“회장님이 그렇게 야단칩니까?”

“서울대 토목과를 나오고 건설 밥 30년이나 먹은 사람이 노조 애들한테 질질 끌려 다닌다고 날마다 터집니다.”

“임금협상과 서울대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아무튼 타워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사람이나 내려왔으면 좋겠습니다. 툭하면 진보 쪽 언론이나 시민단체에서 와서 사진을 찍어갑니다. 날씨도 추운데 왜들 그러는지.”

“내일 협상이 타결되면 내려오겠죠.”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강 대리님이 이번에 중국에 가서 대 활약을 하셨다면서요?”

“예?”

“어제 비서실장님이 사장단 회의에 참석했다가 로지스틱스 사장님한테 들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관광지에서 이영진 상무님 가방을 채가는 좀도둑을 순식간에 잡아서 팔을 비틀어버렸다면서요?“

“그, 그런 이야기가 나왔어요?”

“로지스틱스 사장님이나 거기 나가있는 해외사업 팀장이나 중국말 잘하는 안용석 과장이 전혀 몰랐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강 대리님이 몸을 날리면서 좀도둑을 낚아채는걸 보고 강 대리님은 도둑도 한눈에 알아보는 사람 같다고 했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아아, 그거 별것도 아닙니다.”

“별 것도 아니라니요. 이영진 상무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점심시간엔 강 대리님 이야기가 비서실 직원들 입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쑥스럽게 참.”

“일본에 가서 야쿠자 7명과 혼자 맞장 떴다는 이야기를 믿지 못한 사람이 많았는데 이제 제대로 믿는 것 같습니다,”

“허, 참.“

“중국에 나가있는 안용석 과장도 강 대리님이 태권도 실력이 3단이 아니라 품증만 안 받았지 5단 이상 될 거라고 했답니다.”

“저, 전화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강시혁이 혼자 중얼거렸다.

[로지스틱스 사장님은 사장단 회의에 나가서 그렇게 할 말이 없나? 내 이야기를 하다니. 물론 회의 때 나온 이야기는 아니고 휴식시간에 나온 이야기겠지만 듣기 참 민망하네.]

이번엔 유길준 대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 대리님? 강 대리님이 중원의 강호 무림을 평정했다면서요?”

“예?“

“사장단 회의에 참석했던 비서실장님 이야기를 듣고 바로 중국에 나가있는 안 과장님에게 전화를 해봤습니다. 순식간에 좀도둑을 잡아 팔을 꺾었다면서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가 왜 자꾸 나오는 가 모르겠습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존경스럽습니다.”

“하하. 그게 무슨 존경받을 일이라고.”

“우리 그룹에서 그렇게 무공이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강 대리님은 소림사 무술승이 와도 다 잡아버릴 분입니다.”

“유 대리님이 지금 한가하신 모양이네요. 그런 이야기도 하시고.”

“아니, 바빠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전화 안할 수가 없죠.”

“저, 전화 끊겠습니다.”

강시혁은 비서실 직원들도 되게 한가한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좀도둑 하나 잡아서 팔을 꺾은걸 가지고 강호 무림을 제패했다니 웃음만 나왔다.

이번엔 삼방전자 비서로 있는 최하나에게서 인스타그램 팔로우 요청이 들어왔다.

그런데 최하나는 자기 사진을 많이 올려놓기도 했다,

인물에 자신이 있는지 꽃밭에서 찍은 사진도 올려놓았고 해수욕장에 가서 비키니 옷을 입고 찍은 사진도 올려놓았다.

그런데 사진이 정말 예쁘게 나왔다. 실물보다 훨씬 예쁘게 나왔다.

이걸 보고 강시혁은 뽀샵과 사진 촬영 기술만큼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최하나는 팔로워가 10만이 넘어갔다.

“나는 이런 여자는 감당 못해. 현기증만 나네.”

강시혁은 스마트폰을 아예 꺼버렸다.

강시혁은 금요일 오후 벤츠를 끌고 세차장엘 갔다.

자동세차만 하고 말까 하다가 돈을 좀 더 주고 손 세차까지 했다.

[내일 공주님을 모시고 갈 건데 구석구석 세차는 해놔야지.]

