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중국 출장 (6)
(149)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을 흔들던 이영진 상무는 분명히 미소를 지었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강시혁은 이런 모습을 볼 때 자기의 마음도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강시혁은 재벌의 딸과 경호원의 관계를 떠나서 이영진 상무를 인간적으로 꼭 지켜주고 싶었다. 남자의 보호 본능이 심연에서 올라오고 있었든 것이었다.
[상무님! 이 강시혁이 정말 끝까지 지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강시혁이 다시 로지스틱스 사장이 있는 곳으로 왔다.
해외사업팀장이 사장 앞에서 눈웃음을 살살치며 말했다.
“사장님 오셨으니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지난번 중방의 부사장과 함께 갔던 가라오케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멀지도 않습니다. 걸어가도 될 거리입니다.”
팀장은 이 기회에 사장에게 단단히 아부 좀 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것 같았다. 어쨌든 사장은 자기의 앞길을 쥐고 있는 인사권자이기 때문이었다.
옆에 있던 안 과장이 빙긋 웃었다. 안 과장은 그 가라오케 술집이 어떤 집인지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같이 가본 경험도 있는 사람이었다.
일행들은 호텔을 나왔다.
사장은 뒷짐을 쥐고 걸었고 팀장은 열심히 앞에서 안내를 하였다.
강시혁은 잠자코 뒤를 따랐다. 이제 밤이 되어 선그라스는 벗었다. 하지만 무한이라는 곳이 코로나 발생지인지라 마스크는 꼈다. 길거리에도 노인층이나 여성들은 간혹 마스크를 한 사람이 있었다.
사장이 뒷짐을 쥐고 가면서 말했다.
“다 왔나?“
“다 왔습니다. 저기 보이는 농업은행 뒤편 건물에 있습니다.”
이 골목은 번화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먹자골목인 것 같았다. 환한 불빛이 도시의 위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가라오케는 건물 8층에 있었다. 팀장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열심히 사장에게 아부하는 발언을 했다.
“중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숫자가 8자입니다. 그래서 그 가라오케가 8층에 있습니다. 사장님 앞에서 이런 말씀 드리기는 송구하지만 이 지역에선 제일 크고 물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카라오케는 약간 어두운 긴 통로 안쪽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색 미러볼 조명이 빛나고 치파오를 입은 늘씬한 미인들이 일행들을 안내했다.
[룸살롱 같은 곳이구나!]
강시혁은 호텔 방 안에 이영진 상무를 혼자 놔두고 이런 곳에 온 것이 미안했다. 안절부절 했다.
사장의 너털웃음 소리가 들렸다.
“허허. 이 사람들 보소. 간단하게 생맥주나 한잔 하려고 했더니 이런 곳엘 오네.”
그런데 얼굴 표정은 하나도 싫은 표정이 아니었다.
원래 사장들은 직급이 아주 낮은 사람들과 이런 곳에 잘 오지 않는다. 체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이 온 로지스틱스 사장은 달랐다. 외부에서 낙하산식으로 들어온 사람이고 임기가 차면 회사를 떠날 사람이다. 그래서 중간관리자급인 차장이나 과장, 그리고 심지어 강시혁과 같은 대리급하고도 같이 온 것이다.
강시혁은 가라오케의 내부를 보고 크게 놀랐다.
고급스럽기도 했지만 그 넓이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백 평도 넘는 운동장만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손님은 많지 않았다. 코로나가 발생했던 지역이라 그런 것 같았다.
흰 와이셔츠에 조끼를 입은 지배인이 뛰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아, 지난번에 오셨던 분이군요. 반갑습니다.”
“나, 기억나요?”
팀장도 중국어는 좀 하는 것 같았다. 중국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이곳에 파견된 지가 좀 오래된 것 같았다. 그래서 간단한 회화는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 과장처럼 유창하게 잘하지는 못했다.
안용석 괴장은 여기서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 정말 발음도 좋았다.
지배인이 살살거리며 말했다.
“지난번에 장운 집단공사 링다오(영도자)들과 함께 오신분이 아닙니까? 헤헤.”
안 과장이 지배인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지배인은 ‘커이’ 를 연발하였다. 강시혁은 ‘커이(可以)’ 가 우리말로 하면 알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으로 알았다.
안 과장도 사장에게 눈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이 집에서 가장 최고의 룸을 배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오늘 모시고 온 분은 국가의 부부장(차관)급 인사라고 했습니다.”
“허허. 뭘 그렇게 까지야.”
그러면서 로지스틱스 사장은 목에 힘을 주면서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룸도 크고 넓었다. 가라오케 기계가 있었고 천정에는 무빙 조명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치파오를 입은 미인이 물수건과 얼음이든 물 컵을 가져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았다.
사장이 목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이런 곳에서 생맥주를 시킬 수는 없잖아? 폭탄주나 한잔씩 하지.”
