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큐레이터의 잠적 (4)
(135)
동수라는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분노의 표정으로 신종화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랬나? 회사의 승인 없이 그림을 가져왔나? 말해봐!”
“미안해. 흑흑.”
동수의 콧수염과 턱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신종화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훌쩍이고 있었다.
“내가 전임강사가 되더라도 종화가 경찰에 붙잡혀 간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미안해!”
동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우아아아아!”
강시혁과 변상철이 오피스텔 문 입구에 앉아서 동수의 이런 행동을 지켜보았다.
입구에 앉아있는 것은 동수와 신종화가 도망을 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중이었다.
[이 자식이 미쳤나?]
그러더니 동수라는 남자가 갑자기 이제까지 그려 논 모작을 찢었다.
신종화가 놀라 달려들어 말렸다.
“안 돼!”
“비켜!”
동수는 이제껏 공들여 그려 논 모작을 다 찢었다.
그러더니 동수는 갑자기 신종화에게 달려들었다. 강시혁은 동수가 신종화를 폭행하려는 줄 알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동수는 울고 있는 신종화를 껴안았다.
“나, 전임강사 안할 거야. 종화의 마음을 알았으니 그것으로 됐어. 흑흑.”
“흑흑.”
두 사람은 서로 부등켜안고 울고 있었다.
강시혁은 두 사람의 행동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였다.
[그렇지. 진정한 연인의 사이라면 이렇게 해야 되겠지. 부럽네.]
변상철도 계속 보기가 민망한지 고개를 돌렸다.
신종화가 찢어진 모작을 만지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제껏 공들인 작품인데.....”
동수가 신종화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 마. 나 이제 대리운전이라도 하면서 그림을 그릴거야.”
대리운전이란 말에 강시혁이 고개를 들었다.
[뭐? 대리운전? 이 자식 봐라. 대리운전이 만만한줄 아나?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직업인데!]
변상철은 대리운전이란 소리를 듣고 옆에서 입을 막고 웃었다.
강시혁이 신종화를 보며 말했다.
“신종화씨. 원본 그림은 오늘 밤이라도 영빈관에 갖다놓으세요. 그리고 내일은 문화재단에 출근하세요.”
“정말로 이 일은 회사에선 모르나요?”
“물론입니다. 이번 일은 신종화 씨와 나만 아는 일입니다. 그러니 내일은 출근하세요. 관장님은 설운동 대리와 신종화 씨 두 사람을 자르라고 했지만 그렇게는 못할 겁니다. 두 사람 한꺼번에 자르면 문화재단 일이 안돌아가니까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동안 얼굴이 붓고 몸이 아파 회사를 못나왔다고 말씀하세요. 관장님은 아마 설운동 대리와 신종화 씨에게 사표수리가 아닌 시말서 제출 정도로 끝낼 겁니다.”
“강 대리님께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배려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림을 갖고 간 신종화씨가 연락이 안 될 땐 나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경찰서에 고소를 하면 신종화씨는 범죄자가 되고 나는 회사에서 쫓겨나겠지요. 그러면 서로 죽는 일입니다. 그래서 서로 살아나는 방법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강 대리님이 사려 깊은 분인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까지.”
동수라는 사람도 말했다.
“종화! 이분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사표 수리가 안됐다면 내일 출근해. 이번 일로 우리는 얻은 게 참 많아. 서로의 마음을 알았잖아.”
그러면서 동수가 웃자 신종화도 비로서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동수라는 남자가 강시혁에게 말했다.
“저 때문에 마음고생을 시켜드려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경찰에 고소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아, 됐습니다. 신종화 씨가 내일 출근만 하면 모든 일은 다 끝납니다.”
“혹시 명함이 있으면 한 장 주시겠습니까?”
“그러지요.”
강시혁이 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동수에게 주었다.
동수가 명함을 보며 말했다.
“아, 삼방그룹 비서실 대리이시군요.”
“동수 씨는 성씨가 어떻게 됩니까?”
“배씨입니다. 배동수입니다.”
“당신은 진정한 예술가 같이 보입니다.”
그러면서 강시혁이 배동수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신종화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 오피스텔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죠?“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삼방그룹 비서실이.... 참 대단한 곳이네요.”