강시혁은 차내에 방향제까지 뿌렸다.

역시 세차를 하고나니 기분은 좋았다.

차를 차고에 집어넣고 지하 관리실로 내려가고 있는데 변상철의 전화가 왔다.

“내일 토요일인데 이태원 놀러갈까?”

“나, 내일 골프장 가. VIP모시고 가야돼.”

“그으래? 토요일 근무시간 아니잖아? 시간외 근무수당 붙겠는데? 그런데 어디에 있는 골프장엘 가는 거야.”

“곤지암에 있는 이스트밸리 칸트리 클럽이래.”

“어? 거기 꽤 유명한 골프장인데! 나 그 근방에 있는 팬션에 침대 납품하러 갔다가 한번 봤는데 아주 좋던데?”

“몰라. 난. 그런 델 가보지 않아서.”

“VIP모셔드리고 공기 좋은 곳에서 핸드폰 야동이나 보면 딱 좋겠네! 그래도 대기 수당은 나올 거 아닌가?”

“좋긴 개뿔이 좋냐? 남 골프 치는데 따까리로 가는 것이!”

“그런 따까리라면 난 백번이라도 하겠네.”

“다음 주에나 만나자.”

“형이나 나나 출세해서 그런데 가서 골프 쳐야 하는데.”

“금생에선 틀렸다. 넌 침대공장 사장 아들이니까 가능하겠지만 난 금생이 아니라 내세에도 어려울 것 같다. 시방삼세에는 어려울 것 같다.”

“에효, 사실 그런 골프장은 나도 힘들어. 영세 침대공장 사장 아들에게는 넘사벽의 골프장이야. 이스트밸리는 회원 값 비싸기로 유명한 곳이야. 형 거기 골프장 회원권 값이 얼마인줄 알아?”

“몰라. 나 같은 흙수저가 알 턱이 있나.”

“자그마치 20억이야. 20억!”

강시혁은 20억이란 소리를 듣고 설마 농담이겠지 하였다.

자기는 1억도 안 되는 빚으로 인생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몇 년간을 개고생 했는데 20억이라니 말이 안 되었다.

취미생활에 20억을 쏟아 붓는 미친 인간이 어디 있나 했다.

“뭐라고 20억? 2억이겠지.”

“의심나면 그 골프장에 가서 회원권 값이 얼마냐고 물어봐.”

“야, 20억이면 천문학적 숫자다. 그 회원권 하나 가지면 우리 집, 아니 우리 강씨 가문 문중은 다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다.”

“형한텐 20억이 천문학적 숫자인지 몰라도 있는 사람들한테는 껌 값이야. 아마 삼방그룹도 법인 명의로 그 골프장 회원권 몇 개 갖고 있을 걸?”

[이 자식은 허풍만 늘어서 큰일이네. 우리 아버지가 평생 벌어서 얻은 대전 둔산동 아파트 전세 보증금이 2억이다. 그런데 20억이라니? 상철이 이 녀석은 진짜 허풍만 늘어서 큰일이네!]

밤에 이영진 상무로부터 카톡이 왔다.

[내일 새벽 5시까지 저희 집 앞으로 오시면 됩니다. 골프장에 가는 거니까 정장을 안 하셔도 됩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정확히 새벽 5시까지 모시러 가겠습니다.]

강시혁은 다음날 새벽에 일어났다. 혹시 실수할까봐 알람까지 해놓았었다.

얼른 세수 후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었다.

그리고 지난번 공항 면세점에서 이영진 상무가 사준 버버리 티셔츠를 입고 선그라스를 껴보았다.

슬슬 자기도 귀공자 티가 나는 것 같았다.

[이만하면 나도 멋있네. 그런데 멋있어봤자 아닌가? 남들 골프 치는데 운전이나 해주러 가니 말이야! 하지만 이영진 상무를 모시고 단둘이 한 시간 이상 차를 달린다고 생각하니 그건 좋네!]

강시혁은 새로 산 나이키 운동화도 신었다.

[남들이 보면 내가 골프 치러 가는 줄 알겠네. 나는 평생 골프채를 잡아보지도 못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