그러면서 양주 한 병과 맥주를 시켰다. 양주는 조니워커 블랙을 시키는 것 같았다.
사장은 관직에 있을 때 폭탄주를 많이 마셔본 사람 같았다.
“이봐, 안 과장! 잔은 양주잔과 맥주잔을 다 가져오라고 해.”
강시혁은 폭탄주를 말로만 들었지 잘 몰랐다. 어떻게 마시나 구경이나 좀 해보기로 했다.
치파오를 입은 여성 두 명이 술과 안주와 과일 등을 가져왔다. 치파오를 입은 종업원이 술병과 안주를 테이블에 세팅할 때마다 그녀의 귀에 걸린 커다란 귀걸이가 흔들거렸다.
사장이 직접 폭탄주를 제조했다.
양주잔에 양주를 따르고 이것을 맥주잔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맥주를 부었다. 막주잔 속에 색깔이 다른 작은 양주잔의 양주가 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사장은 폭탄주를 각자의 앞에 놓았다.
“자, 우리 원 샷 하지. 그동안 무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느라 고생이 많았으니 한잔씩 해. 먼저 여기서 제일 나이가 많은 팀장이 선배로서 시범을 보여주는 게 어떨까?”
팀장이 폭탄주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팀장은 오늘 자기의 아부가 먹혀들어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럼 제가 원 샷 하겠습니다.”
팀장이 단숨에 폭탄주를 마시고 빈 잔을 흔들었다.
맥주잔 안에서 작은 양주잔이 흔들거리며 짤랑대는 소리를 냈다.
“짤랑, 짤랑.”
사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흠. 소리가 제법인데?”
팀장이 다시 빈 잔을 흔들며 말했다.
“사장님의 지도아래 무한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어 저도 기쁩니다. 아마 사장님이 삼방 로지스틱스에 부임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멋진 프로젝트는 수행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잔을 또 흔들자 짤랑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짤랑, 짤랑.”
강시혁은 팀장의 아부를 보고 감탄을 했다.
[아부를 하려면 저 정도로 해야지. 어제 사장이 던지는 서류에 얼굴을 맞고 얼굴이 빨개졌더니 오늘은 제대로 아부를 하네. 저 눈웃음치며 짤랑대는 것 좀 봐.]
사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팀장에게 다시 폭탄주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번엔 안 과장이 원 샷을 하라고 명령했다.
“안 과장도 한잔 해야지?”
안 과장도 일어나서 단숨에 폭탄주를 마셨다. 그리고 빈 잔을 흔들었다.
그러나 짤랑대는 소리는 팀장이 흔드는 것보다 작았다. 역시 흔드는 것도 짬밥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이번엔 강시혁이 차례가 되었다.
강시혁은 폭탄주를 처음 마셔보는 것이었다.
“저, 저는 폭탄주를 잘 못 마십니다.”
“이 사람아! 무슨 남자가 폭탄주를 못 마시나! 공직사회에선 젊은 사무관들도 얼마나 폭탄주를 잘 마시는 줄 아는가? 원 샷 해봐.”
강시혁은 마시긴 했지만 숨이 차서 중간에 한번 꺾었다. 이 모습을 보고 사장이 혀를 찼다.
“쯧쯧쯧. 생긴 것은 남자답게 생기고서는 고까짓 폭탄주 하나 원 샷을 못하니! 앉게!”
폭탄주가 한번 더 돌아갔다. 이제는 앉아서 마셨다.
팀장이 손을 비비며 사장에게 말했다.
“아가씨 네 명을 부르겠습니다.”
오늘 아부의 클라이맥스인 것 같았다.
“아기씨를? 흠. 흠. 뭐 그렇게 까지야.”
그러면서 또 사장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팀장이 바로 벨을 눌러 지배인을 불렀다. 지배인이 바로 달려왔다.
팀장은 지배인에게 손가락 네 개를 보이며 말했다.
“샤오지에 쓰거런! (아가씨 4명)!”
“하! 오케이!”
지배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후 늘씬한 여성 4명이 들어왔다.
팀장이 일어나더니 그중에서 가장 젊고 예쁜 여자를 콕 집어서 사장 옆에 앉혔다.
“너는 저기 앉으신 분 옆에 앉아라. 높은 분이시다.”
지명을 받은 여자가 냉큼 사장 옆에 앉았다.
팀장은 다음 예쁜 여자를 자기 옆자리에 앉히고 안 과장도 마음에 드는 여성을 자기 옆자리에 앉혔다. 그중에서 가장 촌스럽게 생긴 여자가 강시혁의 옆에 앉게 되었다.
중국어를 모르는 강시혁은 뚱하니 앉아만 있었다. 여자가 뭐라고 해도 말을 못 알아들으니 눈만 껌벅거렸다.