신종화는 강시혁이 오피스텔을 찾은 것이 삼방그룹 비서실이 힘을 써서 그런 줄 알았다.
“신종화씨! 그림 원본을 옮길까요? 지금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차를 가져오지 않았으니 신종화씨 차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아, 그리고 다음 주 목요일 미국의 듀크 대학 총장님과 천안에 있는 XX대학교 총장님이 영빈관에 오십니다.”
“예? 그런가요?”
“두 분이 회의도 하고 영빈관에 있는 미술품 감상도 하신답니다. 그날 신종화씨가 와서 그림 설명도 해주세요. 신종화 씨는 큐레이터가 아닙니까?”
신종화와 배동수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배동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회사에 출근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목요일 영빈관에 오시는 건 내가 사무국장님께 신종화 씨가 와야 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원본 미술품 수송을 할까요?”
변상철과 배동수가 그림을 운반하여 지하에 있는 신종화의 차에 옮겼다.
이날 밤 무사히 그림 원본을 영빈관으로 옮겼다.
그림을 옮기고 신종화가 돌아갈 때 강시혁이 말했다.
“어두운데 조심히 돌아가요. 그리고 목요일 총장님들 회의가 끝나면 같이 한잔해요. 배동수 씨도 오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신종화는 뒤도 안돌아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신종화가 가버리자 변상철도 간다고 하였다.
“너는 나하고 같이 한잔 해야지.”
“아니, 가봐야 돼. 내일 포천으로 출근해야 돼. 목요일 신종화와 배동수가 온다니 나도 올게.”
“좋지.”
“두 사람 오늘 하는 행동을 보고 충격 먹었네. 요즘 보기 드문 러브스토리야. 나도 신종화 같은 여자 사귀었으면 좋겠다.”
“그날 와서 신종화 친구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해라. 미대 나온 큐레이터 소개해 달라고 해라.”
“헤헤. 갈게.”
“참, 일당 줘야지.”
“일당은 무슨 일당! 일당 달라고 한건 그냥 해본 소리지. 목요일 술이나 거하게 사.”
그러면서 변상철도 이태원역 가는 길로 사라졌다.
다음날 대리 급여가 나왔다. 542만원이었다.
전에 문화재단 경비반장이었을 때는 320만원을 받았었다. 그것도 회장이 영빈관에 왔다가 화단 정리를 잘 했다고 해서 올려준 것이 그것이었다.
그래도 320만원이면 주간에 어르신 보호센터에서 일하고 야간에 대리운전 뛸 때와 비슷해 직장을 옮기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받아본 급여는 542만원이니 무려 222만원이 오른 것이다. 일본에 가서 손가락 하나 잘리고 얻은 보상이었다.
급여가 이렇게 나오니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4대 보험으로 떼 가는 것이 너무 많았다. 실 수령액은 460만원을 받았다.
매달 갚는 신용회복위원회의 변제금 100만원을 제하면 그래도 360만원이 남게 되어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끔 술을 마셔도 자기는 집세가 나가는 것이 없어서 월 200만원은 저축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역시 대기업이 좋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주가 가고 월요일이 되었다.
이날도 강시혁은 장명건설 주식을 사들였다.
특히 이날은 미국의 다우지수와 나스닥 지수가 상승하여 주식이 전반적으로 올랐지만 장명건설은 약세를 면치 못하였다. 강시혁은 9천원 부근에서 계속 매집을 했다.
그러다가 오전 11시가 넘자 주가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올라가면 안 되는데. 내가 아직 이 주식을 다 사지 못했는데.]
그러다가 오전 11시 30분경 대량 팔자물량이 나오면서 주가가 다시 8천 원대 초반까지 밀렸다.
토론방이 달아올랐다.
“이제 8천 원대도 무너진다. 곧 7자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주식은 거래량이 없고 악재만 있어 1년간은 회복이 어려울 거다. 두고 봐라.”
이렇게 되자 손절물량이 또 꾸역꾸역 나오고 있었다.
주식은 꼭 제로섬 게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력이 있다면 누군가가 차트그리기 운전을 아주 잘하는 것 같았다.
강시혁은 이날 8,500원대에서 많이 담았다. 오전에 벌써 2억 이상을 샀다.
점심에 햄버거나 하나 사먹고 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는데 비서실 유길준 대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난주 주간 업무보고 안 보내 줍니까?”
강시혁은 장명건설 주식을 사들이느라 그쪽에만 신경을 썼더니 주간업무 보내는 것을 깜박했다.
“아,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오전 9시에 비서실 전체 회의가 있습니다. 내일 강 대리도 참석해야 합니다.”
[제기랄, 내일 오전 장 주식거래는 틀렸네.]
하지만 주식거래 한다고 회의에 불참할 수는 없었다.
아주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넵, 참석하겠습니다.”
“월급은 잘 받았죠?”
“예, 지난주 금요일 잘 받았습니다.”
“그럼 이번 주에는 꼭 회식 한번 해야 합니다. 여직원들이 벼르고 있습니다.”
“목요일은 영빈관 행사가 있으니 금요일 어떨까요?”
“금요일 좋습니다.”
유길준 대리의 전화를 끊고 나니 신종화가 생각났다.
회사에 잘 출근 했나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문화재단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했다.
“국장님! 강시혁입니다.”
“반가워요.”
“신종화 씨 출근했죠?“
“했어요. 다행이 관장님이 사표는 반려해 줬어요. 그 대신 설운동 대리와 함께 시말서를 받도록 했어요. 호호. 잘됐지 뭐예요.”
“정말 잘됐네요.”
“그래서 오늘은 내가 설 대리와 신종화씨를 데리고 점심 먹으러 가기로 했어요. 둘이 화해는 시켜야죠.”
“역시 문화재단은 국장님이 꼭 계셔야 합니다.”
“호호, 고마워요.”
“참, 이번 주 목요일 미국 듀크 대학 총장님과 천안의 XX대학 총장님이 영빈관에 오십니다. 그날 영빈관에 보관된 미술품 감상도 있는데 신종화 씨 보내줄 수 있죠?“
“그러죠. 내가 관장님께 말씀 드리죠.”
“고맙습니다. 국장님.”
강시혁은 기왕이면 신종화를 보내달라고 하는데 무게를 실어주고 싶었다.
자기가 보내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비서실장이나 이영진 상무가 관장에게 직접 말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가 문화재단 부이사장의 직함도 있어 이영진 상무에게 직접 부탁을 하기로 했다.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너의 딸과 직접 교신할 수 있는 카톡을 하는 사람은 삼방그룹에서 극소수다. 임원들 빼고는 아마 강시혁이 유일할 것이다.
[상무님. 강시혁입니다. 이번 목요일 대학 총장님들이 영빈관을 방문하면 미술품 감상을 하리라고 봅니다. 미술품에 대한 안내와 설명은 저보다는 문화재단의 큐레이터가 전문성이 있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상무님께서 문화재단 관장님께 큐레이터를 보내달라고 전화 한통을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바로 답신이 왔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바로 답신이 온 것이었다.
오후에 주식거래가 끝나고 오늘 체결 물량을 확인해 보았다.
오늘은 오전에 2억, 오후에 2억 등 4억 원을 주식 투자에 쏟아 부었다.
현재 장명건설 한 종목에 몰빵한 투자금액은 누계액이 7억에 달했다. 강시혁은 금주에 자기가 이영남에게 빌린 돈을 모두 쏟아 부울 작정이었다.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아서 오래간만에 바벨운동을 했다.
운동 도중 신종화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늘 출근하여 정상적 업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설운동 대리와는 화해를 했고요. 관장님께서도 시말서 제출 정도로 일을 끝내 주셨습니다. 그동안 누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해요.]
강시혁도 회신을 보냈다.
[정상 업무를 보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그런데 혹시 관장님께서 목요일 영빈관 손님접대 지원을 하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지시 받았습니다. 미술품 안내는 물론 당일 서빙업무도 지원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천안에 있는 XX대학은 애니메이션 학과가 있습니다. 총장님이 오시면 배동수 씨 일을 한번 부탁해보세요.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건 쉽지는 않을 거예요.]
[참고로 말씀드리는데 삼방그룹에서 XX대학교의 생활관 신축공사 자금을 지원해 주었답니다. 기부금 명목으로요. 그러니 총장님도 우릴 무시하진 못할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전임 자리는 TO가 있어야 할 겁니다. 일단 말씀은 드려보지요. 고맙습니다.]