사장은 자기 파트너가 마음에 드는지 계속 웃어가며 필담을 나누었다.
강시혁이 보니 사장은 한문 글씨를 잘 썼다. 역시 서울대 출신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던 사람다웠다. 여자도 사장이 쓴 글을 아는지 깔깔거리며 같이 필담을 했다.
팀장도 옆에 있는 여자와 서툴지만 중국어로 대화하며 웃었다. 안 과장이야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중국어를 잘하니까 금방 여자와 함께 만리장성을 쌓고 있었다. 강시혁만 나무토막처럼 앉아있었다.
강시혁의 옆에 앉은 여자는 재미가 없는지 하품만 했다.
모니터 화면이 켜지고 팀장 옆에 앉았던 여자가 노래를 불렀다. 나머지 사람들은 박자를 맞추었다. 따라 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강시혁은 중국말을 몰라 우두커니 쳐다만 보았다.
안 과장은 자기 옆자리 여성과 합창까지 했다. 정말 중국 노래를 잘 불렀다. 이때 강시혁은 사장이 자기 옆자리에 필담을 하던 여성에게 돈을 주는 것을 목격했다. 민망스러워 할까봐 못본 척 하였다.
강시혁은 가라오케가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다. 말을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또 옆에 있는 여자도 마음에 안 들었다. 진한 화장품 냄새와 함께 담배를 어찌나 많이 피워대는지 참기가 어려웠다.
여자들은 탬버린을 흔들며 춤까지 추자 강시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좁은 공간에서 이렇게 지랄들을 하면 정말 코로나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강시혁이 팀장에게 말했다.
“저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왜? 더 놀지?”
“몸이 안 좋습니다.”
“옆에 앉은 파트너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지배인을 불러 바꾸어 달라고 할까?“
“아, 아니, 그게 아닙니다. 아까부터 자꾸 설사가 나는 듯해서요.”
“중국 여행이 처음이라 물이 안 맞아서 그런 모양이군. 하긴 나도 처음 중국에 와서 기름진 음식 때문에 설사를 많이 했죠.”
강시혁이 필담을 나누고 있는 사장에게 말했다.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자꾸 설사가 나서요. 또 저는 술도 잘 못하고 중국말도 안 통해 그냥 들어가겠습니다.“
“어? 그럴 텐가?”
사장은 옆에 있는 예쁜 여성에게 정신이 팔려 강시혁에게 크게 관심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알아서 하라는 투였다.
강시혁은 속주머니에서 인민폐 몇 장을 꺼냈다. 그리고 자기 파트너였던 여성의 손에 쥐어주고 가라오케를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좁은 공간에서 담배 연기를 안 맡으니 살 것 같았다.
강시혁은 호텔 뒤편에 있는 체육관이 있는 건물까지 걷기운동을 했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 가라오케에서 맡았던 담배 냄새와 화장품 냄새를 떨쳐내기 위해 샤워를 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아침 조식을 위해 로비로 내려갔더니 아직 이영진 상무와 로지스틱스 사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가 왔다. 로지스틱스 사장이었다.
“강 대리요?”
“예, 그렇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사장의 목소리는 아주 탁하고 갈라진 음색이었다.
어젯밤에 진하게 놀은 것 같았다.
“내가 머리가 아파 식사를 못하겠소. 이따가 10시에 관광지 가는 것에나 합류를 하지. 강 대리가 상무님 모시고 식사해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이영진 상무가 나타나자 강시혁은 매번 그랬던 것처럼 정중히 인사했다.
“잘 주무셨습니까? 식사하러 가시죠. 상무님.”
“로지스틱스 사장님은요?”
“머리가 좀 아프시답니다. 오늘 아침식사는 거르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이 호텔 내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조식은 뷔페식이었다.
이영진 상무는 식사를 많이 안하는 사람이라 흰죽과 과일과 샐러드 같은 것을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강시혁도 접시에 음식을 담아 가져왔다. 그리고 이영진 상무가 앉은 테이블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앉았다.
이영진 상무가 말했다.
“여기 와서 앉으세요.”
이영진 상무는 중국에 와서 꼭 로지스틱스 사장과 식사를 했다. 강시혁은 언제나 따로 먹었다. 또, 로지스틱스 사장도 강시혁에게 다른 테이블에 가서 먹으라고 말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시혁 역시 자기가 이영진 상무나 사장이 식사하는 자리에 끼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늘 혼자 먹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영진 상무가 같이 먹자고 부른 것이다.
강시혁이 사양했다.
“여기서 먹겠습니다. 제가 어찌 상무님과 함께.......”
“오늘 사장님도 안 오셨으니 이리 와서 앉으세요.”
강시혁이 머뭇거렸다.
이영진 상무가 한번 더 재촉했다.
강시혁은 마지못해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이영진 상무가 앉은 테이블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